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명소탐방기4
탐방일자:2017. 6. 16일(목)
탐방지 :강원도춘천시 소재 의암류인석선생유적지 및
척재이서구선생묘지
동행 :김형술 교수님 및 한희민 학우
네 번째로 탐방 길에 나선 춘천의 명소는 의암 류인석선생과 척재 이서구선생의 묘지입니다. 의암 선생의 묘지는 꽤 넓은 땅에 잘 꾸며진 유적지의 상단에 자리했고 척재 선생의 묘지는 후손들이 자주 들르지 못해서인지 풀이 무성했습니다. 두 분이 살았던 시대도 100년 가까이 차이가 나고 오늘날 두 분을 기리는 이유도 같지 않아 한 묶음으로 탐방기를 쓰는 것이 두 분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 가싶어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유적지를 다녀와서 빠짐없이 탐방기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탐방대상에 대해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그 자료를 나름대로 정리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함입니다. 명소를 다녀와서 관련서적을 한두 권 찾아 읽으려 하는 것도 보다 견실한 탐방기를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명소를 다녀와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그곳을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 탐방대상에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 탐방대상은 인물일수도 있고, 승경일수도 있으며, 건축물일수도 있습니다.
이번 탐방은 저와 함께 강원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한희민 선생이 주선하고 저희에게 개화기문학을 강의한 김형술 교수께서 동행해 더욱 뜻 깊었습니다.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으로 향토사랑이 유별난 한희민 선생이 안내를 맡아주어 찬찬히 탐방지를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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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암 류인석선생 유적지
의암류인석(毅菴 柳麟錫, 1842-1915) 선생은 1842년 강원도 춘천 남면의 가정리 우계에서 아버지 류중곤과 어머니 고령신씨의 3남3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1855년 족숙 류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같은 해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입문합니다. 1859년 여흥군수 민종호의 딸과 결혼하나 그 6년 후에 사별하고 다음 해인 1866년 경주유생 정문구의 딸과 재혼합니다. 1868년 스승 이항로가 별세한 후 중암 김평묵과 족숙인 성재 유중교에게서 수학합니다. 1875년 부모의 명령으로 경기도 복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하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매진합니다.
친부와 양부, 김평묵선생과 유중교선생이 모두 타계한 후 1895년 스승 유중교의 유지를 받들고자 제천으로 이사 가서 화서학파의 종장이 된 선생은 문인사우들에 처변삼사를 제시합니다. 처변삼사(處變三事)란 변란에 대처할 세 방안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소탕하는 의거소청(義擧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선비로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자청치명(自精致命)을 이르는 것으로 선생은 처음에는 모친의 복상중이어서 고국을 떠나 일시 피하여 힘을 길렀다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문인사우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1896년2월 호좌의진 창의대장에 오르는 것으로 의병활동을 본격화합니다.
의암류인석(毅菴 柳麟錫)선생은 국내외에서 의병활동을 하며 세 번이나 망명길에 오릅니다. 제천과 충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일본의 추적을 피해 1896년8월 중국의 서간도로 옮겨 재기 항전을 모색합니다. 1897년 일시 귀국해 모친의 대상에 참여하나 그 다음해인 1898년 재차 망명해 중국의 오도현 통화구로 들어가 이소응 등과 함께 의병재기를 다짐합니다. 팔왕동을 거쳐 오룡산으로 이주해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기지를 구축한 선생은 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이 점차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되자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강계로 이거합니다. 이때부터 약 8년 간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강회활동과 향약운동에 집중하고 이진룡, 백삼규 등의 의병장을 길러내기도 합니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망명한 선생은 국내외의병의 통합까지 계획하여 의병규칙, 관일약, 의무유통등을 작성하여 국내외에 홍보하고 그 결과로 1910년 이범윤, 이남기, 이상설 등과 함께 ‘십삼도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로 추대됩니다.
1910년8월29일 일제의 조선합병으로 식민지가 되자 류인석선생의 문인사우 가족들은 일제통치를 거부하고 1911년 4월 중국으로 집단망명해 신빈현평정산진난천자마을에 정착합니다. 1914년 3월 러시아에서 중국의 서간도로 이주한 선생은 그해 5월 난천자마을에 정착했다가 8월 관전현의 방취구로 옮겨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을 염원하여 지은 『도모편(道冒編)』을 최후의 저술로 남깁니다. 1915년 3월14일 방취구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것으로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끝납니다.
