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71.실학(實學)명소탐방기 2(추사박물관)

시인마뇽 2016. 2. 6. 13:20

                                               실학명소탐방기 2(추사박물관)



                                         *탐방일자:2016. 1. 14일(목)
                                         *탐방지   : 경기과천 소재 추사박물관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 동문





   실학(實學)이란 17세기에 이르러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해 발흥한 조선의 새로운 학풍을 일컫습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건국이념으로 받들어온 성리학이 이기론(理氣論) 등 거대담론에 빠져 백성들의 국리민복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반성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성리학은 그러한 변화를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뿐만 아니라 집권세력의 일원이었던 북학파들이 제각기 실학을 발전시킨 것은 그 길만이 양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선이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봉 이수광에 의해 발아되고 반계 유형원에 의해 가꾸어진 실학(實學)이 이 땅에 뿌리를 튼튼히 내린 것은 성호 이익에 힘입어서입니다. 실학이 마침내 하나의 학풍을 이룬 것도 성호 이익에 이르러서입니다. 한문학자 이우성은 실학의 학풍을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와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로 나누었습니다. 경세치용(經世致用)이란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성호 이익이 이 학풍을 대표합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국민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열하일기>>로 필명을 날린 연암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북학파들이 이끌었던 새 학파가 바로 이용후생파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 에 의해 결실된 실사구시파는 공리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ㆍ객관적 학문태도를 중시했습니다.




  서예를 감상할 만한 예술적인 감식안을 갖지 못한 제가 경기도 과천시에 소재한 추사 박물관을 찾아간 것은 김정희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알려진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이용후생(利用厚生)”이나 “경세치용(經世致用)”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실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나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어보면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이 국가개혁 및 국리민복과 연결되는 개념임을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실사구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실학파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실사구시라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딱 부러지게 그 의미가 잡히지 않아 추사박물관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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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지초당(瓜地草堂)


  
 

  산본 집에서 멀지 않은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3년 전인 2013년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탐방을 별러온 추사박물관을 이번에 찾아간 것은 동행한 이상훈교수가 차를 태워준 덕분입니다. 박물관에 도착해 먼저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들렀습니다.




  과지초당은 1824년 생부 김노경이 지은 별장으로 한옥 두 채가 넓지 않은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습니다. 선친이 별세하자 이곳에서 가까운 청계산 옥녀봉에 모시고 3년 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뜨기까지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바로 여기 과지초당으로 초당 안뜰에 추사 김정희가 직접 물을 길어 마신 독우물(甕井)이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아담한 한옥의 과지초당을 돌아본 후 바로 옆에 자리한 추사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2.추사박물관(秋史博物館)





  추사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2층 전시실로 추사 김정희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수학, 연행을 통한 새로운 문물체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확정 등의 금석연구, 한양에서의 관직생활, 제주와 함경도북청의 유배생활, 말년 4 년간의 과천생활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정리한 추사 김정희의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정조10년인 1786년 충남 예산에서 김노경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추사(秋史)와 완당(玩堂)등 100여개가 쓰였습니다. 조선의 영조임금이 애지중지했던 화순옹주와 경주김씨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8세에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에게 배우면서 북학에 눈을 뜬 김정희는 24세 때(순조9년, 1809)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생부 김노경을 따라 북경으로 떠납니다. 청나라의 대학자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청나라 고증학의 진수를 터득하고 특히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으로 자신의 학문체계를 세워 그 이듬해 돌아옵니다. 북한산의 비봉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힌 것은 31세(순조16, 1816) 때입니다. 그 후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라는 탁월한 저서를 남기어 실사구시학파의 종장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41세 때인 1826년(순조26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추사 김정희는 그 직위가 예조참의와 성균관 대사성에 그쳤으나 중앙 정계에서의 비중이 막강해 정치권에서는 태풍의 눈으로 부상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55세에 안동김씨의 모함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됩니다. 64세(헌종15년, 1849)에 제주유배가 풀려나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9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아 이 기간 중에 <세한도>라는 걸작을 내놓고 추사체라는 불세출의 글씨체를 창출합니다.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떠난 두 번째 유배는 그 기간이 1년으로 짧아 67세(철종3년, 1852)에 풀려납니다. 과천의 과지초당으로 돌아와 머무르다 철종7년인 1856년에 71세를 맞아 영면하는 것으로 추사 김정희의 일생이 끝납니다. 실사구시학파의 주요인물로 친구인 조인영, 권돈인을 비롯하여 신위, 신관호, 조면호 등이 있고 예술의 후계자로는 허유, 이하응, 조희룡과 전기등이 있습니다. 




