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實學)명소 탐방기1(성호이익 유적지)
*탐방일자:2015. 11. 24일(화)
*탐방지 :경기안산 소재 성호이익선생 묘지 및 성호기념관
*동행 :나홀로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을 펴 고려를 지탱해온 불교(佛敎)를 배척하고 유학(儒學)을 숭상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퇴계 이황(李滉)에 의해 꽃을 피운 유학이 실학(實學)의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임진ㆍ병자 양란을 겪고 나서입니다. 이는 조선의 유학이 진리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 다른 사상을 배척한 나머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실학(實學)이란 조선 후기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해 발흥한 새로운 학풍을 이릅니다. 본래 실학이란 유학(儒學)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교나 불교를 가족 및 국가윤리를 무시하는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하고자 끌어들인 용어라고 합니다. 이런 유학에 대립각을 세우고 도전한 새로운 학풍이 다름 아닌 실학(實學)입니다. 지봉 이수광에 의해 발아되고 반계 유형원에 의해 가꿔진 실학(實學)은 성호 이익에 이르러 그 뿌리가 튼튼해졌다는 생각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천관우는 조선 후기 실학의 발생과정을 서술하면서, “유형원이 한 번 나옴으로써 실학은 학문으로서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익이 나옴으로써 실학은 학파로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면서 18세기 초반과 중반에 활동하던 성호 이익이 비로소 실학의 학풍을 학파로써 발전시켰던 인물로 주목했습니다.
어제 오후 짬을 내어 작년 여름에 다녀온 성호기념관을 다시 찾아간 것은 며칠 전 사당역의 한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마침 눈에 띈 “성호사설”을 사갖고 온 때문입니다.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은데, 그러려면 선생의 기념관을 찾아가 유물을 살펴보고 전문가의 해설을 청해 듣는 것이 좋겠다 싶어 산본 집에서 멀지 않은 안산의 성호기념관을 찾아갔습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은 동인 퇴계 이황을 잇는 남인계열의 학자이면서도 서인 율곡 이이의 경세학문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아 역사, 문학, 천문, 지리, 국방, 율산 및 의학 등 모든 분야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통해 얻은 서양문물도 적극 수용했습니다. 첨성리(瞻星里)에 세거하면서 백성들의 고난을 몸소 체험한 선생은 평생을 애민정신으로 실학연구에 몰두해 <성호사설> 및 <곽우록> 등 100여권의 저서를 남겼고, 이런 저서들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실증적으로 분석ㆍ비판하고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제자 안정복 등에 의해 계승되어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기에 선생께서 실학의 대종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선생은 숙종7년인 1681년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이듬 해 이곳 안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조39년인 1763년 83세의고령으로 이 세상을 뜨기까지 안산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권씨 부인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성장한 선생은 둘째 형인 섬계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1705년 형 이잠이 역적으로 몰려 형신 끝에 장살당하는 것을 지켜본 선생은 과거를 포기하고 지금의 안산시 일동인 첨성리(瞻星里)에서 은거했습니다.
성호선생은 선대에서 내려준 농장을 직접 일구어 수확한 것으로 자급자족을 했고 가문의 경제를 책임질 수 있었으며, 부친이 물려준 수천 권의 서적이 있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전원생활 속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동안 틈틈이 여행을 다니면서 견식과 정취를 넓힌 선생의 학덕을 숭모하여 제자가 된 분들이 있었으니, 순암 안정복, 하빈 신후담, 소남 윤동규 등이 그들입니다.
33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맹휴가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는 기쁨이 있었으나 그 아들이 9년 후인 3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이미 여러 질병에 시달려온 71세의 선생께서 참척의 아픔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말년에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이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린 선생은 노인을 예우하는 예에 따라 국가에서 내리는 첨중추부사의 은전을 받은 1763년 그 해가 저물기 얼마 전인 12월17일 83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작년 방문 때 받아온 책자 <星湖 紀念館>을 꺼내 성호 선생의 생애를 일독한 후 집을 나선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선현들의 말씀이 참이라고 믿어서였습니다. 산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안산 쪽으로 4정거장을 가서 다다른 상록수역에서 하차했습니다. 상록수역에서 성호기념관까지는 겨울비를 가리려 우산을 쓰고 걸어가기에 좀 먼 거리여서 택시로 이동해 기념관 건너편에 자리한 이익선생(李瀷先生) 묘(墓)를 참배한 후 지근거리의 성호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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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익선생(李瀷先生) 묘(墓)
성호기념관 길 건너편에 위치한 이익선생 묘는 40-50m높이의 구릉에 자리했습니다. 대로변에 나 있는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자마자 안내판 앞으로 다가가 안내문을 먼저 읽었습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된 이익선생 묘역에는 원래 5기의 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께 글을 가르쳐준 형님 이잠, 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 숙부 이구진의 유해가 함께 이 곳에 묻혔었습니다. 1977년 이 지역에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정부로부터 이장명령을 받고서 네 분들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 지금은 선생의 묘만 남아 있습니다.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온 이 지역 유지들과 후손들의 청원으로 이장의 수난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안내판에서 몇 걸음 옮겨 선생의 묘지를 사진 찍은 후 목례를 올렸습니다. 평생을 야인으로 살아서인지 봉분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묘역이 깔끔히 보존되어 선생께 죄송한 마음을 덜 수 있었는데, 이는 1985년 선생께서 민족문화를 빛낸 선현으로 선정되어 묘역의 정지작업이 이루어졌고 1988년 사당 첨성사와 재실 경호재가 지어져 관리되어온 덕분입니다.
