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상백1리버스정류장–이포보-개군레포츠공원입구
*탐방일자: 2026. 2. 11일(수)
*탐방코스: 상백1리버스정류장-상백교-계신리마애여래입상-삼신당-이포보 -파사산성
-이포보-카페 이연-개군레저스포츠공원-하자포리교-개군레포츠공원입구
*탐방시간: 9시5분- 16시45분(7시간40분)
*동행 : 나 홀로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여주 팔경의 한 곳인 파사산성을 올라가 한강을 조망했습니다. 해발230m의 파사산 정상을 에워싸고 있는 파사산성은 시야가 탁 트여 여주 최고의 한강전망처로 자리잡았습니다. 파사산성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선정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한강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팔경을 만나볼 수 있는데, 단양팔경, 충주팔경, 여주팔경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팔경은 관동팔경(關東八景)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동팔경이란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통틀어 이릅니다. 남한 땅의 6경과 북한 땅의 삼일포는 다녀왔는데, 하나 남은 총석정은 통일 후에나 가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동팔경이 우리 시문(詩文)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후기 문신인 안축(安軸, 1282-1348)이 1330년(충숙왕17년)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지은 경기체가 『 관동별곡』이 처음입니다.
관동팔경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팔경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입니다. 소상팔경이란 중국 후난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는 지점의 빼어난 여덟 가지 경관을 말합니다. 11세기 북송 시대의 문인화가 송적(宋迪, 약1015-1080년경)이 이를 처음 그림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로 형상화하면서 소상팔경은 동아시아 산수화의 전형적인 주제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산시청람(山市晴嵐): 아침 안개 낀 시골 시장의 풍경
연사만종(煙寺晩鍾): 안개 낀 사찰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漁村夕照): 저녁노을이 비치는 어촌의 모습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돛배들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밤비 내리는 풍경
동정추월(洞庭秋月): 가을 보름달이 비치는 동정호의 모습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사장으로 내려앉는 기러기 떼
강천모설(江天暮雪): 해 저물 무렵 강과 하늘에 내리는 눈
여주팔경의 전범은 관동팔경이 아니고 소상팔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상팔경이 어느 순간의 동적이미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면 관동팔경은 경관이 빼어난 명승지의 정적 이미지를 옮겨 놓은 것이다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옛사람들이 여주를 대동강의 평양, 소양강의 춘천과 함께·우리나라 3대 강촌으로 꼽았을 만큼 여강을 중심으로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룬 풍경은 아래 시와 같이 가히 일품이라 하겠습니다.
신륵모종(神勒暮鍾) 신륵사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
마암어등(馬巖漁燈)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을 밝히는 풍경
학동모연(鶴洞暮煙) 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연탄귀범(燕灘歸帆) 강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양도낙안(洋島落雁) 양섬에 기러기 떼 내리는 모습
팔수장림(八藪長林)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이릉두견(二陵杜鵑)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파사과우(婆娑過雨) 파사성에 여름 소나기 스치는 광경
여주팔경의 전범이 관동팔경이 아니고 소상팔경이라는 것은 여주팔경의 모종(暮鍾), 귀범(歸帆), 과우(過雨), 낙안(落雁) 등이 소상팔경의 만종(晩鍾), 귀범(歸帆), 야우(夜雨), 낙안(落雁) 등과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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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30분에 여주역을 출발하는 상백리행 버스를 타려고 새벽부터 서둘렀습니다. 오전 6시경에 산본 집을 나서 판교역을 거쳐 여주역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이 조금 못 걸렸습니다. 여주역에서 961-2번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상백1리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9시5분 상백1리버스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지난번에 지났던 119Km 지점의 삼거리를 지나 상백리선착장인 찬우물나루터에 이르렀습니다. 인근 부발과 백사의 곡물들이 모이는 큰 포구였던 찬우물나루터는 강 건너 대신장이나 양평 곡수장에 갈 때도 흥천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정박한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찬우물나루터 바로 옆에 작은 배 한 척이 있어 이곳이 찬우물나루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찬우물나루터를 출발해 한강 좌안의 버드나무 숲길을 지나 칼바위, 고래바위, 붕어바위가 모여 있는 이야기바위에 다다랐습니다. 산적과 싸우다 죽은 작은 백정의 칼이 바위가 되었다는 칼바위, 험상궂고 거구여서 동네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한 장수가 산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가 동네를 덮치는 것을 막다가 바위에 묻혀 죽은 일이 발생했는데, 그 후 동네 사람들이 이 바위를 장수처럼 크다하여 불렀다는 고래바위,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간 낭군을 기다리다 낭군을 찾아 한양으로 떠난 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후 그 자리에서 물 위로 솟아난 바위를 일러 칭했다는 붕어바위들은 그리 크지 않아 전설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바위를 사진 찍은 후 능백로가 지나는 상백2리 마을회관을 거쳐 다시 한강 좌안의 길을 따라 걸어 감동골부처울습지를 지났습니다. 이천시를 관통하는 복하천이 운반한 토사들이 쌓여 한강과의 합류점에 만들어진 감동골부처울습지는 꽤 넓어 보였습니다.
