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7.고창명소 탐방기1(선운사)

시인마뇽 2013. 7. 17. 16:53

 

                                                        고창명소 탐방기1

 

                                    *탐방일자:2013. 4. 27일(토)

                                    *탐방지   :전북고창소재 고창읍성, 신재효 고택/고창판소리박물관

                                                  고창고인돌공원박물관, 선운사

                                    *동행      :안양문화원 회원

 

 

  한시를 배우려고 매주 월요일 오전에 나가는 안양문화원에서 ‘테마가 있는 전국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북 고창의 명소를 탐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참가신청을 했습니다. 이미 만원이라서 0순위로 며칠 간 대기한 끝에 마침 자리가 나 합류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아침7시에 문화원을 출발한 버스가 목적지인 고창시내에 도착한 시각은 10시가 조금 넘어서입니다. 버스 안에서 동승한 문화원의 해설사로부터 고창의 명소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은 데다 현지 해설사의 상세한 안내가 더해져 누구라도 귀 기울여 들었다면 명소탐방이 하나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1)고창읍성

 

  고창읍내에 소재한 고창읍성을 처음 본 것은 2004년 겨울 방장산을 오를 때였습니다. 방장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고창읍성이 참으로 다부져보였는데 이번에 직접 와서 보니 과연 그러했습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조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축성한 고창읍성은 성곽의 둘레가 1,684m이고 그 높이가 4-6m 정도이며 성곽안의 넓이가 5만평 남짓한 작은 석성으로 그 외관이 비록 아담했지만 다부져 보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179개의 읍성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주로 남해안 및 서해안 지방과 북쪽 변방에 축조되었습니다. 여기 고창읍성도 179개의 읍성 중의 하나임은 물론입니다. 별반 이름이 나 있지 않은 고창소읍에 성을 쌓아야 할 만큼 왜군의 침략이 잦았던 것은 아마도 이곳이 해안과 면해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험준한 산악으로 이루어진 내륙의 깊숙한 곳이나 동해안에 위치한 소읍에서 이런 규모의 읍성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애써 쳐들어가보았자 빼앗아 가지고 나올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일 것입니다. 이정도 규모의 읍성을 대라하면 해미읍성과 낙안 읍성을 들을 만한데 세 읍성의 지리적 공통점은 바다에서 가깝고 농사지을 논 뜰이 꽤 넓다는 것입니다.

 

 

  반영환과 최진연은 그들의 공저 “한국의 성곽”에 성곽은 그 기능에 따라 도성, 장성, 산성, 읍성, 나성과 옹성으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이중 행정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같이하는 읍성은 대개가 배후에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하는 것이 보통으로 이런 읍성을 산성(山城)이나  평지성(平地城)과 구분하여 평산성(平山城)으로 부릅니다. 해미읍성이 전형적인 평지성이라면 여기 고창읍성은 비록 뒷산이 매우 낮지만 평산성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공북루(拱北樓)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왼쪽 성곽 위로 올라섰습니다. 여장(女墻)이 없어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성곽 위 황톳길은 마주 오는 사람에 길을 피해주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이 성곽을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처음으로 눈길을 준 곳은 동북쪽 먼발치에 자리한 해발743m의 방장산으로 원래 이름은 방등산(方等山)입니다. 고려사악지에 나오는 방등산가(方等山歌)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선운산가와 정읍사와 더불어 백제가요 5수 중의 하나로 그 문학사적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현전하는 백제가요 중 가사가 전해지는 것은 정읍사 한편 뿐으로 방등산가는 신라 말 도둑들에게 여기 방등산의 동굴로 잡혀온 장일현의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원망한 노래라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곽을 따라 밖에다 꾸며 놓은 꽃밭이 불타오른 것처럼 보인 것은 진홍색의 철쭉꽃이 만개해서인데 꽃 벨트가 가지런히 이어진 것 보아 사람들 손이 많이 간 것 같습니다. 성곽 길을 따라 돌아 처음 만난 옹성은 등양루에 붙어 있었습니다. 옹성의 크기가 남한산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여기 옹성이 훨씬 옹골차 보였습니다. 등양루를 지나자 왼 쪽 가까이로 저수지가 보였고 그 뒤로 고개가 보였는데 장성의 백양으로 넘나드는 고개인 것 같습니다. 성곽을 반쯤 돌아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즈음 안양문화원에서 함께 한시를 공부하는 한 분을 만나 나머지 성곽 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제가 이분에 들려준 이야기는 유달리 성을 많이 쌓은 조선조의 숙종임금에 대해서였습니다. 숙종임금이 북한산성과 상당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했고 남한산성에 옹성을 붙여 쌓았으며 남한 땅 최대의 산성인 부산의 금정산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영조 임금 다음으로 오래 왕좌에 계시면서 왕권을 강화했기 때문임을 설명 드렸습니다.