  2층 전시실에서 제 눈을 끈 전시물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시절인 1844년(헌종10년)에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고자 그려준 그림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이 그림은 논어에 나오는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라는 공자의 말씀을 주제로 삼아 겨울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 낸 명화입니다. 역사학자 정옥자는 “황한(荒寒)과 적막(寂寞) 속에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 있고, 그 사이로 초옥 한 채가 인적 없이 들어앉아있다. 그 이외에는 텅빈 공간이다. 거기에는 쓸쓸함과 비움의 미학이 있고 추사의 심정이 살아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제주추사관 명예관장이기도 한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그의 저서 <<김정희>>에서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실경산수화로는 0점짜리인 이 그림이 명성을 얻은 것은 추사의 마음 속 이미지를 그렸기 때문이라며 이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라 했습니다. 또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력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으로 보아야 제 맛과 제 멋과 제 가치를 맛볼 수 있다 했습니다. 실경산수화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제 눈으로는 비록 복제품이기는 해도 화폭이 23.3 X 108.3cm로 원본 크기인 그림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유홍준은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을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적은 그해 10월 <세한도>를 가지고 동지사 이정응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습니다. 그 이듬해 정월 청나라 벗인 오찬(吳贊)의 초대를 받은 연회에서 <세한도>를 펴 보이고 이에 감탄한 좌객들로부터 <靑儒十六家>로 불리는 제와 찬을 시와 문으로 받아 붙여왔는데 전시된 그림에도 <靑儒十六家>가 붙어 있었습니다.




  2층 전시실에 전시된 또 하나의 명화는 추사 김정희의 <不二禪蘭>입니다. 화폭이 55.0 X 31.1cm크기의 이 그림은 추사가 그린 난초 그림으로 파격을 넘어 불이선의 경지에 다다른 불계공졸(不計工拙)의 명화라고 말했습니다. 불이선이란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에 나오는 내용으로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저마다 설명하는데 마지막의 유마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며 감탄했다는 내용“을 뜻한다 합니다. 다시 말해 <不二禪蘭>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며 감탄했다는데 저는 그저 난초를 힘차고 절도 있게 쳤구나 하는 정도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절필은 봉은사의 판전(板殿)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희는 생의 마지막 기력을 다해  두 글자 “殿板”을 쓰고 사흘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흥준은 이 글씨를 보고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으며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도 뛰어넘어 감히 비평을 할 수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주제별로 살펴본 후 지하에 설치된 후지즈카기증실을 둘러보았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경학자인 후지즈카 치카시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해 소장해온 추사의 유물들을 그의 아들 후지츠카 이카나오가 과천시에 기증해 추사박물관이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탐방 코스는 체험실로, 그 유명한 “세한도”를 복사해 한지에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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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예일치, 그 이상을 향해” 애쓴 추사 김정희는 북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청의 고증학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실사구시의 학풍을 주도한 실학자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31살이던 1816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발표해 ‘실사구시(實事求是)’ 이 하나로 학문의 길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나라의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장한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한서(漢書)>>의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라고 유홍준은 그의 저서 <<김정희>에서 밝혔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실사구시설”을 통해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ㆍ송(宋)의 한계를 따질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며 고증학의 타당성을 뒷받침했습니다. 여기서 한(漢)ㆍ송(宋)의 한계란 한나라의 유학은 훈고학(訓誥學)이고 송나라의 유학은 성리학(性理學)으로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을 말합니다. 송나라 유학자들이 도학(道學)을 천명하며 성리학을 내세운 것은 한나라 유학자들이 너무도 당연하여 말하지 않았던 것들로 다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실체는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추사 김정희가 이해한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본 뜻입니다.




