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9.울진명소 탐방기1(성류굴, 불영사, 소광리금강소림)

시인마뇽 2014. 6. 22. 09:08

                                                        울진명소 탐방기

 

 

                                  *탐방일자:2013. 10. 25일(금)

                                  *탐방지 :경북울진 소재 성류굴, 불영사 및 소광리금강송림

                                  *동행 :경동고24회동문 이규성교수 및 조현 목사

 

 

  제가 울진 땅에 첫발을 들인 것은 새해 첫 새벽 백암산을 올라 해맞이를 했던 2007년입니다. 성류굴 덕분에 울진의 지명은 진작부터 들어본 바지만, 부산에서 태백을 남북으로 이어가는 고산준령의 낙동정맥이 앞을 가로막아 그 너머 동해에 면해 있는 울진 땅을 우정 찾아가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 울진의 명소를 다시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곳 울진의 평해에 병원을 차린 고교동기 이종규 박사 덕분입니다. 영남알프스를 한 구간 종주한 고교동문 이규성교수와 조현 목사를 이박사가 묵고 있는 후포에서 만나 회포를 푼 후 이튿날 이종규 박사가 내 준 승용차로 울진 명소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울진 땅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망양정과 월송정 모두 강원도 땅에 세워진 것이며, 이번에 처음 찾아간 성류굴, 불영사와 소광리 금강송림도 강원도에 속해 있다가 경상북도로 편입된 곳입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울진이 강원도에 속한 것으로 나옵니다.

 

 

  “철령에서 남쪽으로 태백산까지는 산등성이가 가로 뻗쳐서 하늘과 구름에 닿은 듯 하며, 산등성이 동쪽에는 아홉 고을이 있다. 북쪽으로 함경도 안변과 경계가 닿은 흡곡과 통천, 고성, 양양과 옛 예맥의 도읍이었던 강릉과 삼척, 울진(蔚珍), 그리고 남쪽으로 경상도 영해부와 경계가 맛 닿은 평해가 그곳이다.”

 

 

 

  대다수가 동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울진의 도시들은 그 규모가 크지 않아 낙동정맥을 넘어 서울로 이어지는 동-서간도로가 잘 나있는 편은 아닙니다. 낙동정맥 종주 길에 이 지역을 지날 때도 고갯마루에 차도가 나있는 곳이 드물어 종주구간을 나누는 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이번 탐방지는 모두다 낙동정맥 동쪽 편에 자리하고 있어 차를 타고 정맥을 넘나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작년 여름 바닷가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방문한 데 이어 이번에 바다에서 서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성류굴, 불영사와 소광리 금강송림을 둘러보아 벽지의 외진 땅으로만 여겨왔던 울진 땅과 보다 가까워지게 되어 기쁘고 또 기쁠 뿐입니다.

 

 

 

1.성류굴

 

 

  아침 일찍 일어나 후포 앞 바다를 조망한 후 이박사와 함께 평해의 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박사의 후의로 독감예방주사를 접종한 후 잘 다녀오라며 내준 승용차로 울진명소 탐방 길에 나섰습니다. 7번 국도를 따라 북진하다 근남에서 좌회전하여 10시 20분 경 왕피천 변에 자리한 성류굴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른 아침 한 때 서늘했던 한기가 완전히 가신 왕피천에 산들바람이 불어와 보를 막아 담아놓은 잔잔한 냇물이 파르르 전율하는 듯 찰랑거렸습니다. 냇가에 뿌리박은 갈대가 바람 부는 대로 춤추는 듯 흐느적거리는 정경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왕피천변에 임시로 설치해 놓은 가교를 따라 걸어 성류굴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성류굴(聖留窟)은 전장 870m의 석회암 동굴로 12곳의 광장과 물웅덩이(池) 5곳, 그리고 종유석과 석순 및 석주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합니다. 일반인에 개방된 부분은 입구에서 270m 정도여서 볼거리는 덕항산의 환선굴에 비해 많이 빈약합니다만,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번 찾아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굴이 성류굴(聖留窟)로 불리는 데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임진왜란 당시 굴 앞 사찰의 불상을 옮겨놓아 성불(聖佛)이 머문 굴이라 하여 성류굴(聖留窟)로 명명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굴 안에서 수도하고 사찰을 건립했는데 성인(聖人)이 유(留)했다 하여 성류사(聖留寺)로 호칭했으며 암벽에 작은 구멍이 있다하여 성류굴(聖留窟)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으로 알려진 이 굴은 삼국유사에 장천굴(掌天屈)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 시대 대학자 이곡의 관동유기에 보다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합니다.

