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명소탐방기 2(이효석 문학유적지)
*탐방일자:2013. 8. 7일(수)/2015. 9. 8일(화)
*탐방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일대
-2013. 8. 7일:이효석문학관
-2015. 9. 8일:이효석문화제 현장
*동행 :서울사대 동문
-2013. 8. 7일:원영환, 이상훈 동문
-2015. 9. 7일:고동준, 김종화, 이상훈, 최돈형 동문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35년이란 세월은 우리 문학사에서 몽땅 들어내도 될 만큼 짧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많은 작가들이 변절해 친일적인 작품들을 썼습니다. 그런 중에도 일제의 강점에 맞서 투혼을 불사른 작가들이 있고, 당대의 핍박한 현실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한 작가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문학사가 마냥 부끄러운 것만도 아닌 것은 이런 작가들 덕분입니다.
애석하게도 광복의 빛을 보지 못하고 해방 몇 해 전에 숨을 거둔 작가들이 있습니다. 해방을 얼마 앞두고 1940년대 전반기에 유명을 달리한 윤동주, 이육사, 이 상과 이효석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암흑기에 작품 활동을 하다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만나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대학 동창 몇이서 이효석의 고향 봉평을 찾아갔습니다.
이효석(李孝石)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 안타까움을 남긴 역량 있는 문인입니다. 1907년 강원도 봉평에서 태어나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한 이효석은 재학 중에 ‘도시와 유령’등 문제작을 내놓았습니다. 이효석은 초기에 연작 소설 ‘노령근해’등을 발표해 카프문학에 관심을 표했으나 일제의 카프문인 1차 검거 후 순수문학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933년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등과 9인회를 결성하고, 1936년 대표작 ‘모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습니다. 두 해 전 부인과 사별한 이효석은 지병인 결핵성뇌막염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 많은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그의 저서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이효석이 9인회를 결성한 후 내놓은 “돈(豚)”, “성화(聖畵)”, “들”, “모밀꽃 필 무렵”, “분녀(粉女)”, “개살구”, “장미(薔薇) 병들다”와 “해바라기” 등의 작품들에 대해 “이러한 작품들은 산문문학 양식인 소설을 통해 서정적인 감각을 섬세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문학의 규범"처럼 평가되고 있다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죽음을 맞은 이육사나 윤동주에 비할 수는 없으나 가산 이효석이 이광수나 서정주처럼 친일작가로 분류되지 않는 것은 일찍이 카프문학과 결별하고 순수문학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이효석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입니다. 수필 ‘낙엽(落葉)을 태우면서’를 읽고 나서 가슴 한 구석에 쓸쓸함이 스며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기억이 잘못되었다며 생각을 바꾼 것은 얼마 전 “낙엽(落葉)을 태우면서”를 다시 읽고서입니다.
“벗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落葉의 산데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에것부터 푸슥푸슥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감정의 동요 없이 사실적으로만 묘사한 위 글만으로는 이효석의 속내를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아 이어지는 글을 조금 더 읽었습니다.
“落葉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가.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금의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흩어지는 落葉의 산데미를 바라보며 香氣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猛烈(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이효석이 낙엽을 태운 것은 가을의 쓸쓸함을 고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다한 낙엽을 태우면서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꼈습니다. 낙엽 태우기는 여름 한 철 푸르렀던 나뭇잎의 마지막 제전인데, 낙엽 타는 냄새에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도시의 커피와 벽촌의 개금(개암) 냄새를 끌어내 낙엽을 태우는 마지막 제전을 맹렬한 생활에로 귀의시키는 반전을 읽으면서 저 또한 가슴 뜀을 느꼈습니다. 이 글이 발표된 것이 일본제국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8년으로 조선에의 탄압이 본격화되던 때임을 감안한다면 낙엽을 태우는 마지막 제전을 치러내야 하는 암흑 속에서도 맹렬한 생활이라는 한줄기 빛을 찾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 평창의 봉평을 찾은 것은 이 고장이 이효석의 출생지이고 그의 대표작인 “ 모필꽃 필 무렵”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8월에는 이효석문학관을 둘러보았고 올 9월에는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봉평 시내와 그 인근을 둘러보았습니다.
