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명소탐방기1
*탐방일자:2014. 7. 31일/ 8. 8일
*탐방지 :경기도연평군 소재 경순왕릉 및 숭의전
-7월31일:경순왕릉/고랑포구
-8월 8일:숭의전
*동행 :큰아들 및 조카딸 가족
-7월31일:큰아들
-8월 8일:둘째 조카딸, 조카사위, 큰형수님
경순왕릉과 숭의전이 자리한 경기도의 연천 땅은 제 고향 파주와 붙어 있는 데다 집사람과 함께 명승지 몇 곳을 둘러본 적이 있어 그다지 낯 선 곳이 아닙니다. 십 수 년 전 과천 집을 출발해 파주와 연천을 거쳐 철원의 고석정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가평을 경유해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때 들른 곳이 제인폭포와 지금은 폐쇄된 한탄강변 국민관광단지입니다. 그때의 나들이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수 이북지역을 드라이브하는데 목적이 있었기에 연천의 명소들을 찬찬히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연천군은 군부대가 전체면적의 98%를 점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자치단체입니다. 꽤 오래 전 연천읍내에서 연대장의 부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연천이 제 고향 파주보다 군부대의 영향력이 훨씬 큰 전방지역이다 했는데 이번에도 최전방지역답게 여러 대의 탱크가 동원된 군사훈련을 목도했습니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연천 땅을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임진강 동편에 연천과 마전이 있고 북쪽에 삭녕이 있다. 한양에서 북쪽으로 100여리 되는 지점이며 물길로 두 서울과 통한다. 그러나 세 고을은 모두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만한 곳이 적다. 그 중에서 삭녕은 땅이 좋고 강을 임하여 아름다운 경치가 많다.”
연천군이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전곡리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그 이듬해 사적으로 지정되고 나서일 것입니다. 전곡리유적의 발견이 고고학사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때까지 통용된 구석기지도를 다시 그려야 해서였습니다. 주먹도끼라 불리는 석기의 유무가 구석기시대 문화권설정의 지표가 된다고 한 미국의 모비우스의 주장이 1944년 발표된 후 주먹도끼가 발견된 일이 없는 인도이동의 지역은 구석기시대 문화권에서 제외되었었는데 전곡리유적의 발견으로 구석기문화권이 새롭게 추가된 것입니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 경위도 상당히 극적이어서 흥미롭습니다. 전곡리 유적이 주한미군인 그렉보웬에 의해 발견된 것은 1978년1월20일입니다. 공군하사관인 그렉보웬이 인디애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었기에 그가 사귀던 한국여성과 함께 한탄강 유원지의 강변을 산책하다가 지면에 노출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를 보고 그 일대를 조사해 주먹도끼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먹도끼를 찾아낸 그렉보웬은 궁리 끝에 프랑스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교수에 편지를 보내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합니다. 그렉보웬은 서울대를 찾아가 고고학자 김원룡교수를 만나고 전곡리유적은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에 들어갑니다. 당시 김원룡교수를 도와 그렉보웬과 동행했던 이신복교수는 그의 저서 ‘고고학 이야기’에다 그 후 그렉보웬이 귀국하여 아리조나대학에서 고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잘 살고 있다고 그의 동향을 실었는데 그렉보웬은 그리 대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 연천 명소 두 곳을 두 번에 나누어 탐방했습니다. 한번은 큰아들 차로 경순왕릉을 찾아갔고, 다음번은 조카딸이 숭의전 가는 길을 안내했습니다.
1.경순왕릉(敬順王陵): 2014년7월31일(목)
경순왕 김부는 후백제의 습격을 받고 사망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927년에 제56대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임금입니다. 그 8년 후인 935년에 신하들과 마의태자로 더 알려진 장남 일(鎰)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라지만, 민심이 이미 신흥 고려로 기울어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난 김부는 고려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여생을 보내다가 978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은행에 다니는 큰아들이 얼마간 현업을 접고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덕분입니다. 마침 아들이 방학 중이어서 함께 연천명소 탐방 길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산본 집을 나와 도시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다 벽제에서 빠져나가 통일로를 따라가면서 봉일천과 문산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임진각을 얼마 앞두고 우회전해 임진강을 왼쪽으로 끼고 가는 37번 도로를 따라 끝가지 달려 연천과 파주를 경계 짓는 임진강의 장남교를 건넜습니다. 북쪽으로 조금 더 가다 고랑포 나루터 위 차도에서 오른 쪽 길로 접어들어 몇 백 미터 거리의 경순왕릉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신라의 여러 왕 가운데 유독 경순왕만 경주에서 벗어나 여기 왕릉에 묻힌 데는 그 나름 사연이 있습니다. 경순왕이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접한 신라의 유민들은 경주로 장례를 모시고자 장사진을 이뤘다 합니다. 이에 긴장한 고려조정은 ‘왕의 구(枸)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여기 장단부 고량포리 성거산에 모셨습니다. 경주로 시신이 운구되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덕분에 경순왕 김부는 왕위에서 물러났음에도 왕릉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경순왕릉으로 오르는 길은 그늘이 잘 지고 정비도 잘되어 짧은 오름 길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왕릉 입구에 이르자 먼저 온 몇 분들이 해설사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휴전선 남쪽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해 있는 나지막한 성거산의 정상부 쪽에 자리한 경순왕릉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 세워진 맞배지붕의 재실 건물, 학교운동장의 1/4가량 되는 공터, 바로 위 봉분이 들어선 능침공간과 그 아래 경순왕릉추정 신도비가 전부로, 이제껏 다녀온 조선왕릉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 보였습니다.