 

 

 

  바로 아래 성류사를 일별한 후 헬멧을 쓰고 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통로가 좁고 높이가 낮아 몸을 팍 낮추고 꾸부정한 자세로 몇 곳을 통과하자 잘 발달된 커다란 종유석과 석주가 더러 밑동이 물에 잠긴 석순도 눈에 띄었습니다. 석순은 동굴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에 의해 동굴바닥에서 자라는 동굴의 생성물로 물속에서 자랄 수 없는데 물에 잠긴 석순이 보인다는 것은 석순이 자라기 시작할 때는 해수면이 낮아 동굴 안에 물웅덩이가 없었음을 뜻합니다. 그새 지각변화가 있어 해수면이 다시 올라왔고 인근 강과 하천의 수면도 같이 올라와 지금의 물웅덩이가 만들어졌으며 덕분에 많은 석순이 하반신을 물에 담가 반신욕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안내판에는 이 굴의 생성시기를 2억5천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하나, 신생대 때 경동성요곡운동으로 이 굴과 같은 시기에 석회암산지가 형성되었을 환선굴이 수백만 년에서 수십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동굴지질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에 비춰볼 때 이 굴의 나이도 그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에 공개된 굴이 그다지 길지 않아 왕복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반시간 남짓 걸린 것 같습니다.  환선굴에 비해 길이도 엄청 짧고 굴 안의 설치물 및 조명도 매우 단조로웠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여기 성류굴이 훨씬 전이어서인지 평일인데도 이 굴을 찾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굴 안을 돌아보는 중 눈에 확 띈 것은 잘려진 석순의 단면이었습니다. 언뜻 보아 나무의 나이테를 빼어 닮았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크게 달랐습니다. 우선 한 그루(?)를 자른 단면에 나이테를 이루는 동심원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형성되었다는 것이고 나이테가 나무처럼 촘촘하지 못하고 성기기가 이를 데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잘린 면이 선명하고 색상이 맑아 황갈색(?)의 다른 석순이나 종유석에 비해 꽤나 곱게 보였습니다. 한 아름이 넘는 굵기의 석주, 아담하게 자라난 종유석,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수십만 년을 넘게 버텨온 석순을 바라보노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에 “자연은 영원하다”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이 굴은 주유천하를 즐길 만큼 여유 있는 선비들만의 탐방처가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인근 백성들이 이 굴로 들어와 몸을 숨겼다가 왜군이 입구를 막아 굶어주었다는 슬픈 이야기는 이 굴이 수많은 민초들과 애환을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가 분노하는 것은 왜의 잔학성입니다. 그 잔학성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일본은 결단코 미국과 같이 세계를 주도하는 일류의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절망스러운 것은 백성들의 참사를 지켜만 볼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무능입니다. 이러한 무능은 탐욕에서 비롯된 부정부패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그 후에도 나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욱 심해져 끝내는 일본에 강점당하기에 이릅니다.

