충주명소탐방기
*탐방일자:2014. 7. 26일(목)
*탐방지 :충북 충주시 소재 명소 5개소
(충주세계무술박물관, 충주탄금대, 중원탑평리7층석탑,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주미륵대원지)
*동행 :한국방송대서울남부총동문회 회원 20여명
제게는 이번의 충주명소탐방이 충주에의 첫 나들이가 아닙니다. 충주시는 1990년대에 모 회사에서 2년 반 동안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영업 독려 차 거의 매달 이곳의 대리점을 방문해 눈에 많이 익은 곳입니다. 이번 나들이가 역사탐방이 아니고 단순한 관광놀이였다면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역사탐방지로 충주가 선정된 데는 이 지역이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면, 먼저 중원이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 문화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중원(中原)은 지리적으로 금강과 남한강이 흐르는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지역적으로는 충북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합니다. 이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곳으로 동서남북의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몽룡, 백종오, 하문식님이 공저한 역사서 “고구려와 중원문화”의 책 소개 글에 따르면 중원문화란 충청북도 충주시를 중심으로 백제13대 근초고왕, 고구려20대 장수왕과 신라24대 진흥왕 사이, 즉 서기 371년에서 551년 사이에 삼국의 각축이 일어난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시기의 문화를 이릅니다. 삼국 중 어느 나라도 이곳을 왕도로 삼지는 않았지만 세 나라 모두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전쟁을 벌여 한 차례씩 점령했던 곳이어서 세 나라의 문화가 공존해왔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충주를 교통의 요충지로 소개했습니다. 온 나라의 한복판으로 중국의 형주(荊州)와 예주(豫州)와 같다고 한 충주읍(忠州邑)은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 편리하여 예부터 서울의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많이 정하였다고 합니다. 또 경상도에서 서울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을 지나 충주읍에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지나 이 읍과 통해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읍에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나봅니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충주읍(忠州邑)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어 유사시에는 점령하는 곳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충주읍내에 한함을 전제했습니다만, 임진년에 신립(申砬)이 왜적에게 패한 곳도 이 지방이어서 평상시에도 살기(殺氣)가 하늘을 찌르며, 빛이 없어 부유한 자가 적고 백성은 많아 구설이 많고 경박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가 충주가 아니고 낙동강 유역의 영천 일원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택리지의 내용이 반드시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중환의 살기 운운은 크게 괘념할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서울의 신도림역을 출발한 버스가 2시간 반 가량 달려 첫 방문지인 충주세계무술박물관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37분이었습니다.
1)충주세계무술박물관
충주는 삼국시대에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고려 때 대몽항쟁의 최대 승전지이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임란 때 신립장군과 8천여 명의 병사가 왜군을 맞아 격렬하게 전투를 치러낸 곳이기도 합니다. 9차례의 대몽항전에서 8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양질의 철 생산지인 충주에서 우수한 무기를 만들 수 있어서였습니다. 이런 충주에서 1998년부터 매년 한 번 씩 세계무술대회를 열고, 이 대회에 참여한 여러 나라들로부터 다양한 무기와 공예품을 기증받아 무술공원 한 가운데 세계무술박물관을 세워 2011년에 개관을 한 것은 그 나름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무술(武術, martial art)이 철학적 측면을 중시하는 무도(武道)나 기예적 측면이 돋보이는 무예(武藝)와 다른 점은 기술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인 격투 기술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점이라 합니다.
연건평이 1,250평인 무술박물관은 지상5층과 지하1층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그 외관이 날렵하고 아담했습니다. 현지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지상2층과 3층에 전시된 전시물을 꼼꼼히 살펴 본 후 4-5층의 전망대로 이동하여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2-3층의 전시실에는 무술축제에 참여한 여러 나라 들이 기증한 무기와 민속공예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네델란드의 투구와 라투니아의 전통의상을 보았고 부메랑의 실물도 처음 보았습니다.