 

 

  동, 서, 북문 중 서문과 북문 그리고 옹성을 둘러본 후 빼먹은 동헌과 객사를 찾아 성내의 한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성안에 총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는데 거의 다 소실되어 남은 건물은 몇 채 되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사진을 찍은 후 공북루로 옮기는 중 지석묘가 보여 이 또한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공북루로 성을 빠져나가려는데 앞서 그냥 지나친 옥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밖에서 공북루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만나는 첫 건물이 옥사라는 것은 조선조는 오늘과 달리 백성들에 겁부터 주어 다스렸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쓰레했습니다.

 

 

  성 밖으로 나와 바로 옆 신재효고택으로 이동했습니다.

 

 

2)신재효 고택/고창 판소리박물관

 

  판소리란 “광대 한 사람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우리 고유의 민속악”이라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적혀 있습니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복합명사여서,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더하여 ‘판’과 ‘소리’의 개별적 의미를 알아야 온전하게 판소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판’이란 ‘씨름판’, ‘노름판’, 싸움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특수한 행위가 행해지는 곳을 이릅니다. ‘소리’는 우리의 전통음악에서는 성악을 일컬을 때 ‘노래’와 구분해 썼습니다. 가곡, 가사, 시조는 물론 잡가들도 대부분 ‘노래’라 불렀습니다만, 유독 ‘판소리’를 ‘남도소리’로 부른 것은 노래와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어서입니다. 그 무엇이란 다름 아닌 소리의 광범위한 개념으로 노래에 대비해 볼 때 복잡한 소재를 잘 표현해 낸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음성적 소재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포함됨은 물론입니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판소리란 소리판에서 부르는 소리로 정의될 만합니다.

 

 

 

  판소리가 태동한 것은 조선 숙종 말기나 영조 초기로 17세기 끝 무렵에서 18세기 첫 무렵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판소리를 반석으로 올려놓은 분은 누가 뭐라 해도 동리 신재효입니다. 순조12년인 1812년 여기 고창에서 태어난 신재효는 1884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판소리만을 위해 일하신 분입니다. 동리 신재효는 지방 향리출신으로 광대가 아니면서도 판소리에 심취해 판소리꾼들을 적극 후원했고, 판소리의 사설을 집성해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박타령, 적벽가 및 변강쇠가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으며, 이론적 체계를 모색해 ‘광대가’를 지었으며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는 등 이론가이자 비평가로서도 그 역할을 다한 판소리계 최고의 지도자였기에 그의 고택에 ‘한국의 세익스피어 동리 신재효(棟里 申在孝)’라는 안내판을 붙였을 것입니다.

 

 

 

  신재효의 고택은 크지 않았습니다. 마당도 없는 이 작은 집에서 어떻게 후학들을 가르쳤을까 하는 의문이 풀린 것은 박물관에 걸린 신재효가 살던 옛집의 그림을 보고나서입니다. 집안에 넓은 연못을 들어앉힐 정도로 넓은 대지에 들어선 집채는 뒷산에 가까이 자리한 본채 외에도 다섯 채가 더 있었으며 울타리를 대신한 바깥채에 들인 방들이 꽤 많이 보였습니다. 답답하리만치 비좁은 신재효고택을 휘 둘러본 후 옆자리의 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박물관의 정식 명칭이 ‘고창 판소리박물관’이어서인지 고창출신의 명창들이 자세히 소개됐습니다. 이 고장 출신의 진채선은 동리가 아껴온 국내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대원군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판소리를 듣고 새들이 모여들 정도로 온갖 소리를 잘 낸 이날치명창도, 또 김세종, 정창업, 전해종 명창 모두 이 고장 출신이라 합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대충 훑어보았는데도 박물관에서 보고 배운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은 것은 기억의 한계를 보완하고자해서인데 사진에 담아온 문헌과 자료를 찾아 읽어보려면 몇 년을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한 번 시간을 내서 다시 와보아야겠다 싶은 것은 판소리에 관한 한 여기처럼 많은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박물관의 해설자를 따라 춘향가의 ‘사랑타령’을 불러본 것도 큰 배움이었습니다.

