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67.부여명소 탐방기1(백제문화단지)

시인마뇽 2015. 8. 11. 23:02

                                                           부여명소 탐방기1(백제문화단지)

 

 

                                      *탐방일자:2015. 7. 28()

                                      *탐방지   :충남부여 소재 백제문화단지

                                      *동행      :1)연세대 조경철교수 인솔

                                                          2)군포중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프로그램 참여회원

 

 

 

 

     5년 전 고교동창들과 같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신라의 유적지 경주 양동을 둘러보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적지도 같이 등록되었으면 좋았을 걸 하며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600백년 가까이 한반도를 분점하며 서로 다른 문화를 꽃피운 이들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신라에 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달 초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이번에 등재된 곳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와 나성, 그리고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으로 이제 미등록상태로 남아 있는 백제의 도읍지는 서울의 위례성 한 곳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군포시의 중앙도서관에서 개설한 길 위의 인문학프로그램 덕분에 공주석장리의 구석기 유적지와 부여의 백제문화단지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백제문화단지는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아닙니다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조감할 수 있는 곳이어서 그 나름 의미 있는 탐방지라 하겠습니다.

 

   아침 9시경 군포중앙도서관 앞에서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를 가득 채운 참가자들 중 도움 말씀을 주실 연세대 조경철 교수님과 다른 세 분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여성분이어서 군포여성분들의 교육열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석장리의 구석기유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강 건너 공주시내 공산성 앞으로 옮겨 점심을 든 후 부여로 이동했습니다. 백제문화단지에 이르러서야 이 단지가 작년 겨울 우리 산 새로 보기라는 주제로 환경관련분야에서 일하시는 여러분을 모시고 강연을 한 롯데부여리조트 바로 앞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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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문화를 재현하고자 부소산 북쪽의 백마강 건너 규암면 일대에 조성한 꽤 넓은 단지로, 사비성,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롯데부여리조트를 아우릅니다. 이번에 탐방한 문화단지는 사비성과 백제역사문화관으로, 시간이 넉넉지 않아 사비성도 사비궁, 능사, 그리고 고분공원은 둘러보았고, 생활문화마을과 위례성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습니다.

 

   백제문화단지는 관광과 교육목적으로 백제유적지를 한 곳에 모아 재현해 놓은 것이어서 유적지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곳처럼 유적지를 재현해 놓은 곳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물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년 봄 중국의 시안을 방문해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거리를 지난 일이 있습니다. 시안의 어느 특정 거리를 당대의 역사거리로 조성한 것은 곡강그룹(谷江group)이라는 재벌회사인데 이 회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유적지도 복원하고 관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백제문화단지 탐방은 단지조성에 직접 참여했던 교수님의 사전 설명으로 시작됐습니다. 교수님께서 단지 정문인 정양문 앞과 능사 안 오층 목탑 앞에서 두 차례 설명을 해주어 이번 탐방을 더욱 알차게 해주셨습니다.

 

 

1.정양문(正陽門)

 

 

 

  사비성 안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이름은 정양문(正陽門)으로 교수님께서 손수 칠지도에 쓰여 있는 병오 정양(丙午 正陽) ”에서 따와 지은 것이라 합니다. 정양(正陽)이란 한 가운데 떠 있는 태양을 이르며, 황룡을 뜻하기도 합니다.

 

 

 

2.능사(陵寺)

 

 

   

 

  정양문으로 들어가 먼저 찾아간 곳은 사비궁 오른 쪽의 능사입니다. 능사란 백제왕들이 묻혀 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 옆에 자리한 사찰로 백제의 26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위덕왕이 세운 절입니다. 여기에 1:1 크기로 재현된 능사는 백제의 대표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어 중문--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사의 정문격인 중문의 이름은 대통문(大通門)으로, 그 이름은 성왕이 아들 창을 위해 공주에 세운 사찰 대통사((大通寺)에서 따왔다 합니다. 대통사는 대통을 연호로 쓴 중국 양무제를 위해 지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지만, 실은 장차 백제에 석가모니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통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는 것이 교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대통문 앞 넓은 마당에 조성된 연못을 덮은 화사한 연꽃들을 보고나자, 재현한 여기 능사도 스님은 안계시지만 절은 절이다 싶었습니다.

