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명소 탐방기2(대풍헌)
탐방일자:2016. 7. 8-9일
탐방지 :강원울진 소재 망양정 옛터, 울진대풍헌(7월8일)
월송포진성터(7월9일)
동행 :경동고 24회 이규성 부부와 안병관 동문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고 친구덕분에 동해바다 몇 곳을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건강이 안 좋아 힘들어 하는 부인을 위해 동해로 바닷바람을 쐬러간다며 같이 가지 않겠냐고 고교동창인 이교수가 연락해와 두 말 않고 따라나섰습니다. 서울에서 평해까지 이 친구 차로 이동해 이 곳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고교동창 이원장을 만났습니다.
이번 탐방의 길 안내는 고교동창 안촌장이 맡아주었습니다. 고교 동창들이 이 친구를 안 촌장으로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생면부지의 홍천으로 이사 간 이 친구는 이 시골마을의 정보화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이를 지켜본 마을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촌장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합니다. 홍천에서 여러 해 살다가 얼마 전에 이곳 평해로 옮겨와서도 동리사람들과 허물없이 잘 지내는 특유의 친화력이 마냥 부럽습니다.
1.망양정(望洋亭) 옛터
첫 번째 탐방지는 망양정 옛터입니다. 망양정 옛터로 가는 길에 ‘기파랑길’이 지나는 사동리 해변을 들렀습니다. 정오를 1시간 남긴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 쬐어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배 한 척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해변에서 망망대해의 동해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절로 탁 트였습니다. 지난 봄 입학원 대학원에서 젊은 친구들에 뒤지지 않으려 바동거리며 공부한 한 학기의 스트레스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따가운 햇살에 밀려 모래가 아주 고와 보이는 해변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망양정 옛터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동리 해변가에서 멀지 않은 망양정 옛터는 기성면 망양리의 현종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피천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인 근남면 삼포리의 망양정해수욕장 뒷산 정상에 에 세워진 망양정은 여기 망양정이 쇠락해 사라지고 나서 한참 후인 철종11년(1860)년에 울진현령 이희호가 신축한 것이라 합니다. 알고 보니 여기 옛터의 망양정도 다른 곳에서 이전한 것입니다. 첫 번째 망양정은 고려시대에 당시 기성현 망양마을 해안가에 세웠었는데 조선조의 성종2년(1471년)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 1420-1489)가 쇠락한 망양정을 여기 현종산의 남쪽 기슭으로 옮겨 세운 것입니다.
길에서 망양정 옛터로 올라가는 길이 아주 가팔랐지만, 오름 길이 짧았고 지그재그로 데크계단을 설치해 어렵지 않게 올라갔습니다. 작년 울진군에서 이곳에 세운 정자는 삼포리의 망양정자보다 바다가 가까워 조망이 훨씬 뛰어나 보였습니다. 송강 정철과 옥소 권섭이 그들의 여행기에서 고래를 보았다고 언급한 망양정의 위치가 바로 여기라는 것을 안 것은 망양정의 자리 옮김을 꼼꼼히 따져보고 나서입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빼어난 자연 풍광에 매료되어 감흥을 한시로 담아내곤 했습니다. 조선 중기 경상도 도사를 지낸 수서 박선장은 그의 시 <망양정>을 통해 바다를 보려거든 망양정에 올라보라고 권했습니다.
望洋亭(망양정)
開懷森森三山遠 바다 바라보니 가슴 트이고 삼산은 먼데
極目茫茫萬頃平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 있네
欲遂平生觀海志 평생에 바다 보려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請君須上望洋亭 그대부터 망양정에 올라 보시게나
새로 지은 정자에 ‘망양루’ 현판이 걸려있지 않고 편액도 보이지 않아 조금은 의아했는데, 그 까닭은 기존의 망양정과 구별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울진군도 여기에 정자를 세우는 사업을 ‘망양정 복원사업’이 아닌 ‘망양정 옛터 정자건립사업’으로 명명했습니다.
망양정은 조선의 숙종 임금이 관동제1루라고 칭송했을 만큼 조망이 빼어나 관동팔경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울진군에서 이 옛터에 정자를 다시 세울 때 겸재 정선의 사실적 그림인 ‘망양정도’를 참고했다 합니다. 그렇게 세운 정자에 현판을 걸지 못할 것이라면 터만 정비하고 건물은 아니 세움만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울진대풍헌(蔚珍待風軒)
동해의 풍랑이 만만치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나봅니다. 2006년 가을 몇 몇 친구와 함께 울릉도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동해시에서 울릉도로 가는 길에 파도가 심하게 일어 승객들 거의 다가 먹은 것을 게우는 등 배멀미로 엄청 고생했습니다. 4백명이 넘게 타는 대형 여객선으로도 풍랑을 뚫고 울릉도로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는데 조선시대 범선으로그 섬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까는 어렵지 않게 상상됩니다. 요즘도 태풍이 불면 잔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출항하듯이 조선시대에도 순풍을 기다렸다가 항해에 나섰습니다.