 

 

 

  동리 신재효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긍정적입니다만,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양반들의 점잖은 취향에 맞추고자 서민적 정서를 약화시킨 것이 아니냐는 일부 평가도 있습니다. 아악이 양반들이 부르는 정가라면 타령은 창부나 서민들이 즐겨 부르는 잡가로 즐기는 음악도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오직 판소리만이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천민까지 모두가 즐겼던 당대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신재효의 공이 컸던 만큼 딱히 부정적으로 볼 일만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판소리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고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도 지정된 데는 판소리가 특정한 계층의 향유물이 아니고 임금과 천민 모두 즐겼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3)고창고인돌공원 박물관

 

  2007년 여름 호남정맥 종주 길에 주암의 고인돌공원을 둘러보고, 제 블로그에 “고인돌이 ‘지상이나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의 일종’으로,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의 탁자식고인돌, 남방식의 기반식고인돌 그리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려놓은 개석식고인돌로 나누어진다.’’라고 탐방기를 남겼습니다. 고인돌은 역사시대 이전인 선사시대의 유적이어서 고인돌과의 대화는 자연 우리 인류가 어떻게 역사시대를 준비해왔는가를 더듬어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고인돌은 인류가 발명한 최대의 걸작품인 문자보다 훨씬 전에 존재한 것이어서 문자에 함축된 의미보다 훨씬 깊고 넓을 것입니다. 안양문화원에서 ‘테마가 있는 전국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에 여기 고창고인돌공원박물관을 포함시킨 것도 고인돌의 가치를 공감해서일 것입니다.

 

 

 

  고창군에서 발간한 고창관광안내팜플렛에 따르면 고창고인돌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넓게 고인돌군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매산리 산기슭에서부터 약1.5Km 이어지며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하니 그곳 가까이 있는 이 곳에 박물관을 세울 만하다 하겠습니다.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지대는 동북아시아일대인데 그중에서도 한반도에 몰려 있음을 박물관의 한 전시물에서 확인했습니다. 한반도 전체의 고인돌이 약3만기로 이중 2만기정도가 전남지방에 몰려있다 하니 호남지방은 고인돌의 보고라 불릴 만합니다.

 

 

 

  고인돌은 한마디로 말하면 돌무덤입니다. 고인돌이 이 지방에 몰려 있다는 것은 이 지방에 거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이는 호남지방이 선사시대에도 살기 좋았음을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거석을 옮겨 돌무덤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고인돌을 설치했다는 것은 동원할 인력이 모자람 없이 많았고 동원한 인력을 조직화할 세력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제 전공이 아니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부족국가의 태동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넓은 공원 안에 자리한 박물관도 규모가 꽤 커보였습니다.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그려낸 조형물에서 고인돌의 분포도, 청동기시대에서 마한 시대를 거쳐 백제로 오기까지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전시물을 보고 배워갈 것이 참 많다 했습니다.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보다 자세하게 형상화한 것은 박물관 옆에 재현해 놓은 선사시대의 부락입니다. 짬을 내 이 부락을 둘러보며 벌써 사라진 옛 선조들의 삶의 편린들을 챙겨보았습니다. 움집이 거의 다여서 잃어버릴 것이 뭐 있겠나 싶은 이 선사시대의 부락에 망루가 설치된 것을 보고 그때나 저때나 전쟁의 위협이 상존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작 가보아야 할 곳은 고인돌이 모여 있는 다리 건너 산기슭인데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습니다. 먼발치의 다리 앞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고인돌 군을 사진만 찍고 버스에 올라 선운사로 향했습니다.