 

 

   대통문을 들어서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오층 목탑이 우람하게 버티고 서있어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국내 최초로 재현된 높이36m의 목탑은 성왕의 딸 형공주가 사리를 봉안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목탑이 같은 층의 석탑이나 전탑보다 이처럼 웅대한 것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황룡사의 9층목탑이 복원되면 어떤 모습일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오층 목탑 뒤편에 자리한 금당은 대웅전으로 법당 안에 석가모니와 그 옆에 양 보살을 모시고 있어 아미타불을 모시는 무량수전이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구별됩니다. 예불공간인 금당은 외부는 중층이고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맨 뒤편의 강당은 대중에게 불법을 설법하던 공간으로 자효당(慈孝堂)으로 불립니다. 자효당은 어버이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의 부자다궐 자효희성(父慈多闕 子孝希成)에 따온 것입니다.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는 아들 창을 만나러 갈 때 한 말로 아들에 대한 성왕의 애정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성왕은 아들을 격려하러 가다가 신라매복에 걸려 죽음을 당해  백제의 비운이 시작됩니다. 태자 창이 왕위에 오른 후 성왕의 죽음을 기리고자 지은 절이 바로 능사인데 이 임금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잃은 비운의 위덕왕입니다.

 

   이 절에서 금당대향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향로가 독특한 것은 용, 연꽃, 봉래산, 다섯 악사, 와 봉황이 새겨졌다는 것입니다. 이중 5악사는 중국향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교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3.고분공원(古墳公園)

 

 

  능사 뒤 산자락에 자리한 고분 공원은 사비시대의 대표적인 고분형태로 귀족층의 무덤으로 알려졌습니다. 백제시대의 묘제를 대표하는 여기 고분은 모두 7기로, 부여지역에서 출토된 고분을 이전 복원한 것입니다.

 

   횡구식 석곽분 1기를 가운데 놓고 위 아래로 횡혈식 석실분 6기가 자리한 고분공원은 왕릉이 아니어서인지 그리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분 안의 구조는 들어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백제문화단지의 홈페이지에 자세히 실려 있어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 놓습니다.

 

  횡구식 석곽분의 묘광형태는 말각방형으로 관을 둘러싸는 석곽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석곽내부는 육각형의 구조로 활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바닥은 잡석을 깔았다. 묘실의 규모는 길이240, 너비 96, 높이78이다. 백제문화단지내 화계조성부지에서 발굴되어 이전복원 하였다.”

 

   횡혈식 석실분-2석실의 구조가 완전한 형태로 묘광은 장방형 평면으로 연도부, 묘도,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다. 석실 내부는 육각형의 구조이며 천정 덮개석은 대형판석 3매를 사용하였다. 묘실은 화강석 판석을 사용하였으며 규모는 길이는 248, 너비는 82, 높이는 110이다. 백제문화단지내 화계조성부지에서 발굴되어 이전복원 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횡혈식 석실분-2만 봉분을 살펴보고 바짝 다가가 막힌 입구를 확인했을 뿐, 나머지 고분은 먼발치서 사진만 찍고 사비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4.사비궁(泗沘宮)

 

 

 

   정양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사비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백제의 왕궁이라 합니다. 서울의 경복궁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이만한 왕궁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 궁의 중문은 천정문(天政門)으로 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정전인 천정전(天政殿)이 보입니다.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해 결정했다는 천정대(天政臺)에서 따왔다는 천정전은 백제사비시대의 중궁을 재현해 놓은 중궁전으로 팔작지붕의 2층 전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왕의 즉위식 등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했고 집무는 동궁과 서궁에서 보았다 합니다. 전하는 말로는 재상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상자에 담아 천정대에 올려놓으면 저절로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다 하니 요즘의 떠들썩하기만 하고 실속 없는 청문회제도를 충분히 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정전을 중심으로 동서로 배치된 궁전은 동궁과 서궁으로 두 궁 모두 정전과 외전으로 나뉩니다. 동쪽의 동궁은 문()과 관련된 문사전이 정전이고 연영전이 외전입니다. 서쪽의 서궁은 무()와 관련된 무덕전이 정전이고 인덕전이 외전입니다.

 

 

 

   동궁의 문사전(文思殿)은 왕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정전이고, 연영전(延英殿)은 문신들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외전입니다. 서궁의 정전은 무덕전(武德殿)으로 이곳 역시 왕이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무관의 집무공간인 외전은 인덕전(麟德殿)으로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기린의 덕을 뜻한다 합니다. 4개의 궁전 모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궁전을 드나드는 출입문은 모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서궁 모두 궁전으로 출입하는 문과 후원으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어 사비궁의 출입문은 모두 5개소입니다.