묘역 오른 쪽의 사당과 재실은 문이 닫혀 들어 가보지 못하고 담장 안의 건물만 사진만 찍은 후 묘지 뒤 소나무 숲을 거닐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묘역을 반쯤 둘러싼 소나무 숲에서 이런 저런 새들이 불청객을 괘념치 않고 총총걸음으로 숲속을 거닐며 재잘거렸습니다. 손수 농사를 지으며 민초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선생께서 비록 죽어 두 눈을 감았어도 두 귀는 열어놓아 두 반세기가 지나도록 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2.성호기념관
성호기념관은 안산시에서 성호 이익선생의 생애를 기리고 학문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2002년에 건립한 기념관입니다. 지상2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아담한 규모의 성호기념관에는 실학관련 유물이 100여점 전시된 2층의 상설전시장과 체험 전시실, 영상관, 실학정보실, 성호학당 및 총1,500여점의 유물이 보관된 지하의 유물수장고가 있습니다.
묘지참배를 마치고 길 건너 성호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 건물 2층에 자리한 상설전시실에 발을 들였습니다. 작년 여름 방문 때 사진 찍은 ‘성호학파’와 ‘성호학의 연원’ 등의 전시물이 보이지 않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곤여만국지도', 그리고 표암 강세황이 선생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산서원도 등이 새롭게(?) 선보인 것으로 보아 그동안 전시됐던 유물들을 지하수장고의 유물로 바꿔 전시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넉넉해 혼자서 천천히 한 바퀴 빙 둘러보았습니다. 전시실 입구에 초서체(?)로 쓴 선생의 수결 “翼”이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한 것처럼 매우 힘차 보였습니다. 이번 방문으로 새삼 배운 것은 “疾書”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질서(疾書)는 선생께서 항상 실천하신 것으로 맹자를 공부하면서 항상 붓과 종이를 가지고 다녔다 합니다.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지도’가 제 눈을 끈 것은 거대한 산맥이 그려져 있어서였습니다. 또 하나 진귀하다 싶었던 것은 잘은 몰라도 가사와 악보를 적어 넣은 듯한 ‘羽調初數大葉’입니다. 성호학파를 포함한 선생의 가계도가 새로 걸려 있었지만 전에 걸린 ‘성호일가’나 ‘성호학파’만큼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 둘러보기를 마친 후 실학정보실에서 대기 중인 한 분에 해설을 요청했습니다. 방문객이 저 혼자인데도 주부 해설사분이 귀찮은 기색 없이 열심히 설명해주어 고마웠습니다. 해설요청을 잘 했다 싶었던 것은 혼자 둘러볼 때 미처 몰랐던 것을 해설을 들으면서 알게 되어서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태종 때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서 왜 남북 아메리카 대륙이 안 보이나 궁금했었는데 그 의문이 비로소 풀렸으니,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전에 이 지도가 만들어진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을 해설을 듣고 알았습니다.
성호학파의 인물들을 어떻게 분류하느냐는 간단치 않은가 봅니다. 작년에 걸렸던 전시물 ‘성호학파’에서는 선생의 제자들을 권철신, 이가환, 정약전, 정약용 등의 진보적인 성호좌파와 윤동규, 안정복, 황덕길, 허전 등의 보수적인 성호우파로 나누었는데, 이번 전시물에는 성호우파를 다시 성리학의 세계관만을 수용한 윤동규, 신후담과 성리학적 입장이나 주체적인 역사인식을 계승한 안정복, 황덕길, 허전으로 나누었습니다. 전시물 ‘성호학파의 독립운동’에 등재된 여러분들 중에는 신채호나 허훈 같은 제가 아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성호학파의 어떤 계파를 이어온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전시실을 돌아보며 하나 아쉽게 느낀 것은 전시물 중에 원본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표암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와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東史綱木)> 모두가 진본이 아니고 복사본이 전시되었는데 지방의 기념관으로는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안산시에서 이만한 기념관을 꾸려가는 데도 선생의 9세손인 이돈형님의 공이 컸습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이효성과 함께 소중히 간직해온 유물들을 이 기념관에 기증해 전시가 가능토록 했으니 말입니다.
해설사분의 상세하고도 친절한 도움 말씀에 감사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기념관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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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古典學者) 이우성은 조선 후기 실학의 학풍을 다음 3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성호 이익을 대종으로 하는 경세치용학파,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학파, 그리고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룩하게 된 실사구시학파가 그것들입니다. 경세치용학파는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했고,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삼았습니다. 경서 및 금석, 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유파는 실사구시학파였습니다. 이중 ‘실사구시학파’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고증학의 학풍은 이용후생학파인 북학파 학맥에 연결되는 김정희 뿐만 아니라 경세치용학파인 성호학파의 정약용, 강화학풍의 신작 등 다양한 학맥에서 논의된 학문적 방법으로 학파로서 독자적 성격이 매우 약하다고 서울대 교수인 금장태는그의 저서 “성호와 성호학파”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금장태는 성호학파의 분화양상을 성호선생에 의해 소개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서양과학기술과 천주교교리를 포함하는 ‘서학’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었습니다. 그 인물들은 기념관의 전시됐었던 성호학파의 좌파를 신서파로, 우파를 공서파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렇듯 성호선생의 제자들이 좌파와 우파, 또는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뉘는 것은 선생의 학문세계가 성리학의 계승과 실학의 계발 양 측면을 모두 아우른 때문입니다.
기념관 방문으로 성호이익선생이 실학의 대종으로 불리는 것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탐방사진>
1)이익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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