  추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실사구시란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처럼 국리민복이나 국가개혁을 추구하는 사상이 아니고 학문을 하는데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새로운 방법을 칭하는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실사구시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사대부들의 방법론적 담론은 될 수는 있어도 조선조 후기 일반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가 될 수 없다는 한계도 확인했습니다.



 

   실사구시의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추사 김정희가 쓴 “實事求是說”의 원문과 임정기님이 해석한 번역문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따와 실습니다.




  漢書河間獻王傳云實事求是。此語乃學問最要之道。若不實以事而但以空疎之術爲便。不求其是而但以先入之言爲主。其于聖賢之道。未有不背而馳者矣。漢儒于經傳訓詁。皆有師承。備極精實。至于性道仁義等事。因爾時人人皆知。無庸深論。故不多加推明。然偶有注釋。未甞不實事求是也。自晉人講老莊虛無之學。便于惰學空疎之人。而學術一變。至佛道大行而禪機所悟。至流于支離。不可究詰之境。而學術又一變。此無他。與實事求是一語。盡相反而已。兩宋儒者闡明道學。于性理等事。精而言之。實發古人所未發。惟陸王等派。又蹈空虛。引儒入釋。更甚于引釋入儒矣。竊謂學問之道。旣以堯舜禹湯文武周孔爲歸。則當以實事求是。其不可以虛論遁于非也。學者尊漢儒。精求訓詁。此誠是也。但聖賢之道。譬若甲第大宅。主者所居。恒在堂室。堂室非門逕。不能入也。訓詁者門逕也。一生奔走于門逕之間。不求升堂入室。是廝僕矣。故爲學。必精求訓詁者。爲其不誤于堂室。非謂訓詁畢乃事也。漢人不甚論堂室者。因彼時門逕不誤。堂室自不誤也。晉宋以後。學者務以高遠。尊孔子。以爲聖賢之道不若是之淺近也。乃厭薄門逕而弃之。別于超妙高遠處求之。于是乎躡空騰虛。往來于堂脊之上。窓光樓影。測度于思議之間。究之奧戶屋漏。未之親見也。又或棄故喜新。以入甲第爲不若是之淺且易。因別開門逕而爭入之。此言室中幾楹。彼辨堂上幾棟。校論不休。而不知其所說已誤入西隣之乙第矣。甲第主者哦然笑曰。我家屋不爾爾也。夫聖賢之道。在于躬行。不尙空論。實者當求。虛者無據。若索之杳冥之中。放乎空闊之際。是非莫辨。本意全失矣。故爲學之道。不必分漢宋之界。不必較鄭,王,程,朱之短長。不必爭朱,陸,薛,王之門戶。但平心靜氣。博學篤行。專主實事求是一語行之可矣。附後叙 此爲閔杞園魯行所作云
自堯舜禹湯文武周孔。學術崇道義懋德行。求之實用是非之則。不汲汲於心性名理之辨。誠由此道自明。不待夫推原。而實正則名無不正也。聖人沒正學微。加之以燔焚。因之以橫議。六經離析。學徒散亂。漢儒諸子懷挾圖書。探賾同異。游學之盛。至三萬餘生。卓越爲吾道之宗者。在西京。有董江都。在東京。有鄭康成。其學以潛心訓詁爲主。以專篤謹嚴爲法。不蹈空虛。不鶩高遠。三代典型。庶幾其不泯。劉向稱董子。爲伊呂不加。筦晏不及。范史尊鄭氏。爲仲尼之門不能過也。尙德者可以觀矣。兩京人士。大抵多敦本實耻浮華。篤於行事。然荀楊之流。不識心性。去聖遠而微言絶。江都康成之徒。又不甚推明。後更不幸有佛氏之說綜錯其間。此道之軆。幾乎熄矣殊不知道義德行之實。原本乎心性之所固有者。故有宋眞儒。乃原其本而語其術。原之也詳而其術益廣。錙銖之辨。節目之論。其差在毫忽。傳之不百年。分而爲路逕之異。降而爲口耳之習。條緖甚於亂絲。末流愈多枝脚。至于今讀書談理之士。抱空言而迷途窮。日月而不返。方且扢扢此事。不知老之將至。而所謂實用是非。則啞然已忘失之。嗟乎惜哉。余甞窃疑於斯。偶爲金元春語之。元春卽以其所爲實事求是說示之。其論古今學術之變。門逕堂室之喩。醇如也。間又推尊漢儒。以爲經傳訓詁。皆有師承。備極精實。余亦擊節以爲漢世學者。尙能求之於實用是非者如此。所謂江都康成之學。盖可知耳。而善善惡惡之實。一變至於東京之名節者。亦有耶基本耳。雖然三代之學。皆以實也。實者道義也德行也。實正而名無不正。降至孟子之世。尙患其名之不明也。故孟子已原其本也。曰性善。曰存心養性是也。歷秦火而僅存。及漢世之草刱。所謂名之不明者。又不止於孟子之時。若董江都下帷發憤。潛心大業。令後學者略知所歸。其功健矣。然名之已不明。而語之猶不詳。則不可曰人人皆知。無庸深論耳。荀與揚也。誤於心性。而師異道人異論。百家殊方。指意不同。是烏得曰人人之皆知也此實董鄭諸公。質愨少言論。不爲口耳之資。且從樸實處做也。雖然江都之言曰。仁者所以愛也。其辭意之醇深。名理之不差。又非韓子博愛之流也。若謂董鄭諸公知不及此。則非知言也。仍念兩漢文字學術名理。多精篤親切。不若後世之馳鶩。是宜綴輯證補。竊自坿於敦本懋實之義。顧窮居不暇。而懼夫荒墜之甚也。他日自力。當復與元春共之。姑坿記之。爲實事求是說後叙。丙子季冬。