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73.실학명소 탐방기3(남양주다산유적지)

시인마뇽 2017. 4. 22. 12:16

                                                         실학명소 탐방기3

                                                                            (남양주다산유적지)

 

                                                     *탐방일자:2016. 6. 23()

                                                     *탐방지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다산유적지)

                                                     *동행 :나홀로




   대학원 공부로 바빠 잠재웠던 실학에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 또한 대학원공부였습니다. 1학기에 수강한 시조와 가사과목이 종강을 맞으며 기말고사를 대신한 소논문 이세보의 시조에 나타난 중국관을 작성하느라 18세기와 19세기의 조선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제게 오래 잊고 지냈던 실학을 일깨워준 인물은 반()실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으로 보이는 이세보(李世輔,1832-1895)였습니다. 이세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조를 남긴 문신입니다. 고종임금의 6촌 형이기도 한 이세보는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숭상한 나머지 그의 시조 여러 수에 무력으로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를 증오하고 무시하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의 무조건적인 반청감정은 개화를 키워드로 하는 19세기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것으로, 한 세기 전에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와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개방적 자세를 견지한 북학파 실학자들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뽑는 분입니다. 다산(茶山)은 성호 이익의 경세치용과 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한 것만으로도 조선조 최고의 실학자로 불릴 만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영조38년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인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향년 75세로 향리에서 유명을 달리한 다산의 생애는 크게 보아 수학기(修學期), 사환기(仕宦期), 유배기(流配期)와 정리기(整理期)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학기는 태어나서 28세에 문과에 합격하기까지를 이르는 것이고, 사환기는 문과에 합격해 38세에 형조참의를 사직할 때까지를, 유배기는 정조 붕어 후 유배되었다가 해배된 57세까지를, 그리고 정리기는 해배 되고나서 향리로 돌아와 삶을 마무리한 75세까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탐방한 곳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안리에 위치한 남양주다산유적지입니다. 마침 시조와 가사과목이 휴강이어서 이 때다 싶어 만사 제쳐놓고 그동안 별러왔던 다산유적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산본집에서 운길산역까지는 전철로, 운길산역에서 다산유적지까지는 시내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이곳 다산유적지는 다산이 태어났고 유배지에서 돌아와 생을 마친 향리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지척의 거리에 있고, 마을 뒤편으로 해발 600m대의 예빈산, 예봉산 및 철문봉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어 언뜻 보아도 배산임수의 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다산문화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넓은 길가에 전시된 거중기가 홍이포는 실학박물관에서 세운 것으로 당대의 과학탐구 정신이 결실한 것이어서 찬찬히 보았습니다. 길 왼쪽으로 전통벽돌로 나지막한 담을 쌓아 경내의 분위기가 얼마간 정숙할 것 같은 다산유적지를, 그리고 오른 쪽으로는 현대식 건물의 실학박물관을 배치해 다산과 실학을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습니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사든 후 본격적으로 다산유적지 탐방에 나섰습니다. 깔끔하게 단장된 전통 벽돌담 안에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그 뒤 구릉의 묘역, 동상, 그리고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이 모여 있습니다.



1)다산문화관/다산기념관


 

   첫 번째로 들른 다산문화관은 다산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해 꾸민 곳이어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한 번 빙 돌아보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다산의 저술이라는 전시판으로 이 보드에 목민심서55종의 저술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다산의 선구자적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시물을 둘러보다 시선이 멈춘 것은 다산의 가계도를 보고나서였습니다. 본관이 나주인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 정재원은 의령남씨와 결혼해 아들 약현(若鉉)을 낳았고, 해남윤씨와 재혼해 약전과 약종, 그리고 약용 등 세 아들을 얻었으며, 세 번째 부인 김씨와는 아들 약황을 낳아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다산의 외가는 명문가인 해남윤씨로 자화상의 작가인 윤두서의 손녀가 다산의 어머님이었습니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외가인 해남이 멀지 않아 참고할 만한 도서들을 쉽게 구해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첫째 형 약현은 바로 다산을 강진으로 유배토록 만든 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을 큰사위로 두었고,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귀양 가 명저 자산어보를 저술했으며, 셋째 형 약종은 신유사화(1801) 때 순교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다산 형제의 유일한 누이의 남편입니다. 다산은 학연과 학유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학유가 바로 1,032구의 월령체 장편가사인 농가월령가를 지은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대표적인 경세서로 목민 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이 있습니다. 사본으로나마 이 책들을 본 것은 다산유적지를 방문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실물크기를 1/4로 줄여 전시한 거중기는 역학적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힘들이지 않고 들어 올릴 수 있어 수원 화성 축성 때 활용되었습니다.