이번 박물관 탐방을 통해 우리의 전통무술인 택견에 대해 이해를 넓혔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라 하겠습니다. 충주가 무술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택견입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택견이란 “고구려의 선비와 신라의 화랑도를 통한 삼국의 호연지기가 고려의 무인들의 기백으로 이루어지고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오늘의 ‘참정신’을 구현하는 전통무예”를 이릅니다. 1983년 택견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때 초대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두 분이 계셨으니 현암송덕기 선생과 송암 신한승 선생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송암선생은 현암선생의 제자인데 두 분 모두 1987년에 타계하시고, 송암 신한승 선생의 제자인 운암정경화 선생이 그 뒤를 이어 택견의 정립과 전수에 큰 역할을 하셨다 합니다. 이런 택견이 전통무예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것은 무술박물관이 개관된 2011년의 일입니다. 태권도가 공격위주의 무술이라면 택견은 방어위주의 무술이라는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택견과 태권도의 차이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2)충주 탄금대(彈琴臺)
충주세계무술관에서 자리를 옮긴 곳은 해발108m의 나지막한 대문산에 자리한 충주 탄금대로, 박물관과 지근거리에 있습니다.
신라의 악성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탄주해 이름을 얻은 탄금대(彈琴臺)가 충주의 경승지로 자리매김 한데는 남한강 및 그 상류 쪽으로 1Km가량 뻗어나간 대문산의 몫이 컸을 것입니다. 탄금대 바로 아래에서 달천강의 물을 몽땅 받아들여 수량이 풍부해진 남한강이 대문산의 절벽을 따라 휘감고 돌면서 절경을 빚어내, 조선조의 문인 중 누구라도 탄금대를 찾았다면 시조창 한 수를 뽑지 않고 그냥 자리를 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대문산의 마루금을 따라 낸 시멘트 길을 걸었습니다. 주차장에서 탄금대로 이어지는 길은 길 양쪽의 키가 큰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어 그다지 덥지 않았습니다. 탄금대 가는 길에 충혼탑 및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그리고 감자꽃 노래비를 차례로 보았습니다.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팔천 병사의 고혼과 패전의 책임을 떠맡아 자결한 신립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입니다. 위령탑아래에서 탄금대 전투를 지휘한 신립장군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알아보는 것이 조금은 잔인하다 싶으면서도 역사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싶어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와 차용주님의 ‘한국한문소설사’에서 관련내용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명(明)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조선이 거절하자 일본은 선조25년인 1592년 4월13일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왕명을 받고 충주로 내려간 조선의 신립장군은 충주목사 이종창과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 정찰에 나섭니다. 이들과의 작전회의에서 “적병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들판에서 기마로 짓밟아버리는 것이 효과적인 전술이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되어 있으니 배수의 진을 쳐야하오.”라며 군사들을 이끌고 탄금대로 나와 배수의 진을 친 것은 누가보아도 작전의 실패입니다. 탄금대 앞 동남쪽 들판은 수초들이 뒤엉켜 있고 며칠 전 비가 와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이고 그 뒤 서북쪽으로 낮은 구릉지대가 있으며 그 뒤로 달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합수점이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마다하고 이곳에다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은 잘못된 작전을 감행하다 병사 8천명의 목숨을 몽땅 잃고 자신은 자결합니다.
탄금대전투의 다른 이름인 달천강전투에서 순국한 신립장군을 등장시켜 왜군에 패한 것을 조명한 문학작품으로 윤계선(尹繼善)과 황중윤(黃中允)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이 있습니다. 윤계선은 신립이 새재를 지키지 않고 달천강변에 배수진을 친 것을 패전의 원인으로 지적한데 반해, 황중윤은 국가에서 방어의 준비가 전혀 안된데다 병사들도 오합지졸이어서 배수의 진을 칠 수 밖에 없었으며, 신립장군의 지용(智勇)이 없어 패한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제가 윤계선과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은 서해 유성룡이 “신립은 평소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다”고 혹평한 것을 “징비록”에서 보아서입니다. 문제 장수가 일으키는 화(禍)가 문제 사병들이 야기하는 병영사고에 비할 수 없이 엄청 심각함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신립장군의 패전이 아닌가 합니다.