조선왕릉은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속(俗)의 세계인 진입공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제향공간과 정자각에서 봉분에 이르는 성(聖)의 세계인 능침공간으로 나뉩니다. 이번에 탐방한 경순왕릉은 규모와 격식면에서 조선왕릉보다 훨씬 단출해 오로지 능침공간만 보였습니다. 그 능침공간도 한 가운데 호석으로 받쳐주는 봉분과 봉분을 둘러싼 울타리 격의 곡장, 왕릉임을 알리는 능표, 그리고 곡장을 벗어나 능표 앞으로 장명등, 석양, 망주석만 있을 뿐, 봉분과 곡장사이에 자리해 봉분을 지키는 석호와 석양이 없고 장명등 앞의 문석인과 무석인도 보이지 않아 안내전단에 적혀 있듯이 왕릉의 문외한인 저도 조선후기 사대부묘소의 수준을 넘지 못함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경순왕릉은 조선 영조 23년인 1747년에 왕릉주변에서 경순왕의 묘지석이 발견되어 조선후기 양식으로 재정비된 것이라 합니다. 1748년 후손들이 발견한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는 1976년 고랑포초등학교로 갔다가 1986년에 비각을 세워 왕릉으로 옮겨놓은 것이고, 맞배지붕의 재실도 같은 해 세워졌습니다. 신도비에 새겨진 문자는 너무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지만, 경순왕 능표인 묘지석은 그 전면에 ‘新羅敬順王陵之陵’(신라경순왕릉지릉)이라는 7자가 적혀 있고 후면에 경순왕의 약력과 영조23년 정묘년(1747년)이 명기되어 여기 왕릉이 다름 아닌 경순왕릉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왕릉을 돌아본 후 바로 앞 고랑포구를 들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화신백화점이 들어섰다는 고랑포에서 당시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포구로 내려가는 길도 막혔고 포구 위 공터가 간이공원으로 조성되어 정자와 의자가 몇 개 보여, 고랑포가 이처럼 초라하기 이를데 없을 정도로 변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쇠락한 고랑포구를 보고나자 경순왕이 조선의 국왕들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대접받고 있다 했습니다. 경순왕에 대한 예우가 한반도에서 장장 992년을 이어간 세계 최장의 국가 신라에 대한 후손들의 의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경순왕릉이 조금 더 넓게 자리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숭의전(崇義殿):2014년8월8일(금)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그 전조(前朝)인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든 곳입니다.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전복시킨 이성계 일당이 조선을 세우고도 타도대상이었던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숭의전을 건립한 것은 승자의 아량이었겠지만 그 아량 덕분에 고려의 역사가 그래도 온전하게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숭의전의 존재는 작은누님 영결식에서 만난 조카딸이 말해주어 알았습니다.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신 작은누님의 장지가 임진강변인데, 거기서 숭의전이 멀지 않다 하여 짬을 내어 들렀습니다. 돌아가신 큰형님의 둘째 딸인 조카딸이 형수님을 모시고 있어 밖에서 점심을 사들였습니다. 귀가 길에 조카사위가 운전을 맡고 조카딸이 길안내를 맡아 넷이 함께 숭의전을 들렀습니다. 8살 위인 작은누님과 10살 위인 큰형수님은 저와 오랫동안 한 집에서 함께 살아 이런 저런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생인 저를 업어 기른 작은 누님은 먼 곳으로 떠나셨어도 제게 가르쳐준 “떠분 떠분 떠떠분도야”라는 노래는 죽을 때까지 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집온 지 몇 해 안되어 남편을 잃은 큰형수님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유학 간 저를 많이 응원해주셨습니다. 어린 제게 두 분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는데, 작은누님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고 나자 살아계신 형수님에 식사대접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점심 자리를 마련한 것이 숭의전탐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숭의전이 건립된 것은 조선개국 5년 후인 1397년의 일입니다. 새 나라를 세우느라 한창 바빴을 즈음에도 잊지 않고 전 왕조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자 숭의전을 세운 것은 조선의 개국세력들이 예(禮)를 숭상하는 유학자들이어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숭의전에 모셔진 왕들은 처음에는 고려태조를 비롯해 모두 여덟 분이었는데 세종 때에 반으로 줄어든 것은 조선의 종묘에 모셔진 다섯 왕보다 더 많을 수 없다 해서라합니다. 1451년 문종 임금에 이르러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고려의 네 임금과 충신 16분을 함께 배향토록 했습니다.