1.이효석 문학관 탐방 : 2013. 8. 7일(수)
어느 작가든 문학관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작가가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작품을 남겼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문학상 한 두 개를 수상한 정도로는 문학관 건립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설령 어렵게 세운다 하더라도 찾는 손님들이 별로 없어 운영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 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이효석문학관이 사후 60년이 지나 2002년에 세워진 것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잘은 몰라도 평창군에서 이효석 문학을 잘 활용하면 충분히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해 과감히 투자를 한 덕분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근 용평레조트 위 발왕산 등산을 마치고 문학관을 들르느라 입장허용시간인 저녁 5시 직전에 도착해 조금만 늦었어도 입장하지 못할 뻔 했습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이효석문학관은 대도시박물관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푸른 잔디밭의 꽤 넓은 공터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올법한 빨간 벽돌집이 지어져 조금은 환상적이고 여유롭게 보였습니다.
이효석 문학관은 크게 보아 문학전시실, 문학교실, 학예연구실로 이루어졌는데 그 핵은 문학전시실이라 하겠습니다. 전시실의 전시물이 다양하고 풍성하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작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또 이효석문학관 안내 팜플렛에 실린 두 쪽 자리 이효석연보도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작가의 문학과 생애가 손에 잡히는 듯 했습니다.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효석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 전신 경성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들어간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이효석은 천재라는 칭송을 받을 만 했습니다. 이런 천재성이 문학적 능력과 결합해 “모밀꽃 필 무렵” 같은 걸작을 낳은 것입니다. 전시실을 돌아보며 이효석의 문학작품들이 어떻게 변모해왔는가를 일별한 것도 이효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효석이 카프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노령근해”같은 작품만 계속 써왔다면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모밀꽃 필 무렵”같은 걸작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아담한 문학관이 과연 세워졌겠나 싶어 이효석의 문학적변신이 고마웠습니다.
전시물 중에서 제 눈을 끈 것은 피아노였습니다. 대표작인 “모밀꽃 필 무렵”은 메밀꽃과 달밤의 산길, 물레방아 등 옛 농촌의 풍경이 잘 묘사된 서정적인 소설입니다. 이런 글을 쓴 작가에게서 피아노를 치는 도시풍의 이미지를 연상해내기가 쉽지 않아 피아노와 크리스마 트리 등이 참으로 의외이다 싶었습니다.
전시실을 빠져나와 공터 잔디밭 길을 걸었습니다. 이효석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을 보고 이 척박한 땅에서 문학이 죽지 않고 뿌리내릴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본 것 같아 가슴 뿌듯했습니다.
2.이효석문화제 현장탐방 : 2015. 9. 7일(화)
“2015 평창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평창을 찾아간 것은 최돈형 동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훈 동문이 평창의 소사에 있는 집으로 초대해주어 가능했습니다. 소사에 집을 짓고 올 여름에 이사한 이상훈 내외가 손수 저녁상을 차려 내와 맛있게 들은 후 고동준 동문의 차로 이효석문화제가 열리는 봉평시내로 이동했습니다.
1)천변 메밀밭
(위 사진은 고동준 동문이 찍은 사진입니다)
봉평 시내 천변에 차를 세워둔 후 돌다리를 조심해 내딛어 개천을 건넜습니다. 곳곳에 봉축 등이 설치된 환상적인 분위기의 개천을 건너면서 축제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가설된 것이라 해도 으스스한 시골 밤길의 “메밀꽃 필 무렵”과 조금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천 건너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을 거닐었습니다. 꽤 넓은 메밀 밭 상공에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해 설치한 둥근 달이 휘영청 길을 밝혀 밭 사이로 나있는 길을 걷는 동안 제가 마치 소설속의 주인공인 허생원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효석을 불멸의 작가 대열로 끌어올린 작품은 1936년 잡지 <조광>에 발표된 “모밀 꽃 필 무렵”일 것입니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밤길고개를 넘어 대화장으로 가는 길에 지나는 산허리는 “왼통 모밀밭이여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곰을 뿌린 듯이 흠읏한 달빛에 숨이 막켜하얗었다”고 묘사되었습니다. 이번에 거닌 메밀밭은 천변의 평지인데다 인공적으로 띄운 달이 자연의 보름달처럼 밝지를 못해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모밀꽃 필 무렵”을 이효석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는 이 소설이 단순히 순수문학의 규범으로 평가되어서만은 아닙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의 지적처럼 소설 “모밀꽃 필 무렵”은 성의 문제를 근간으로 인간의 본능과 원시적 자연을 조화롭게 형상화해낸 작품이어서 많은 독자들에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메빌밭을 배경으로 동행한 친구들과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효석문화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어서 효석문화마을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채 다리 건너 물레방앗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물레방앗간
(위 사진은 2013년 8월7일 저녁시간에 찍은 것입니다)