이 고장 항일시인 권태응님이 지은 “감자꽃”노래 말을 새겨 놓은 감자꽃노래비를 보고 감명을 주는 시가 모두 현대시처럼 난해한 것만은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노래비에서 탄금대로 내려가는 길은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전망지여서 배를 띄운 남한강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탄금정에서 둘러 앉아 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후 나무계단을 따라 열두대로 내려갔습니다. 신립장군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아래 강가로 열두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열두대에서 둘러본 전망은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좌우로 남한강이 흐르고 바로 아래 섬이 보였는데 충주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저 섬이 늪지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비경이다 할 만한 열두대에서 다시 탄금정으로 올라가 버스주차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남한강을 오른 쪽으로 끼고 산길로 내려가자 대흥사사 보였습니다. 궁도장을 거쳐 주차장으로 올라가 버스에 올라 다음 탐방지인 중원탑평리칠층석탑으로 향했습니다.
3)중원탑평리칠층석탑(중앙탑)
탄금대를 출발해 달천강을 건넌 다음 남한강을 따라 조금 북진하자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 보였습니다. 넓은 잔디밭 공원에 자리한 칠층석탑 동쪽 가까이에 남한강 물을 가두어 조정경기장으로 쓰이는 탄금호가 자리하고 있어 주변 경관도 빼어났습니다. 공원근처 식당에서 먼저 점심 식사를 한 후 칠층석탑 앞으로 이동해 해설사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이탑도 다른 탑처럼 절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어느 절인지는 알 수 없다 합니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이 여기에 절을 짓고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는 일설은 김생사지가 금가면 반송리에 따로 있음이 밝혀져 낭설로 판명됐습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여기가 당시의 왕조인 통일신라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임시로 탑을 세운 후 건강한 사람을 영토의 남과 북 양끝지점에서 출발시켜보았는데 그때 마다 여기 탑평리에서 만나는 것이 확인되어 여기에 7층 석탑을 세웠다 합니다. 중앙탑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탑이 세워진 시기는 8세기 말의 원성왕 때입니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시행하고 김제의 벽골제를 증축하는 등 그 나름 개혁을 추구했던 임금이어서 신라의 한 복판인 이곳에 거대한 중앙탑을 세웠으리라 충분히 짐작됩니다.
국보86호로 지정된 중앙탑은 그 높이가 12.86m에 달해 통일신라의 석탑으로는 가장 규모가 큽니다. 조선시대까지도 남한강 길은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수로였습니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배들이 남한강과 달천강의 합수지인 인근 탄금대 나루로 모여들었고, 탄금나루에서 배를 타고 400리 물길을 따라 한양까지 가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하니 이 나루에서 쉬어가고자 하는 배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탑은 남한강을 따라 충주를 지나는 배들에 등대역할을 단단히 했다합니다. 충주는 통일신라의 중앙이지 한반도의 중앙은 아닙니다. 육진을 개척해 오늘의 한반도를 우리국토로 만든 조선조에서는 충주가 더 이상 중앙이 아니었기에 이중환이 충주읍을 살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혹평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 중앙탑은 2층의 기단위로 7층의 탑신을 올렸고 그 꼭대기 상륜부는 노반석 2석을 중첩해 놓고 그 위에 복발과 양화를 구성했는데 해설사님은 기단이 두 층으로 된 석탑은 이탑이 유일하다했습니다. 또 안내전단에는 7층 탑신의 옥개받침은 각층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2단의 괴임을 만들어 그 위에 옥신을 받치고 있어 신라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단부가 일부 파손되고 탑이 점차 기울어져가 도괴의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여 이 탑을 전면해체해 복원공사를 시작한 것이 1917년으로, 이때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편, 동경2점과 청동제 유개합 등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동경2점이 이 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 탑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차 사리장치의 봉안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이 탑을 매개로 신라와 고려가 역사적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4)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충주를 최종적으로 점령한 나라는 원래 주인인 백제나, 백제를 몰아낸 고구려가 아니고, 한반도의 남동쪽 한 귀퉁이에 나라를 세운 신라입니다.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켰다는 탄금대와 통일신라의 원성왕이 영토 한가운데 세운 중앙탑을 둘러보고 충주의 오랜 주인은 역시 신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중앙탑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 다다랐을 때도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은 것은 전시관의 외관이 컨테이너박스와 유사한 데다 규모 또한 매우 작아서였습니다.