전통기와를 올린 현대식 건물로 외양이 깔끔해 보인 다산기념관은 그 규모가 다산의 학문적 업적이나 ‘2012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될 정도의 명성에 비해 작은 편이어서 다소 초라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2)동상/묘역




  뜰에 세워진 다산의 동상은 좌상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선생 상()‘이라고 명명된 이 동상을 보고 느낀 것은 얼굴 모습이 온화하기보다는 냉철하고 강직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과 교육을 망라한 다산의 사상이 사상이 동상 뒷면 벽에 붙여놓은 6개의 동판에 하나 씩 간략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최고의 덕이라고 했는데, 다산의 정치사상 요체는 동판에 새겨진 아래 글처럼 위민사상과 수기치인이었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爲民思想), 자신을 바로 세운 후에 남을 다스리는(修己治人)정신을 실행해야 한다는 선생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지도자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동상을 둘러본 후 바로 뒤 다산의 묘역을 찾아 나지막한 구릉을 올랐습니다. 박석을 깔아놓은 넓은 길을 따라 올라가 선생의 묘소에 다다랐습니다. 부인 풍산홍씨를 같이 모신 다산의 묘역은 여민들의 묘지보다 별반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쪽으로 소나무 숲이 조성된 묘역이 참으로 명당자리다 싶었던 것은 한강이 저 아래로 조망되어서였습니다. 이 구릉에서 저 한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지켜보며 꿈을 키웠을 다산은 회갑 때 묘지에 기록할 글을 미리 써놓았다 합니다. 아직 한문으로 된 원문을 해독할 수준이 못되어 묘역에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찾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선생은 묘지명에는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묘지에 묻을 광중본(壙中本)2종의 본이 있는데, 광중본을 국문으로 번역한 자찬묘지명 안내판이 아래 뜰에 세워져 있습니다.


3)여유당


 

   묘지에서 내려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여유당(與猶堂)의 여유(與猶)(),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노자(老子)의 말씀에서 따 왔다 합니다. 5대조부터 터 잡고 살아온 생가 여유당도 묘역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유당은 다산이 태어나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고, 강진 유배지에서 돌아와 머물었던 생가입니다. 이 집은 1925년 을사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이어서 고택의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두 세기 전 양반의 살림살이가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집안을 돌아보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것은 낮은 굴뚝과 독서대였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굴뚝을 아주 낮게 만들었는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연기를 사방으로 퍼뜨려 짐승들의 출몰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푹신한 요 위에 바닥에 털썩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조그마한 책상과 책, 뒤편으로 팔첩병풍(八帖屛風)을 쳐 놓아 이만하면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일 것 같았습니다.

  전통적인 부뚜막, 대청마루, 장독대와 쟁기 등이 모두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깔끔하게 꾸며진 이런 정도의 집이었다면 고결한 품위를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여유당 방문을 끝으로 다산유적지 탐방을 마치고 길 건너 실학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주마간산 격으로 박물관의 전시물을 일별한 후 임원경제지를 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의 일생을 그린 염정섭의 서유구와 정기준의 고지도의 우주관과 제도 원리의 비교연구2권의 책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수년 전 다산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 만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서울대도서관장을 역임한 정옥자 교수의 우리선비라는 책에 실린 「 『여유당전서에 담은 격변기의 삶이라는 글이 그것입니다. 다산의 삶과 사상이 이해하기 쉽고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되어 몇 대목을 요약해 옮겨 놓습니다.

 

   다산이 활약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은 조선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습니다. 농경사회에 잘 들어맞으나 상공업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8세기 중반에 북학사상이 태동했습니다.

   다산은 성호학파의 경학에 기초한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학문풍토를 계승하고 또 북학사상도 적극 수용해 경제적 평등의 실현과 민본주의적 왕도정치를 중핵으로 삼았습니다만, 선배실학자들과 확실하게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의 균전론은 토지는 오직 농민에게만 점유되어야하며 농민의 경작능력에 따라 토지점유와 소득분배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전에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혁신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정치사상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를 정치 담당세력으로 인정한 것은 종래 사림의 주장과 다를 바 없으나 통치권의 근거를 백성에서 찾음으로써 민권사상을 이론화 한 점은 다산의 독자성이 결실한 것입니다.

  철학사상의 근거가 되는 다산의 경학사상도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성리학 체계에서는 천리와 인륜을 하나의 체계로 인식해 일원적으로 파악했는데, 다산은 천리와 인륜 도덕을 완전히 분리해 인간문제를 사회문제로 파악하고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해 차별화를 확실히 보였습니다.

   다산의 실학자적 면모는 경학연구와 경세론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주목됩니다. 상서를 핵으로 하는 경학연구로 성리학자로서의 기초를 다진 다산은 실학으로 제기된 북학사상에 주목하고 과학기술에 집중해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는 그의 경세론 부분이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산의 문학관은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입각한 것으로 손끝의 잔재주나 기예가 아니라 했습니다. 이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동조한데서도 확인됩니다. 소설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다산이 평생 동안 짓고 저술한 3,000수에 가까운 시와 부, 그리고 500여권의 책은 현존하는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다산의 유적지는 남양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탐방기에 실지 못한 다산의 생애는 다른 유적지를 다녀오고 나서 다뤄볼 생각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