10시27분 상백교를 건넜습니다. 감동골부처울습지를 지나 복하천 위에 놓인 상백교를 건너 복대사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이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복하천 좌안 길을 따라 걸으며 복하천에서 유영하는 수많은 철새들을 보았습니다. 입춘이 지난 지 며칠 되었는데 길가의 가로수 벚나무는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우중충해 보였습니다. 계산1리정류장에서 오른쪽 동네 길로 들어서 강변에 자리한 계산리마애여래입상을 찾아갔습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주계신리마애여래입상’은 계산리리부처울이라는 마을의 한강면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있는 불상입니다. 옛날부터 뗏목꾼들이 찾아와 안전을 빌고 갔다는 이 불상의 아래쪽 바위에서 이곳 주민들도 가끔 강을 향하며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원만한 표정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이 불상에서 유독 돋보인 것은 옷자락에 완만한 우(U) 자형 주름이 있고, 가슴에는 속옷의 띠 매듭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상은 통일 신라의 불상 앙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포초골 미륵 좌불(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35호)과 도곡리 석불 좌상(경기도 유청 문회새 제160호)과 함께 여주 지역의 불교 조각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
강변에 자리해 전망이 일품인 계신리마애여래입상을 사진 찍은 후 삼신당으로 향했습니다. 온 길로 되돌아가 비닐하우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넘은 후 자전거 길이 나있는 제방길로 들어서자 빈 의자가 보여 가져간 샌드위치를 들었습니다. 마침 자전거를 타고 오신 노인분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940년생으로 이곳 여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분은 이명박대통령이 여주에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를 건설한 이래 이렇다 할 만한 홍수나 가뭄피해가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보다 8년 연상이신데도 건강하게 자전거 타기를 계속하는 이분의 건강이 부러웠습니다. 계장천 위에 놓인 장명교에 다다라 이분과 헤어졌습니다.
12시5분 장명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사거리에서 계장천 좌안길을 따라 걷다가 한강 좌안의 제방길로 다시 들어섰습니다. 한나절 내내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을 보지 못한채 강물만 보자 저도 모르게 우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강 건너 길쭉한 고구마 모양의 당낭리섬과 북쪽 끝의 이포교가 한눈에 잡혔습니다. 제방길이 끝나는 곳에서 계단길을 올라 강애산에 자리한 삼신당을 탐방했습니다.
삼신당(三神堂)은 풍농과 사업의 번창, 무병장수와 마을의 번영, 발전 그리고 그리고 이포나루 뱃길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삼신(三神) 즉 산신(山神), 성황신(城隍神)과 용왕신(龍王神)을 모신 제당(祭堂)을 이릅니다. 재난과 병마가 끊이지 않아 살기가 어려웠던 옛날에 이 마을의 촌장은 꿈에서 만난 도인의 말대로 산속 초가집에 사는 세 노인을 찾아가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자 세 노인은 기꺼이 도와주어 재난과 병마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삼신당을 지어 세 노인, 즉 삼신을 정성스레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삼신당이 건립된 것은 여말선초 시대인 6백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삼신당을 둘러본 후 이포시가지를 지나 한강 좌안의 이포나루를 들렀습니다. 강 건너 파사산성이 잘 보이는 이포나루터에는 커다란 ‘梨浦 나루터’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의 조포나루와 함께 4대 나루의 하나였던 여기 이포나루에 작은 배 한 척만 보여 썰렁했습니다.