대풍헌(待風軒)은 조선 후기 수토사(搜討使)들이 잠시씩 머물렀던 건물입니다. 원래는 동사(洞舍)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 구산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울진군 기성면의 구산봉산로에 자리하고 있는 대풍헌은 경상북도 기념물 165호로 지정된 20평이 채 안 되는 일자 건물로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청색이 고와 보이는 대풍헌의 건립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합니다. 2010년 건물을 보수하면서 찾아낸 상량문으로 철종2년(1851년)에 이 건물을 중수했고 준공에 3개월 정도 소요되었음은 확인되었습니다. 이 상량문에는 당시 중수에 참여한 주민과 목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청에는 여러 개의 현액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글이 쓰여져 있어 대풍헌에 관한 자료의 보고이다 싶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풍헌의 대청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구산동사 중수기」1점(1851년), 「대풍헌(待風軒)」 1점(1851년), 「구산동사 중수기(邱山洞舍重修記)」 1점(1851년), 「영세불망지판(永世不忘之板)」 6점(1870∼1878년), 「구산동사기(邱山洞舍記)」 1점(1888년), 「동계 완문(洞稧完文)」 1점(1904년), 「중수기(重修記)」 1점(1906년)이 걸려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수토절목」과 「완문」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풍헌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동해의 외딴섬 독도를 가지고 일본이 시비를 걸어온 영토분쟁 때문입니다. 여기 대풍헌에서 순풍을 기다렸다 출항했다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에 수토사를 보냈고 나아가 울릉도와 독도를 오래 전부터 지배해왔음을 일러주는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을 역사적 명소인 대풍헌으로 안내한 안촌장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대풍헌 탐방을 마치고 몇 년 전에 이교수와 같이 들른 월송정으로 이동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한여름 뙤약볕에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달리 친구부인의 밝은 모습을 보고 오염되지 않은 바닷바람과 자연풍광을 탐승하는 것이 최고의 힐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월송포진성터(月松浦鎭城址)
개인 사정상 저 혼자 먼저 귀가해야 해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후포에서 울진버스터미널까지는 고맙게도 평해 집에서 차를 끌고 온 안촌장이 도와주었습니다.
차안에서 최근 수년간의 근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고교졸업 후로는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이해의 폭을 넓혔습니다.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서로의 삶이 서로에 생소할 수 있고 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촌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 친구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휴머니스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주위사람에게는 눈 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고 나만을 위해 살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안촌장의 안내로 들른 월송포진성터(月松浦鎭城址)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탐방지입니다. 평해읍 월송리에 소재한 월성포진성터는 2011년 망양-직산 간 도로확포장공사를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로 세상에 드러난 유적지입니다.
조사 결과 월송포진의 남쪽 부분 성터가 확인되었다는데 아쉽게도 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성터는 찾아보지 못하고 울창한 소나무 숲만 잠시 거닐었습니다. 이 성터에서 성벽, 무지, 우물등의 유구와 기와 자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모래층을 기반으로 축조된 토성혼축의 성벽 둘레는 약330m, 높이는 3.1-4.7m, 너비는 6m내외로 추정된다 합니다.
월송포진은 명종 10년(1550년) 석성을 쌓았으며 만호1인과 수군 400명이 주둔하여 동해안의 경비를 담당했다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삼척포영과 교대로 수색하고 토벌했는데 삼척포영이 개발로 그 흔적이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월송포진만 남아 있습니다. 월송포진이 우리나라 독도의 영유권주장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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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바다에 접할 기회가 없는 대부분의 뭍사람들에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명승지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바닷가 명승지가 역사가 어린 유적지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탐방여행이 오랜 지기와 더불어 서라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고교동창들과 함께 동해안의 역사적 명소를 찾아 나선 이번 나들이가 그러했습니다.
돈만 있다고 나들이 길을 편히 나설 수 없는 것은 건강이 뒷받침 되지 않는 다면 나들이가 즐거움이 아니고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 건너로 떠나는 해외여행만이 나들이는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세계사에 앞서 배워야 하듯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명소를 해외의 세계사적 명소보다 먼저 탐방하는 것이 아무래도 순서일 것 같습니다.
여행을 생각하면 남은 인생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습니다. 한 학기를 막 마친 대학원공부가 모두 끝나면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나서볼 뜻입니다. 이번 나들이를 도아주고 같이 해준 친구들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청마 유치환님의 ‘울릉도’시를 읊는 것으로 이번 탐방기를 마무리합니다.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산행사진>
1)망양정 옛터 등
2)울진대풍헌
3)월송포진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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