아침 일찍 춘천명소 탐방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날 강촌의 한 선생 댁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능했습니다
. 오전8시경 한선생 차로 강촌을 출발해 소주고개를 넘고 추곡천을 따라가 남면 가정리의 의암류인석선생유적지에 도착한 시각은 8시반경이었습니다. 정식 개관은 10시부터이나 마침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는 충의문이 열려 있어 문 옆의 의암류인석선생유적지 안내도를 일별한 후 유적지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충의문 안으로 들어가 의암교를 건넌 후 처음 눈길이 머문 곳은 관일약(貫一約) 비(碑)였습니다. 관일약(貫一約)이란 선생께서 1909년 음력 7월 항일무장세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제정한 규약입니다. 박민영님은 그의 논고 「십삼도의군 도총재 류인석, 그 역할과 위상」에서 “류인석은 관일약서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절대가치인 오도(吾道), 그리고 자신과 인류까지 멸절되는 극한상황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 네 가지(‘四愛’)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애국(愛國), 애도(愛道), 애신(愛信), 애인(愛人) 네 가지를 ‘하나로 관통하는 약속’, 곧 관일약을 만들어 시행한다고 그 취지와 목적을 밝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유적지에 세워진 직육면체의 비(碑) 제목이 바로 그 네 가지 가치였습니다. 그중 하나 ‘愛國’ 비(碑)에 쓰인 비문의 내용은 “애국심은 관일약의 첫 번 째 실천강목이다. 의암선생은 1909년 음력7월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민족을 지키고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결속하는 관일약(貫一約)을 제시하였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를 며칠 앞둔 초여름의 아침 햇살이 이다지도 따갑게 느껴지는 것은 오래 지속된 가뭄 때문일 것입니다. 땡볕에 쫓겨 다른 곳을 둘러보지 못하고 곧바로 유적지 최상단에 자리한 묘지를 찾아가 참배했습니다. 1915년 선생이 서거해 묻히신 곳은 중국 땅이었습니다. 요녕성관전현난전차평정산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를 여기 가정리묘역으로 이장한 것이 1935년입니다. 이 묘역이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2000년의 일이며, 2004년에야 비로소 유적지가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의 묘비에 “有明朝鮮義菴 柳先生 之墓 配孺人麗興閔氏 祔左 配孺人 慶州鄭氏 祔左”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첫 부인과 둘째부인 모두 이 묘에 합장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봉분이 들어선 묘지는 그다지 넓지 않은데 묘역이 지나칠 리만큼 넓다 싶어, 혹시나 검약을 몸소 실천한 선생에게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백범김구선생 친필고유문비(白凡金九先生 親筆告諭文碑)’입니다. 백범김구선생이 여기 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고유문을 올린 것은 1946년8월17일의 일입니다. 34년 늦게 태어난 백범선생이 생전에 의암선생을 만나 뵌 적이 있는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신 백범선생께서 올리신 고유문 중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옛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 하오리까, 향불을 피우며 무한한 심사를 하소연하오니 영령께서는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라는 대목은 몇 번을 읽어도 그 감동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동행한 교수께서 고유문을 읽어 내려가다 류인석선생이 심학에 힘쓰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잠시 읽기를 멈추고 혹시나 류인석선생이 도학자로 오인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뜻을 이야기했습니다.
자리를 옮겨 찾아간 곳은 의암기념관입니다. 이 기념관에 전시된 많은 것이 강원대박물관에서 본 것 같아 대충 훑어보았습니다만, 방금 전 비석에 새겨진 김구선생의 종이에 쓴 고유문이 전시되어 반가웠습니다.