13시30분 이포보 전망대에 올라섰습니다. 이포나루에서 이포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여강길은 자전거도 다닐 수 없는 길로 중간에 끊기는 것은 아닌지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이포대교에서 이포보로 이어지는 제방길은 짧아 이내 이포보에 다다랐습니다.
이포보는 여주의 상징 새인 백로의 날개 위에 알을 올려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 주변으로는 수중광장, 문화관광, 자연형 어도, 전망대 등 생태체험과 레저 및 여가 활동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해가 질 때쯤 다리에서 빛나는 조명과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경치가 일품이라는데 갈 길이 멀어 기다렸다가 보지를 못하고 자리를 떠야 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번 이포보 탐방을 마지막으로 4대강에 설치된 16개 보를 모두 가본 셈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의 존폐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철거된 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 금강의 세종보는 수문을 모두 열어 보에 담긴 물이 거의 없는 데다 토사가 보를 메워 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2022년11월 금강을 따라 걸을 때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 후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공도교를 건너는 중 눈에 확 띈 것은 다리 아래 수중광장이었습니다. 반원형의 계단을 만들어 강물을 흘려보내는 수중광장에 눈길이 간 것은 계단을 따라 흐르는 강물이 하얀 포말을 그리며 내는 물소리가 리드미칼하게 들려 저도 모르게 흥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포보전망대에 올라 이포보와 당낭의섬을 조망한 한강에서 벗어나 파사산성으로 향했습니다.
14시25분 해발230m의 파사산 정상에 올라 파사산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이포보의 공도교를 건넌 다음 여양로 위에 놓인 파사산연결 보도현수교를 건너 파사산성으로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랜만에 산을 올라서인지 시멘트로 포장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보도현수교를 출발한 지 반 시간이 채 못되어 파사산성에 다다랐습니다.
파사산성은 개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석성에 세월의 때가 전혀 끼지 않아 외관이 깔끔해 보였습니다. 남문터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둥근 성곽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성곽을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동문지를 거쳐 파사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당낭리;섬과 “백로의 날개 위에 알을 올려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이포보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남문터로 내려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개군면과 금사면 사이를 완만하게 S자를 그리며 흘러내려가는 한강을 조망했습니다. 강 건너 금사리의 벌판은 금사천이 실어 나른 토사들이 커브를 그리며 흐르는 한강물에 막혀 커브 안쪽의 양옆 강변에 쌓여 만들어진 전형적인 충적평야이다 싶어 눈여겨 보았습니다. 남문터를 지나 보도현수교에 다다른 시각이 14시51분이니 파사산성을 다녀오는데 1시간13분이 걸린 셈입니;다.
이번에 다녀온 여주 파사성에 대해서는 안내판의 소개글이 잘 설명하고 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여주 파사성은 남한강 등쪽에 있는 해발 230.4m의 파사산 꼭대기에 있는 들로 쌓은 성이다. 이곳은 한강의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성의 들레는 1,800m이고 최대 높이는 약 6.5m로 규모가 큰 편이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최근에 복원했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주요 지점에는 치(雉)와 포루砲樓) 터가 있으며, 동문과 남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남문터에서는 문루의 팔각 주춧돌과 불에 탄 성문의 혼적이 확인되었다. 성안에서는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여려 시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어 파사성이 오랜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婆娑王, 80~112년재위)이 쌓았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역에 속하였으므로 유사한 이름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한 결과 성안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성벽의 쌓기 방식, 성문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파사성은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성은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1592년(선조25)부터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남아 있는 성벽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것이며, 처음 쌓은 성벽은 성벽 하단부와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일부 확인된다.
파사성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워 고려 말의 이색과 조선 중기의 유성룡이 시로 남기기도 했다.”
보도현수교를 건너 한강 우안의 자전거길로 들어서 양평시내로 향했습니다.