 

 

 

  말로만 들어온 성류굴을 직접 찾아와 돌아보고 간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뿌듯해져 불영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2.불영사

 

 

  관동팔경으로 널리 알려진 망양정이 멀지 않은 근남 시내에서 수산교를 건너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왕피천과 나란히 나있는 북쪽 천변의 36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다가 남쪽으로 물굽이가 바뀌는 왕피천과 헤어지고 북쪽으로 갈리는 광천을 따라 나 있는 36번 도로를 계속 탔습니다. 동서를 가로막는 낙동정맥을 넘어 내륙과 동해안을 이어주는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여기 저기 산을 깎아내 천혜의 불영계곡에도 볼 상 사나운 곳이 더러 보였습니다. 낙동정맥 상의 고갯마루에 한참 못 미친 중간쯤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 주차시킨 후 일주문을 지나 불영사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천년고찰 불영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번 화마를 입어 소실되었지만 그때마다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불영사는 조선조 태조 6년인 1397년에 전소된 것을 소운(小雲)스님이 중건했고, 다시 소실된 것을 1500년에 약성법사께서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응진전을 빼고 다 타버린 것을 1609년 진성법사가 재건하는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시련을 잘 견뎌낸 고찰입니다. 일주문 앞 안내판에 이 절의 이름이 “천축산 불영사”로 적혀 있는 것은 이 절 뒷산이 인도의 천축산을 닮았다하여 천축산으로 불린데 그 연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은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 아래 불영계곡으로 이어졌습니다. 몇 분을 내려가 불영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큰 키의 소나무가 즐비한 송림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꽤 넓은 곳에 터 잡은 불영사 본당에 이르렀습니다.

 

 

 

  대웅보전 앞의 큰 연못 불영지(佛影池)를 보자 이 절이 불영사(佛影寺)로 불리는 내력을 알 것 같았습니다. 넓은 공터 한 가운데(?) 자리한 큰 연못에 기거하는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서편에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의 그림자가 항상 이 연못에 비친다하여 불영사(佛影寺)로 불렸다는 안내판의 해설이 조금도 어김없는 참이다 싶었습니다. 일주문에서 한참 떨어져 산 속 깊숙한 곳에 터 잡은 이 절에서 가꾸는 텃밭이 제법 넓어 이 밭에서 거둬들이는 소출이 스님들을 먹이고도 남을 것 같았습니다. 이정도의 경작지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소설가 김정한이 그의 소설 “사하촌(寺下村)”에서 사찰의 비리를 고발한 것은 스님들의 욕심이 과해서일 것입니다.

 

 

 

  영조1년인 1725년에 지어진 대웅보전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팔짝 지붕에 그 앞마당 삼층석탑과 어울려 참으로 단아해 보였습니다. 때 마침 천축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어 이절의 주변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본당인 대웅전과 삼층석탑은 더 할 수 없이 다소곳해 보여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이 절만이 간직한 그윽한 아름다움은 큰 연못 불영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단출한 대웅보전에 비해 불영지는 그 규모가 작지 않아 이 절이 더욱 넓게 보였습니다. 불영지(佛影池)에 면해 지은 법영루(法影樓)의 목어(木魚)가 밤이 되면 불영지의 고기들을 불러내어 한담을 나누는 것은 아닌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림자 영(影)을 이름 속에 넣은 것은 여기 불영사(佛影寺)만이 아닙니다. 전남 고흥의 팔영산(八影山)도 그러합니다. 아주 오래 오래전에 중국의 위왕이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손수 이 봉우리들을 수소문해 찾아 나섰다 합니다. 고흥반도에 자리 잡은 여덟 봉이 그림자의 주인공임을 알고 팔영봉(八影峰)으로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산이 바로 팔영산(八影山)입니다. 그림자는 사물의 형체를 그려낼 수는 있어도 사물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림자는 진실이 될 수 없고 오직 허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허망한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좇아 나서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상정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림자가 파랑새로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 일주문을 나서면서 불영계곡의 유명세가 삭으러들지 않는 데는 이 계곡에 자리한 불영사가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3.소광리 금강송림

 

 

