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명소탐방기3(팔석정)
탐방일자:2016. 7. 26일
탐방지 :강원평창 소재 팔석정
동행 :서울사대 원영환, 이상훈 동문
우리나라 명승지의 대부분은 산이나 물을 끼고 있습니다. 명승 1호인 명주청학동소금강이나 명승74호인 대관령옛길 모두 그러합니다. 이번에 대학동문들과 함께 찾아간 봉평의 팔석정도 예외는 아니어서 흥정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흥정천이란 해발 1,277m의 흥정산에서 발원해 봉평면의 백옥포리에서 계방산을 발원지로 하는 속사천과 합류해 평창강을 이루는 한강의 제2지류로, 그 길이는 하천연장이 17.78km, 유로연장이 25.9km에 달합니다. 한강의 제1지류인 평창강은 한반도 지형의 선암마을 인근에서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의 물을 받아 서쪽으로 내닫다가 영월에 이르러 태백산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의 본류 남한강에 합류됩니다.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북한강의 물을 양수리에서 받은 남한강은 한강이 되어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며 도도하게 서해로 흘러들어갑니다. 흥정산에서 시작한 흥정천의 물줄기는 서해에 안기면서 길고 긴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흥정천이 봉평면의 평촌리를 지나며 빚어낸 팔석정((八石亭)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평창의 명소입니다. 팔석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 중기 서예로 이름을 날린 양사언과 인연을 맺은 덕분일 것입니다. 제가 팔석정을 가보자고 마음이 동한 것도 국도 변에 세워진 팔석정 안내판에서 양사언의 이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목릉성세(穆陵盛世) 때 활동한 조선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호(號)는 금강산의 여름 별칭인 봉래(蓬萊)입니다. 조선 중종12년인 1517년 포천에서 서얼로 태어난 양사언은 명종1년인 1546년 문과에 급제한 후. 근 4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대부분을 지방 외직에서 보냈습니다. 양사언은 삼등, 함흥, 평창, 강릉, 회양, 안변, 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풀고, 안변군수로 재임 시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만년에 화재사건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두 해 뒤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68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해서와 초서에 능해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명인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문인 양사언은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 합니다.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 새긴 글씨가 바로 양사언의 작품입니다. 문집으로 <봉래시집(蓬萊詩集>이 있으나 이 문집에는 어떤 시조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봉래시집>에 실린 시작품은 모두 265편으로 그 중 자연과 명승지를 읊은 시가가 57편으로 가장 많습니다. 양사언이 지은 시조는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히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흘 높다 하돗다”의 딱 한 수입니다.
봉평읍내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속사의 이교수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팔석정을 들렀습니다. 도로에서 오른 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흥정천을 건너 팔석정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흥정천과 나란한 방향으로 놓은 예쁘장한 주홍색 다리와 자그마한 정자는 ‘효석문학 백리길’을 따라 걷는 여행객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였으며, 팔석정 안내판이 세워진 것도 ‘효석문학 백리길’이 이곳을 지나는 덕분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효석문학 백리길’이란 평창이 낳은 소설가 이효석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무대인 평창일대에 평창군이 나서서 조성한 문학의 길입니다. 네 해전 소설을 끌어가는 허생원과 동이가 다녔던 장돌뱅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는 물론 자연경관도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낸 이 길은 봉평의 효석마을에서 평창읍에 이르는 53.5Km의 길을 5구간으로 나누어 조성됐는데, 팔석정은 이효석 선생 생가~흥정천~용평면 백옥포리~장평리 여울목까지의 첫 구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팔석정안내판에서 파악한 정보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영동지방의 명소를 두루 다닌 강릉부사 양사언은 영서지방인들 그런 명소가 없겠냐면서 찾아다니다가 봉평면을 들릅니다. 이곳의 아담하면서도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정사도 잊은 채 8일을 신선처럼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팔석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게 하고 1년에 세 번 씩 춘화(春花), 하방(夏芳), 추국(秋菊)을 찾아와 사상을 가다듬습니다.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부임 명을 받자 다시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해 집 한 채를 세운 후 봉래고정이라 명명한 샘이 깊은 우물을 파놓고, 주변의 여덟 군데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淸蓮),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瑤跳躍), 석평위기(石坪圍碁)라는 글을 새겨놓습니다.
정자 쉼터에서 봉평쪽으로 ‘효석문학 백리길’을 따라 몇 걸음 옮겨 흥정천의 물 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흥정천이 팔석정의 바위들을 때리는 물소리가 꽤 크게 들렸습니다. 팔석정의 너럭바위들 가운데로 여울져 흐르는 급류가 빚어낸 하얀 물보라를 보고 있노라니 물고기들도 같이 물 위로 튀어오를 것 같았습니다. 하상이 제법 깊고 천변에 깎아질러 서 있는 암벽이 서너 길은 됨직해 보이는 곳이 있어, 하천의 폭이 좁지 않은 데도 어느 정도 협곡의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푸르른 소나무들이 천변에 숲을 이루고 있어 양사언이 세운 정자에 팔석정의 비경을 찬하는 편액이 꽤 여러 수 붙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가 결코 부럽지 않아 보이는 팔석정에서 한참 동안 머무렀으면서도, 양사언이 여덟 군데 바위에 새겼다는 글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5백년이 훨씬 지난 오래 전의 일로 찾아보았자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몇 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바위에 무엇을 새겨 넣는 일이 그리 고와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20분 넘게 머무는 동안 이 바위 저 바위를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이 실물이나 실경의 판박이이어서 찍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진 만큼 현장의 생생한 감동을 잘 담아낼 수 없는 것이 따로 없어 저는 이제껏 좀처럼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솜씨에 구애되지 않고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탐방기를 쓸 때도 사진은 매우 유용합니다. 메모된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는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지 않아 글이 무미건조하기 십상입니다. 이런 허접스러운 탐방기도 사진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팔석정의 주인공인 양사언을 떠올렸습니다. 풍류의 멋을 아는 양사언이 팔석정에서 여드레나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여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즘에 명승지에서 그토록 오래 놀면서 공사를 돌보지 않는 지방의 수령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파면감입니다. 목민관인 지방수령이 오래 근무지를 떠나 명승지에서 제명(題銘)이나 하면서 놀며 보내는 것을 풍류로 받아들여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아 조선이 쇠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양사언이 머물다간 흔적을 남긴 곳이 여기 팔석정 만은 아닙니다. 금강산의 만폭동의 바위에다 큰 글씨로 “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제명을 남긴 것은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습니다. 훗날 이종유는 그의 산수유기 “동유기”에서 유객들이 양사언을 흉내 내어 제명을 남기는 바람에 더 이상 만폭동에 제명할 공간이 없다고 못마땅해 하기도 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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