 

 

 

   동서궁을 자 형태로 둘러싼 회랑이 독특해 보였습니다. 경주의 안압지와 임해전을 회랑으로 연결했다는 아래 글 경주명소탐방기2’를 썼으면서도 실물을 보지 못했는데 여기 사비궁의 회랑을 보자 임해전의 회랑이 어떠했는지 그 대강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전각임해전(臨海殿) 앞에 기러기와 오리처럼 사이좋게 지냄'을 뜻하는 안압지(雁鴨池)를 만든 것은 문무왕14년인 674년의 일입니다. 평지를 파서 물을 끌어대고 돌을 쌓아 세 개의 섬을 만들어 놓은 안압지는 인공연못으로 남쪽의 높은 언덕에서 물을 받았습니다. 굴곡진 연못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북쪽으로 빠져 나갔으며, 장마나 가뭄 때도 일정하게 수량이 유지됐다 합니다. 삼신산을 뜻하는 3개의 돌섬을 들어앉힌 안압지는 전체적으로 하늘과 거북을 본떠 만들었다 합니다. 서쪽을 중심으로 임해전 등 전각을 둘러 세우고 이들을 회랑으로 연결한 것은 황룡사의 회랑양식을 본 뜬 것입니다.

 

 

   사비궁을 둘러 보자 이제야 비로소 백제시대 왕궁의 배치가 잡혔습니다. 경복궁을 다시 찾아가 조선의 왕궁과 백제의 왕궁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사비궁 탐방을 마치고 버스를 타려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백제 역사문화관을 들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잠시여서 다음에 다시 들러 볼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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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 내내 긴장도가 떨어진 것은 실제 유적지가 아니고 재현해 놓은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탐방으로 새삼 그 가치를 확인한 것은 교수님이 열심히 설명해준 칠지도(七枝刀)입니다.

 

 

  칠지도란 백제 왕세자가 제후인 왜왕에게 건네준 칼을 이르는 것입니다. 실제 칠지도는 그 모양이 1개의 나무줄기와 6개의 나뭇가지로 되어 있는데 육지도에서 칠지도로 이름이 바뀐 것은 나중에 그 칼 표면에 칠지도라는 글자가 새겨 있어서라고 합니다. 칠지도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중국의 풀인 명협(蓂莢)과 기와 풍()이 있음을 학위논문에서 밝혔다는 교수께서 알려준 놀라운 내용은 선세이래미유차도(先世以來未有此刀)라는 글귀가 이 칼 후면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만한 칼은 없었다는 뜻으로 이 칼을 만든 백제인이 세계 제1의 칼을 만들었다는 자긍심을 표현한 것이어서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이 칼을 만든 날자로 이 칼 앞면에 새겨진 태화사년오월십육일 병오정양(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에서 정양(正陽) 두 글자를 따서 백제문화단지 정문의 이름으로 정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물론 일본은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합니다. 이와 관련해 이이화님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3세기 중엽 왜왕이 탐라국으로 보이는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초고왕에 주고, 백제에서는 이에 보답하고자 칠지도를 왜왕에 보냈다고 한국사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텐데 외눈박이 역사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주변국과 갈등을 빚고 있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경제대국에 걸 맞는 대접을 못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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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안의 긴 시간이 무료하지 않았던 것은 옆자리의 한 분 덕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간 침묵을 지켰으나 계속 그러기에는 너무 서먹서먹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 역시 별반 숫기가 없는 편이어서 생판 모르는 분과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데 이번에 달랐던 것은 모두가 과거와의 대화를 위해 같이 역사탐방에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판 일도 같이 하신다는 이분께서 음식에 관한 책을 직접 집필해 내놓고 관내 도서관에서 독서지도를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분의 독서량이 보통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만 하다 했습니다. 이야기 끝에 제 대학동기와 한 제약회사에서 근무했음을 듣고 세상 참으로 좁다했습니다.

 

   제가 이분에 놀란 것은 탄탄한 내용의 탐방기를 단 하루 만에 작성해 그 이튿날 제게 보내온 것입니다. 어디를 다녀와서 글을 남기는 것은 생각보다 수고로운 일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글을 완성하려면 사전에 기록이 탄탄하고, 글 솜씨도 받쳐주어야 합니다. 제 경우 끙끙대며 두 주를 보내고 나서야 탐방기를 끝내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신통치 못 해서로 제가 앞으로 배워나가야 할 대목입니다.

 

   오랜만의 나들이를 이런 분과 함께해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