  금강송은 궁궐이나 문화재 복원공사에 긴히 쓰이는 데 비해,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 아주 귀한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소나무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남대문을 다시 짓는데도 금강송이 모자라 외국산을 수입해 썼다 합니다. 국보1호인 남대문을 중건하는데도 모자랄 정도로 절대량이 부족한 금강송이 지름 60cm 이상 되는 대경목(大莖木)으로 자라는 데는 150년 이상 걸린다 합니다. 경주의 황룡사를 복원하는 데만 4톤 트럭 2,400대분이 필요하다니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 문화재 복원은 요원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송이 자라는 곳은 고성, 울진, 삼척, 봉화 등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산줄기입니다. 이 지역들 모두 눈이 많이 내려 이곳에서 자라는 소나무들은 설해를 입지 않도록 가지를 짧게 뻗고 위로 치솟아서 목재로 아주 적합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금강송을 제가 처음 만난 곳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2005년의 일입니다. 백두대간상의 차돌배기에서 석문동 쪽으로 하산하면서 30분 넘게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지나면서 우리의 소나무가 저리도 장대할 수 있구나 감탄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이박사한테서 소광리 금강송림을 보고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 이번에 탐방코스로 잡은 것입니다.

 

 

 

  불영사를 빠져나와 합류한 36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다가 광천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917번 지방도로로 들어섰습니다. 후곡천을 따라 북진하면서 감탄한 것은 이 계곡을 에워싼 좌우의 산이 새빨개 불타는 듯해서입니다. 가을이 절정에 이른 10월 하순의 낙동정맥을 새빨갛게 물들인 단풍이 서울 근교산에 비할 수 없이 깨끗하고 선명해 만산홍엽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광천교에서 4km는 족히 넘게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주차장이 보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소광리 금강송림이 사전예약을 한 사람에 한 해 입장을 허한다는 안내판의 글을 보고서 그냥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싶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10여분을 더 올라가보았지만 금강송림이 보이지 않아 별 수 없이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평해로 향했습니다.

 

 

 

  금강송은 참으로 귀한 나무입니다. 산림청에서 삼척 준경묘 주변의 약150만평의 임야에 14만주의 금강송을 기르고 있고 150년 이상 된 금강송이 약 1천주, 그리고 100년생이 9천주가 자라난다 합니다. "유홍준님은 문화재청장으로 일할 때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 방안이 바로 150년 후 산림청의 금강송을 문화재청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서로 업무협정서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2004년 11월 11일에 에 여기 소광리에서 경북지사를 증인으로 세워 문화재청과 산림청이 업무협약식을 갖고 국무총리가 서명한 후 업무협약서를 타임캡슐에 넣었다 합니다. 그 업무협약서에는 “산림청과 문화재청은 후손들이 전통목조건물을 수리하고 복원하는데 사용할 금강송림을 조성하는데 합의하고 국무총리 입회하에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 150만평의 금강송 솔밭은 향후 150년간 어떤 이유로도 벨 수 없다는 업무협약을 맺으며 이에 관한 일체의 자료를 여기 타임 캡슐에 담아 후손들에게 알려둔다, 2005년 11월 11일 산림청장, 문화재 청장 확인 국무총리”라고 적혀 있다고 유홍준님은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에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뜻 깊은 업무협약서가 체결된 데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조연환 산림청장의 공도 적지 않았음을 부기합니다.

 

 

 

  평해의 병원으로 돌아가 한나절 편히 타고 다닌 승용차를 이 박사에 넘겨 준 후 서울행 버스에 올라 울진군 명소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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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겨울 낙동정맥을 종주할 때 통고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눈 덮인 통고산을 지나면서 못내 아쉬워했던 것은 울진 소광리의 통고산 휴양림을 들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휴양림이 바로 업무협약서에 나오는 금강송림입니다. 이 박사의 배려로 금강송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 이번 탐방의 작은 보람이라 하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제가 영원히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150년간 아예 개방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처럼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맺은 두 청간의 협약이 문서대로 지켜져 눈앞의 급한 일을 처리하기에 바쁜 다른 공무원들에 귀감이 되게 하려면 국민들이 그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하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비록 금강송림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탐방을 주선해준 이박사와 동행한 친구들에 감사인사 전하며 탐방기를 맺습니다.

 

 

 

 

 

 

 

                                                               <탐방사진>

 

 

                                                                1)성류굴  

 

 

 

 

 

 

 

 

 

 

 

 

 

 

 

 

 

 

 

2)불영사  

 

 

 

 

 

 

 

 

 

 

 

 

 

 

 

 

 

 

3)소광리금강송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