백학저수지를 지나 다다른 어수정(御水井)에서 숭의전으로 오르는 길은 넓었습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조금 오르자 임진강 왼쪽 산 중턱에 자리한 숭의전이 보였습니다. 숭의전(崇義殿)은 고려 임금 네 분의 위패를 모신 정전(正殿)입니다. 숭의전에 더하여 세워진 부속건물만도 5동이나 되는데 이중 중요한 곳은 고려 16공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입니다. 청소나 공사 시에 잠시 위패를 옮겨 놓는 이안청, 제수와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제례준비를 위해 제관들이 머무는 앙암제 등 5동의 건물 모두가 돌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앙암제와 전사청을 차례로 둘러본 후 중심건물인 숭의전을 찾았습니다. 마침 문이 열려 있어 안을 볼 수 있었는데 영정을 통해 본 고려태조의 모습이 매우 단아해 보였습니다. 이안청을 일별한 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배신청입니다. 이곳에는 고려 16공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영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려왕조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복지겸 등 개국공신들의 위패가 모셔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성계세력의 조선 건국을 저지하고자 끝까지 저항한 정몽주의 위패가 놓인 것은 조선의 개국공신들도 정몽주의 충(忠)을 높이 평가해서 일 것입니다.
숭의전 건물이 하나같이 아담하고 탄탄해 보인 것은 규모가 작은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심건물인 숭의전이 1899년 당시만 해도 18칸의 제법 큰 규모였는데 지금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으로 좁아 보였지만, 파란 잔디가 앞마당을 덮어 답답함만은 면한 듯했습니다. 오늘의 숭의전은 한국전쟁 때 전소한 것을 1971년에 재건 한 것이라 합니다. 1605년에 1차 개수된 숭의전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개수와 중수를 반복해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도 내부가 공사 중이어서 건물 안이 어수선했습니다.
천수문으로 빠져 나와 뒷산의 데크에 오르자 까까 비탈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동쪽 가까이의 함수점에서 한탄강의 물을 받아 수량을 늘린 임진강이 시계반대방향으로 급커브를 그리며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곡류의 정점이 숭의전 바로 아래여서 주변 풍광이 매우 빼어납니다. 정조 때 마전 군수였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뒷산의 잠두봉에 올라 숭의전을 내려다보면서 절벽에 7언 율시를 새겨 두었습니다. 조카는 일전에 그 한시를 분명 보았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 절벽을 찾지 못해 확인하지 못하고 하산했습니다. 어수정에서 물 한금을 떠 마신 후 귀가 길에 올랐습니다.
집에 돌아와 안내팜플렛에 실린 한문홍의 ‘중작숭의전’(重作崇義展)을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팜플렛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뜻풀이는 가능해 그대로 옮겨 실습니다.
麗組祠宮四百秋(여조사궁사백추) 숭의전을 지은 지가 4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수교목석경신수)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江山豈識興亡恨(강산기식흥망한)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依舊蠶頭出壁流(의구잠두출벽류)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위에 떠 있구나
往歲傷心滿月秋(왕세상심만월추) 지난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여금위군묘궁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聖調更乞麗牲石(성조경걸여생석)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留與澄波萬古流(유흥징파만고류)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징파강이 실어 나른 세월이 몇 겁은 될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해 임진강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몇 백 년의 세월을 망망대해로 실어 보냈습니다. 고려도 세월에 실려 망각의 바다로 사라졌고 여기에 숭의전을 지어 고려에 예를 다한 조선도 그 세월에 밀려 그 뒤를 이었습니다. 강물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소이연(所以然)입니다.
<탐방사진>
1.경순왕릉
2.고랑포 포구
3.숭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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