 

 

4)선운사

 

  고창의 선운사는 이번 탐방이 세 번째로 매우 낯익은 곳입니다. 1993년 모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할 때 혼자 와서 차분하게 둘러보았고, 2005년 봄에 산악회를 따라 선운산을 오를 때 이 절을 들르기도 했습니다. 또 이 절을 창건한 검단선사께서 여기 선암사와 제가 자주 올랐던 경기도 광주의 검단산을 왔다 갔다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친근감도 느껴졌습니다.

 

 

 

  선운사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선운산이 감싸주어서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산림청에서 이 산을 명산100산으로 지정한 것은 산 높이가 해발336m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경관이 뛰어나며 천연기념물인 제184호 동백나무 숲이 있는 등 생태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 산 입구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인 검단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전 내내 개였던 하늘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 것은 앞전 고인돌고원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을 때인데 이내 비가 그쳤고 선운사에 도착했을 때도 먹구름만 끼었지 비가 내리지 않아 온전하게 선운사를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은 후 천왕문을 지나 선운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석탄절을 맞으려 연등을 다느라 대웅보전 앞마당이 어수선했습니다. 본래 여기 대웅보전은 다섯 여래와 여섯 보살을 모셨다 하는데 정유재란 때 불타고 지금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양 옆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졌습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세워진 6층 석탑을 사진 찍은 후 일행에서 벗어나 대웅전 뒤의 동백 숲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선운사는 몇 번 와봤던 곳이라서 이번에는 특별히 동백 숲을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대원사에서 발간한 문고판 ‘선운사’에 “4월이면 동백꽃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이룬다”고 적혀있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수령이 5백년 가는 3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은 실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고 조림된 것이라 합니다. 조선조 때 살림이 궁핍해진 선운사는 동백기름을 짜 팔아서 살림에 보탤 목적으로 심은 것이 동백나무로 원래 목적은 상당히 달성한 것 같습니다. 동박새를 비롯한 많은 종의 새들이 보금자리를 튼 곳이 여기 동백 숲이어서 선운사는 생각지 않은 보시를 한 셈입니다. 지금은 이 절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아 기름을 짜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보시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4월은 끝나지 않았는데 동백꽃이 많이 떨어져 꽃 병풍을 볼 수 없었지만, 동박새가 재잘거리는 소리는 여전했습니다. 남아 있는 진홍색의 동백꽃을 보자 중학교 다닐 때 따라 불렀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생각났습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가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네”라고 읊조릴 만큼 순박한 처녀는 동백아가씨가 마지막인 듯싶습니다. 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중매결혼이 대세인 요즈음 동백아가씨는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 처녀로 치부될 뿐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제 가슴은 가끔 빨갛게 멍이 들곤 합니다. 십 수 년 전 먼저 간 집사람을 그리다 그리움이 지쳐 ‘동백아가씨’ 노래를 흥얼대곤 합니다. 두 아들을 키우며 23년을 같이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절을 다 돌아보고 버스에 오를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빗줄기가 금세 굵어진 것으로 보아 하늘이 오래 참은 것이 역력합니다. 버스가 선운사를 떠나자 뭔가 모르게 빼놓고 가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찜찜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미당 서정주 선생께 걸쭉한 막걸리 한 잔을 따라드려야 했는데 깜박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선생의 시 “禪雲寺 洞口”를 올려 매를 피하고자 합니다.

 

 

 

                                                            禪雲寺 洞口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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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비는 버스에서 다 피했고, 저녁 7시 넘어 안양에 안착했습니다. 안양문화원과 함께한 첫 나들이를 깔끔하게 마치고나자 다음 나들이가 기다려졌습니다. 안양문화원의 세심한 배려로 저렴한 가격에 볼 것을 다 보고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탐방사진>

 

 

 

1)고창읍성 

 

 

 

 

 

 

 

 

 

 

 

 

 

 

 

 

 

 

 

 

 

 

2)신재효고택

 

 

 

 

 

 

3)고창 판소리박물관  

 

 

 

 

 

 

 

 

 

 

 

 

 

4)고창 고인돌박물관 

 

 

 

 

 

 

 

 

 

 

 

5)선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