고구려가 충주일원을 ‘나라의 으뜸 되는 평원’을 뜻하는 국원성(國原城)으로 칭한 것은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마침 북방에서 돌궐족이 침공해와 고구려는 남한강 유역에서 남진(南進)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돌궐족의 내침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했을리 없고 그랬다면 국원성을 전지기지로 해 더 아래로 진출해 신라를 위협하면 했지 진흥왕에 국원성을 넘겨주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되었다면 충주일원은 중원(中原)이 아닌 국원(國原)으로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중원(中原)에 그 이름이 가려 충주의 고구려 때 이름이 ‘국원성(國原城)’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전시관을 둘러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어찌된 것인지 제가 즐겨보는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 전 22권 어디에도 국원성이라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겨우 찾아낸 것이 신형식님의 “고구려사”로, 223쪽에 기술된 ‘국원성’ 관련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러한 동남방향의 진출은 광개토대왕10년(400)의 남정으로 소맥산맥 이남으로의 진출과정에서 국원성의 설치와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고구려세력의 충주일대의 장악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안내전단에 "충주고구려비가 국원성의 존재를 규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시골 마을에 내팽겨진 이 비석이 고구려비로 밝혀지지 않았다면 국원성의 존재 규명은 요원했을 것 같습니다.
전시관의 대표적인 전시물은 물론 고구려비입니다. 1979년 입석리 마을에서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이 비석은 주민들이 빨래판으로도 사용해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었고. 그래서 비문의 해독이 쉽지 않았다 합니다. 광개토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남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세운 경계비인 이 비석에서 알아낸 것은 전시관은 물론 안내팜플릿에도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내용들은 아래 5가지로 요약 정리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석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데 중요한 열쇠로, 만주에서 남한강에 이르는 고구려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를 동이(東夷)로, 그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르고 신라 왕에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관계에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셋째, 3국간의 정치적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그 영향을 알 수 있습니다. 당주, 도사 같은 직명은 고구려문화가 신라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비석문화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백제와 신라에 큰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넷째, 고구려의 관등표기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인명표기가 관직명, 출신부명, 관등명, 인명 순으로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절시(節賜), 절교사(節敎賜) 등의 용어는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방송대에서 출간한 “국어사”에도 이두의 첫 싹은 고구려에서 텄지만 본격적인 발달은 신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번 탐방여행으로 충주고구려비가 이두식표기를 해독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음을 안 것만으로도 보람이 느껴집니다.
고구려비 관련 내용 외에도 고구려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이 전시판에 적혀 있어 고구려사를 조감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서력357년에 제작되었다는 안악3호분의 고분벽화를 재현한 전시물이 눈을 끈 것은 250명으로 구성된 대행렬도가 볼만해서 입니다. 묘사도 사실적이고 색채도 화사하고 다양해 마치 조선의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충주 일원에는 여기 고구려비 외에도 봉황리 마애불상군이나 장미산성, 두정리 고구려고분과 탑평리온돌 육 등의 고구려유적들이 더 있습니다. 하루 날 잡아 모두 둘러본 후에라야 충주시에 혼재된 3국의 자취를 서로 대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
이번 나들이의 마지막 탐방지는 충주시의 남쪽 끝에 자리한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입니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서 남동쪽으로 반시간 넘게 이동해 도착한 충주미륵대원지는 2004년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하늘재에서 하산하는 길에 한번 들렀던 곳입니다. 미륵리에서 1.8Km를 걸어야 오를 수 있는 해발525m의 하늘재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재위3년인 서기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낸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 158년에 개통된 죽령보다 2년 앞선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현세의 관음과 내세의 미륵이 하늘재에서 만나 대간 길을 함께 걸으며 백두산으로 향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충주미륵대원지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주차장에서 하늘재로 통하는 큰 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걸어 다다른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는 고려초기의 석굴사원터로 해발고도가 평균 378m이상인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원의 특이점은 주실의 북향배치라 합니다. 