15시13분 여주군을 벗어나 양평군에 첫 발을 들였습니다. 이포보에서 양평군의 초입인 개군면 상자포리까지 거리는 1Km가 조금 못 됩니다. 이포보를 지나 강폭이 넓어진 한강이 S자를 크게 그리며 흐르는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이포나루터바지선착장을 지나 남한강의 팔경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았습니다. 1경 두물머리, 2경 억새림, 3경 이포보와 수변공원, 4경 여주보와 물억새군락지, 5경 강천보와 황포돛대, 6경 단양쑥부쟁이 자생지, 7경 충주 능암리섬과 8경 탄금대와 용섬 등 팔경 중 양평의 자리한 1경 두물머리와 2경 억새림은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둘러볼 뜻입니다.
양평의 상자포리로 들어서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비석을 천주교양근성지임을 알리는 비석을 보았습니다. 개군추읍순교자를 기리는 비석에는 “추읍산 기슭 주변 개군면 주읍리는 병인박해 시기 순교한 정경승 베네딕토와 황 막달레나 부부의 거주지이며, 용문 지평 마당재는 1868년5월 순교한 민호원 라자로외 조종구 타대오(조서방)이 살던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의 천주교신자들이 무참하게 처형된 병인박해의 상흔이 이 시골에서도 남아 있으리라고는 천주교신자인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강변 길을 걸으며 기억해야 할 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으로, 6·25전쟁 당시 대대급 참전을 결정한 프랑스군을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4계급을 낮춰 참전한 분입니다. 양평군은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격퇴를 이끈 몽클라르 장군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군 참전인원 3,421명을 상징하는 3,421m로 조성하고 “몽클라르의 길'로 명명해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있습니다.
16시45분 하자포리 사거리의 개군레포츠공원입구에 다다라 26번째 한강 탐방을 끝마쳤습니니다. 겨울이 물러서고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 지나자 해가 많이 길어진 것이 실감되었습니다. 건물의 외관이 독특한 카페 이연을 지나 축구장에 이르자 한강으로 흘러드는 향리천이 길을 막아 이 하천을 따라 빙 돌아가야 했습니다. 개군레포츠공원을 끼고 돌아 향리천의 하포자리교에 다다랐습니다. 이 다리를 건넌 후 향리천 우안길을 걸어 도착한 개군레포츠공원입구에서 택시를 불러 양평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양평역에서 곧바로 문산행 전철에 올라 저녁 8시 전에 산본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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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驪州)하면 떠오르는 고려의 두 문인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 중기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선생이고, 또 한 분은 여말선초의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입니다. 두 선생 모두 여주에서 태어난 분은 아닙니다. 이규보 선생은 개성에서 태어나 강화도에서 세상을 뜨셨고, 이색 선생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여기 여강의 배안에서 타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주와 관련하여 두 분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 즉 여강(驪江)을 소재로 여러 수(首)의 시(詩)를 남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규보 선생은 여강의 서쪽 언덕에 자리한 영월루 아래 기암인 마암(馬巖)을 소재로 아래 시를 남겼습니다. 1988년 12월에 발간된『驪江文化』에 아래 시(詩)가 실려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
雙馬雄奇出水涯 웅장하고 기특한 쌍마가 물가에서 나오매
縣名從此得黃麗 고을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詩人好古煩徵詰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來往漁翁豈自知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알리
이 시에서 쌍마(雙馬)는 황마(黃馬)와 여마(驪馬)를 이르는데,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驪)'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색 선생이 여강을 소재로 해서 지은 시는 「반사단청반사시(半似丹青半似詩)」입니다. 이 시 역시 『驪江文化』에 실려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이 시의 시제(詩題)를 「여강미회(驪江迷懷)」로 적고 있습니다.
天地無涯生有涯 천지는 가이 없으나 인생은 가이 있구나
浩然歸志欲有之 호연히 돌아갈 뜻은 어디로 가려는가
麗江一曲山如畫 여강 한 구비에 산이 그림 같으니
半似丹青半似詩 받은 단청 같고 받은 시 같으이
이 시에서 감지되는 것은 여말선초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영욕(榮辱)의 일생을 산 이색 선생이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 같은 아름타운 여강을 바라보며 느꼈을 회한(悔恨)입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문학에의 향수를 일깨워준 여강(驪江)에 고마움을 표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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