충의문-묘지의 오른 쪽 유적지는 둘러보지 못하고 충의문을 빠져나와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유적지를 총괄하는 분이 한선생의 고교동창이어서 이분으로부터 고맙게도 화보집 『대한13도의군 의암류인석도총재를 기리고 배운다』와 사단법인 의암학회에서 발간한 『의암유인석 백절불굴의 항일투쟁』을 받아 왔습니다. 이 두 권에서 상당 부분을 인용해 이 글을 엮었음을 밝히며,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류인석, 김구, 안중근 세 분의 관계입니다. 제 나름 파악한 세 분의 관계는 대략 이러합니다. 『대한13도의군 의암류인석도총재를 기리고 배운다』에 의암류인석 선생께서 하얼빈의거를 단행한 안중근의사(1879-1909)에 대해 만고의협(萬古義俠)의 우두머리라고 칭송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께서 안중근의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암유인석 백절불굴의 항일투쟁』에 따르면 1908년 이범윤과 최재형은 연합하여 4천여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으고 연추를 의병기지로 하여 연추의병대를 조직했는데, 이 조직의 총독장이 김두성이라는 이름의 류인석이고 대장에 이범윤이 추대되었으며 선생보다 37년이 어린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 12명의 동지를 모아 단지동맹을 한 곳이 연추하리로, 이들과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암살하기로 맹세하고 1909년 9월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암살을 실천에 옮깁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총살한 것이지 개인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힌 것도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정통유학자이면서도 개화 정신의 소유자로 성재 유중교의 문인이며 의암 류인석과는 동문으로서 당시 해서지방의 대학자 고능선을 초빙해 자제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고 김삼룡은 그의 『안중근평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김구선생이 류인석선생을 직접 만나 뵈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김구선생과 안중근 가문과의 인연이 특별해 류인석선생의 명성을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혁명에 참가했다 쫓기는 신세가 된 김구를 청계동에 불러 집한 채를 사서 주어 살게 합니다. 김구선생은 4-5개월을 이곳에 머물면서 안태훈에게서 의리와 호방한 기질을 배우고 선비 고능선에게서 유학과 대장부의 기개를 배웁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어졌는데, 김구선생은 안중근 의거 뒤 청계동 시절의 인연으로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해주감옥에서 한달 넘게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납니다. 김구선생의 장남 김인은 안중근의사의 실제인 안정근의 딸 안미생과 결혼하면서 두 가문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의암 류인석선생은 문무를 두루 갖춘 보기 드문 분입니다. 선생은 사후 196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습니다만, 너무 늦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화서학파의 종장으로 개화파와 대척점에 있었던 분이어서 수구적으로 보일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할 수 없으나 끝까지 의병장으로 몸소 항일운동을 전개하신 지조 높은 분이어서 조금이나마 선생의 높으신 뜻을 기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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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척재이서구선생 묘지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문인으로, 영조30년인 1754년에 영의정 직을 증직 받은 이원(李遠)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생은 16세에 연암 박지원을 만나 글 쓰는 법을 배우며, 21세에 정시병과에 응시해 제16인으로 뽑힙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더불어 사가시인(四佳詩人)의 칭호를 얻은 선생은 정조10년인 1786년에 홍문관교리가 됩니다. 선생은 선조의 12자인 이영의 직계후손인 왕손 출신이어서, 서얼출신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다른 사가시인들과는 달리 벼슬살이가 순탄해 정조는 물론 순조 때도 중용되어 형조판서에 오릅니다. 척재선생은 한 번도 중국을 다녀오지 못했지만 홍대용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의 실학파 문인들과 교류해 학문의 폭을 넓힙니다. 사가시인 중 어느 누구보다 순탄하게 벼슬살이를 한 선생께서 벼슬보다 은거에 미련을 가진 것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데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선생의 시가 혁신적이거나 현실에 치우치기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사색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은 순조25년인 1825년 72세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척재선생이 남긴 문집으로는 『척재집』과 『강산초집』 이 있습니다.