평창군이 조성해놓은 물레방앗간은 재작년 여름 이효석문학관을 둘러보고 잠시 짬을 내어 들른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때는 이번처럼 밤이 아니고 해지기 직전이어서 소설속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허생원의 물레방앗간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가슴을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로 시작한 허생원의 회고담이 시작됐습니다. 무더위로 잠 못 이루다 밤중에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간 허생원은 달빛이 너무 밝아 밖에서 옷을 벗지 못하고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 물레방앗간에서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친 허생원은 동료 조선달에 평생 잊지 못하는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나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눅으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였어” 하면서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것은 그 다음 날이였나”하고 회상하는 허생원은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였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로 말을 맺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 허생원의 하룻밤을 그려보는 것으로 물레방앗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3)소설 “메밀꽃 필 무렵” 마당극
(위 사진은 고동준동문이 찍은 사진입니다)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9월4일 - 13일의 축제기간 중에 오기를 잘했다 싶은 것은 밤을 도와 공연되는 마당극을 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마당극이 극장에서 공연되는 일반 연극과 다른 점은 연극이 관객과 분리된 무대라는 공간이 아닌 같은 평면인 마당에서 공연이 이루어져 필요하면 언제든지 관객들과 한바탕 같이 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심각한 내용의 비극을 공연하더라도 얼마간은 해학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다르다면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배우들의 열연에 같이 웃고 박수도 쳤지만 상당부분 소극(笑劇)으로 꾸며져 작가의 창작의도를 살리는 데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 제 평가입니다.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은 소극(笑劇)으로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내용의 소설이 아닙니다.
“이즈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히 흘니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길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니며 콩 포기와 옥수수 닢새가 한창 달에 푸르게 젖었다. ”
위 글은 주인공 허생원이 조선달 및 동이와 더불어 밤을 뚫고 대화 장터로 향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 글의 백미는 ”즘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이제껏 숱하게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지만 달을 연인으로 의인화한 글은 많으나 짐승에 비유한 글을 본 것은 이 소설이 유일합니다. 허생원이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를 들으며 끌어낸 추억은 오래 전 밝은 달밤에 허생원이 물레방에서 성서방네 처녀를 만나 정사를 나눈 것이었습니다. 개천을 건너다 물에 빠진 허생원을 등에 업고 건넌 동이가 왼손에 채쭉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성서방네 처녀와 자고 낳은 자기 아들임을 직감했을 때는 짐승같은 “달이 어지간히 기우러진” 후였습니다. 저만의 엉뚱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정을 나눈 밤의 달이 마냥 밝았다면 그 후 핍박한 삶을 살아가며 맞는 달은 아마도 짐승같이 무섭게 느껴져 그리 묘사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이 한국현대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것은 허생원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만남과 이별의 애잔함, 장돌뱅이들의 애수어린 생활 등이 메밀밭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잘 어우러져 빚어내는 최고의 서정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의 소설을 마당극으로 소화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차라리 허생원이라는 인물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 연극으로 공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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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스땅달은 소설은 거리의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주의 문학입니다. 그러나 범위를 한껏 넓힌다면 거리를 삶의 공간을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효석의 거울에 비춰지는 거리는 도시의 거리가 아니고 장돌뱅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장이 서는 장터만이 아니고 장터를 찾아 이동하는 길과 길에 땅을 양보한 자연을 포함합니다. 이것만으로 부족해 이효석은 그 거울로 우리네 속마음을 비춰봅니다.
애절하도록 아름다운 허생원의 속내를 알아챈 것만으로도 두 번에 걸친 이효석문학 유적지 탐방은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탐방사진>
1)이효석문학관
2)물레방앗간
(위 사진은 고동준 동문이 찍은 사진입니다.)
3)등축제 현장:아래 사진은 고동준 동문이 찍었습니다.
4)천변사진:아래 사진은 고동준 동문이 찍었습니다.
5)마당극 현장:아래 사진은 고동준 동문이 찍었습니다.
6)봉평야간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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