주실의 미륵불입상에 다가가 뒤돌아보니 과연 미륵불입상이 중앙에서 북향하여 멀리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그 방향으로 석등과 오층석탑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어 주실의 북향배치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절들은 주실이 어느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기에 북향배치를 특이하다 하는지 인터넷에서 가람배치 자료를 검색해 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미륵대원지 입구에서 하늘재 가는 방향으로 푸른 잔디의 넓은 공터가 보였는데 해설사님은 이곳은 말을 갈아타는 역으로 여관도 함께 있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리원이나 장호원처럼 지명이 원(院)으로 끝나는 곳은 거의다가 이런 기능을 했다 합니다. 석굴사원이 지어진 고려 시대에도 경상도에서 한양을 찾아 나선 과객들은 하늘재를 넘어 여기 원(院)에서 느긋하게 하룻밤을 묵고난 후 한양으로 떠나기 전 석굴사원을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사원 터 남쪽 끝자리에 위치한 미륵불입상의 정확한 명칭은 충주미륵리석조여래 입상으로 이 미륵불입상 쪽으로 올라가는 저를 처음 반겨 맞은 것은 미륵대원지 석조귀부입니다. 여기 석조귀부(石造龜趺)는 그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거북모양받침답게 엄청 커보였습니다. 거북모양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석조귀부의 상단에 비석을 세워놓은 듯한 비좌(碑座)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돌계단을 걸어올라 충주미륵리오층석탑 앞에 잠시 멈춰 섰습니다. 중앙탑과 달리 하층 기단이 단층인 것은 탑 높이가 중앙탑의 13m에 비해 반도 안 되는 6m에 불과해 단층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어서일 것입니다. 5층 탑신부 상단의 상륜부도 신라시대의 석탑보다 조형감각이 뒤떨어져 전체적으로 중앙탑에 못 미친다지만 그래도 이 탑이 중앙탑처럼 크지 않아 뒤편에 자리한 주실의 미륵불입상이 답답함을 면한 것은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오층석탑과 미륵불 입상의 한 가운데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 충주미륵대원지석등입니다.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륵대원지석등은 신라시대의 8각형의 석등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입니다.
미륵대원지 탐방의 하이라이트는 주실의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입니다. 3면이 석벽인 주실 한 가운데 자리한 여기 미륵불입상은 그 높이가 10.6m에 달하는 거불(巨佛)로 지긋하게 눈을 감은 모습이 마냥 편안해 보였습니다.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 석굴의 돔형지붕과는 많이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석굴암 석굴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이곳의 석굴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뒤 목조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석굴 안에 모신 본존불이 바로 미륵불입상입니다. 석굴벽에 본존불을 모시는 여래좌상과 석불조상이 그려져 있다 하는데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륵불입상이 멀리 북쪽의 월악산을 바라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패망에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누이 덕주공주는 여기 월악산에 덕주사를 창건하였고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으며, 태자는 미륵리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데 천년사직을 지켜온 신라라고 마냥 살아남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두 오누이의 신라의 존속에 대한 마지막 염원을 담은 전설은 그저 애틋함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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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출발할 때 내린 비는 충주에 도착하자 그쳤습니다. 때때로 조금 내리다 이내 멈춘 비가 본격적으로 내린 것은 미륵리에서 버스에 올라 서울로 출발할 때여서 비 때문에 고생하리라는 예측은 기분 좋게 빗나갔습니다. 땡볕 더위와 큰 비를 모두 피한 이번 탐방이 알 찰 수 있었던 것은 현지 해설사님의 친절한 설명 덕분이었습니다.
하나 흠이라면 귀경길에 나이 드신 한 분이 우리 역사를 지킨다며 한단고기를 설명하는 중에 일본인을 비하하는 막말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의 감정을 자극해 전쟁을 할 뜻이 아니라면 다중 앞에서 말끝마다 그들을 “왜놈”이나 “일본놈들”로 부르는 것은 일본인들이 우리를 “조센징”으로 비하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천박한 것입니다. 진정 극일을 하려면 논리적으로 그들의 허구적인 주장을 격파하고 국력을 키워 그들을 앞서려고 노력해야지 감정만 자극하는 비속어를 남발해서는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또 한단고기의 내용이 아직 역사학계에서 공인된 것이 아닌데 이를 근거로 우리민족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논하려면 버스 안이 아닌 보다 진지한 자리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탐방사진>
1)충주세계무술박물관
2)충주탄금대
3)중원탑평리7층석탑(중앙탑)
4)충주고구려비전시관
5)충주미륵대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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