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한유(漢儒)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그런데 진(晉) 나라 때 사람들이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설을 강론하여 학문을 게을리하는 허술한 사람들을 편리하게 함으로부터 학술(學術)이 일변(一變)하였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짐으로써 선기(禪機)의 깨닫는 바가 심지어 지리해서 추구하여 따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됨에 이르러서 학술이 또 일변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과 모두가 상반(相反)되었기 때문이다.그후 양송(兩宋 북송(北宋) 시대와 남송(南宋) 시대를 합칭한 말)의 유자(儒者)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여 성리(性理) 등의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말해 놓았으니, 이는 실로 고인(古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육왕(陸王) 등의 학파(學派)가 또 실없는 공허(空虛)를 밟고서 유(儒)를 이끌어 석(釋)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석을 이끌어 유로 들어간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그윽이 생각하건대, 학문하는 도는 이미 요순ㆍ우탕ㆍ문무ㆍ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의당 사실에 의거해서 옳은 진리를 찾아야지, 헛된 말을 제기하여 그른 데에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학자들은 훈고를 정밀히 탐구한 한유(漢儒)들을 높이 여기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일이다. 다만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치 갑제 대택(甲第大宅)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을 문경 사이에서만 분주하면서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을 들어가는 데에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한 나라 때 사람들이 당실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경이 그릇되지 않았고 당실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진(晉)ㆍ송(宋) 이후로는 학자들이 고원(高遠)한 일만을 힘쓰면서 공자(孔子)를 높이어 ‘성현의 도’가 이렇게 천근(淺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에 올바른 문경을 싫어하여 이를 버리고 특별히 초묘 고원(超妙高遠)한 곳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허공을 딛고 올라가 용마루[堂脊] 위를 왕래하면서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의(思議)의 사이에서 이를 요량하여 깊은 문호와 방구석을 연구하지만 끝내 이를 직접 보지 못하고 만다.그리고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좋아하여 갑제(甲第)에 들어가는 일을 가지고 ‘갑제가 이렇게 얕고 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어 별도로 문경을 열어서 서로 다투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쪽에서는 실중(室中)에 기둥이 몇 개라는 것을 말하고, 저쪽에서는 당상(堂上)에 용마루가 몇 개라는 것을 변론하여 쉴새없이 서로 비교 논란하다가 자신의 설(說)이 이미 서린(西隣)의 을제(乙第)로 들어간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면 갑제의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르기를,“나의 집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거하지 말아야지, 만일 그윽하고 어두운 속에서 이를 찾거나 텅 비고 광활한 곳에 이를 방치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ㆍ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鄭玄)ㆍ왕숙(王肅)과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굳이 주희(朱熹)ㆍ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