의암 류인석선생 유적지에서 가평천을 따라 남쪽으로 진행하다 가정교를 건넜습니다
. 15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쪽 고개를 넘으면서 왼쪽 아래 홍천강을 내려다보고, 강 너머로 2008년 종주했던 한강장락지맥에 자리한 장락산과 왕터산을 조망했습니다. 고개를 넘어 박암리로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다솜레저’ 안내판이 서있는 삼거리에서 하차했습니다. 공터에 차를 주차시킨 후 4-5분가량 그늘진 왼쪽 임도를 따라 걷다가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 꽤 넓어 보이는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선생의 묘역에 이르렀습니다. 이 묘역에 이르기까지 안내판이 전혀 없어 한선생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정말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척재선생의 묘역에는 두 기의 묘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묘역 상단의 묘는 묘비에 “贈議政府領議政行司諫院正言李遠之墓 贈貞敬夫人平山申氏祔左 貞敬夫人晉州柳氏祔左“라는 비문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부친 이원의 묘가 확실합니다. 하단의 척재선생 묘비는 몇 년 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다시 세울 때 앞뒤를 바꾸어 잘못 세웠다하는데 비문이 읽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되어 비문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의암류인석선생의 묘역과 명징하게 대비되는 것은 묘역의 관리입니다. 유적지 안에 자리한 의암선생의 묘는 규모는 크지 않아도 관리가 잘되어 잔디가 가지런히 잘 다듬어져 있는데 척재선생의 묘는 묘역만의 크기로는 의암선생의 묘역보다 적지 않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잡초들이 묘지를 덮어 과연 이 묘지가 한 때 형조판서를 지낸 분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묘역에서 잡목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선생의 고향 양평에 후손들이 살고 있어 해를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해와서이다 싶었습니다.
척재 선생은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탐관오리의 부정을 척결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가였던 김조순도 선생이 뛰어난 인재임을 인정해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합니다. 선생의 선정에 관한 설화가 수십 편이 전래되고 있다하니 선생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꾸며진 이야기 아님은 분명합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많은 사대부들이 천주교신자로 몰려 죽음을 당한 신유사옥이 일어납니다. 정조가 죽자 영조의 마지막 왕비 정순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도를 역적죄로 다스립니다. 본격적인 천주교탄압은 이렇게 시작되는데 막후에서 심환지, 서용보 등과 같이 탄압에 적극 가담한 사람이 이서구라고 재야사학자 이이화는 그의 저서 “이야기 한국사”에 적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다른 자료에는 신유사옥 때도 죄인들의 억울한 상황을 조사하여 벌을 감해주자 주장했고, 정약용과 이기양도 이서구의 도움으로 극형을 모면했다 하는데 과연 그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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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선생과 척재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한 자로 재서 재단할 수 없는 것은 두 분이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각 시대가 요구했던 시대정신이 달라서라는 생각입니다. 의암선생의 한시 ‘야좌독역(夜坐讀易)’과 척재 선생의 한시 ‘출교해관장귀동음고려(出郊解官將歸洞陰故廬)’를 읽고 느낀 바가 다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夜坐讀易
柳麟錫
忍痛含寃此一翁 고통과 원통함을 한몸에 지닌 이 늙은이
遼天萬里雪堆中 머나먼 하늘에서 흰눈내려 쌓이도다
四千餘載中華脈 주역은 사천년 동안 중화의 맥을 이어왔고
五百來年列聖功 조선조 오백년 동안 성인의 공을 펼쳐왔도다
歲莫能寒松栢勁 이 한해도 저물어 추운데 송백의 절개는 굳세어라
春無不到海山融 봄이 다달으니 바다와 산의 기운은 풀어진다
屈伸有感看於易 굴신하고자 하여 주역의 이치를 살피면서
耿耿燈光徹夜紅 등 심지를 돋우다보니 이 밤을 지새누나
出郊解官將歸洞陰故廬
李書九
臨水軒窓署氣收 강물 앞의 다락 창에 더위 기운 사라지니
偶然栖息卜淸幽 우연히도 맑고 깊은 장소 가려 깃들었네
徘徊野鶴將斜日 들학이 배회하니 저녁 해가 지려하고
蕭瑟林蟬又一秋 숲 매미가 적어지니 또 한 번의 가을일세
南畒終成歐老志 앞밭에서 마침내 구노의 뜻 이루었는데
東山猶有謝公憂 동산에서 오히려 사안 시름 남았으나
安危廊廟諸賢在 국가 안위는 조정 안의 현자들에 맡겨두고
好借餘䄵伴海鷗 남은 생은 잘 빌려서 갈매기와 짝하리라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합니다. 이번에 묘역을 찾은 두 분은 후세들에 이름 남기기에 성공한 분들입니다. 의암선생은 선비이자 의병으로, 척재 선생은 문신이자 문인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 이름은 보통사람들보다 훌륭했기에 묘지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훌륭한 이름을 남긴 분들의 이름을 전하는 일입니다. 공은 공대로 드러내고 과는 과대로 평가해 그 분들의 이름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탐방보다 탐방기 작성이 더욱 어려운 가 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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