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아신역-두물머리-양수역
탐방일자: 2026. 2. 21일(토)
탐방코스: 아신역-이든독-국수교-신원역-양수역-두물머리-양수역
탐방시간: 10시10분-17시57분(7시간47분)
동행 : 나 홀로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기도 양평군의 양수리에 위치한 두물머리를 들러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合流)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동안 양수리는 여러 번 가보았지만, 모두 다 그 근처 산을 오르기 위해 찾아간 것이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탐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소설가 박태순은 『강과 한국인의 삶』에 실린 소고 「한강」에서 한강을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의 백두대간 산골 샘물들을 끌어모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 녹색대지의 온갖 생명들의 젖줄이 되고, 이어서 메가폴리스 서울의 교통환경편의와 상수원역할을 충족시키면서 마침내 서해바다에 닿게되는 물줄기”라고 정의했습니다. 범박하게 말한다면 두물머리는 금강산과 설악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산과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한 물줄기가 되어 한강하구까지 흐른다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조선전(朝鮮傳)」에 조선에는 산수(汕水)와 습수(濕水), 열수(洌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증하면서, 열수는 한강 본류를 지목하는 것이 분명하다” 는 것을 확인했다고 박태순의 소고 「한강 」 에 적혀 있습니다. 정약용은 저서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북한강은 산수(汕水), 남한강은 습수(濕水), 두물머리에서 합류하여 고향인 남양주 마현을 흐르는 한강 본류를 열수(冽水)라고 했습니다. 정약용은 산(汕)이란 산곡(山谷)의 물을 뜻하고, 습(濕)이란 원습(原隰)의 물을 뜻하므로 북한강이 산수이고, 남한강이 습수이며, 두 강물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부터 열수라 불렸다고 밝히면서 고향을 열수 언덕에 있다고 하여 열상(洌上)이라 칭했습니다.
정약용의 지론에 따르면 두물머리는 단순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 아니라 차디찬 산수(汕水)와 습한 습수(濕水)가 만나는 곳입니다. 소설가 박태순이 소고 「한강」에서 언급했듯이 용진나루(두물머리 나루)를 복원하고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을 채취 분석해 다산이 말한 습수와 산수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 검증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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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강 따라 걷기는 산본 집에서 출발지인 경의중앙선의 아신역까지 전철로 이동했고, 한강 탐방의 도착지인 양수역에서 산본집까지 전철로 이동했습니다. 오가는 데만 4시간 반가량 걸려 전철 안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지만, 택시를 타지 않고 전철만 이용해 교통비는 한푼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국이 된 덕분이라고 생각하자 피와 땀흘려 이 나라를 이렇게 부국으로 만든 부모님 새대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오전10시10분 아신역을 출발했습니다. 아신역에서 하차해 북서쪽으로 3백m 남짓 걸어가자 삼거리가 보였습니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6번국도인 경강로를 그 아래 굴다리로 지나 아산5리버스정류 앞에서 남한강변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왕복2차선의 이 길은 6번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다녔던 구도로인 것 같은데, 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한가해 보였습니다. 10층(?) 건물의 호리호리해 보이는 J호텔을 지나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는 흰둥이를 보았습니다.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저를 보고도 눈만 껌벅이면서 짖지를 않는 것은 모처럼 휴일 아침 강변에 찾아온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아신대학교 후문입구를 지나 이든독연수원에 이르기까지 한강 우안의 남한강변길을 걷다가 잠시 강변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과 강 건너 마을 풍경을 완상했습니다.
한강하구 96Km전방지점을 지나 왼쪽 아래 수변공원으로 내려섰습니다. 데크다리를 건너 수변의 소공원을 돌아본 후 자전거길로 들어섰습니다. 한강 우안의 자전거 길을 따라 걸어 제탄3길을 만나는 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선착장 조금 앞에서 자전거길이 끊겼습니다. 카카오맵에는 강변 길이 대상1, 2리 마을회관을 지나 금강조경앞 3거리까지 이어진 것으로 나와 있는데 중간에 길이 끊어져 당혹스러웠습니다. 바로 위 제탄3길로 들어서 길을 찾았으나 실패해 6번국도를 따라 우회하기로 마음 먹고 복포리고개로 향했습니다.
11시53분 6번국도가 지나는 복포리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자전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카카오맵이 가리키는 대로 제탄3길을 걸어 복포리고개에 이르기까지 1.4Km 거리를 이동하는데 반 시간 남짓 걸린 것은 중간에 두 번 길을 잘못 들어 왔다갔다 해서였습니다. 6번국도를 따라 걸어 양평제빵소, 양평불한증막과 양평만남의 굉장을 차례로 지나 금강조경 앞 삼거리에 다다른 시각이 13시8분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다가 금강조경 건너 소공원에 앉아 쉴 만한 버려진 의자가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를 꺼내 들면서 바로 앞의 하중도인 거북섬을 조망했습니다. 한여름이라면 헤엄을 쳐서 건너갈 만큼 지근거리에 자리한 거북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가 물속에 드리워져 수변 정경이 몽환적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한강탐방을 이어가고자 6번국도로 들어섰습니다. 복포리고개에서 금강조경앞 삼거리까지는 인도가 따로 있어 전혀 위험하지 않았는데, 삼거리에서 들어선 6번국도는 인도교가 따로 없어 도로변의 갓길을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이내 복포천과 한강의 합류점인 국수교를 건너 거북섬 앞의 얼음장에서 쉬고 있는 새들을 사진찍는 동안 쉬지 않고 차들이 쌩쌩 지나 빨리 이 길을 벗어나고자 발걸음을 빨리했습니다. 조금 후 지나가는 경찰차가 멈춰서서 위험하다면서 저를 차에 태웠습니다. 한강을 따라 걷는 중인데 자전거길이 보이지 않아 이 길로 들어섰으며, 중간에 자전거길로 들어서는 곳을 만나면 바로 자전거길을 따라 걸을 뜻이라고 설명하자 경찰관은 저를 차에 태워 자전거길이 지나는 영서초등학교 앞에서 세워주었습니다.
13시24분 양서초교를 출발했습니다. 친절한 경찰관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하차해 양서초등학교를 지나는 자전거길로 들어섰습니다. 가로수인 메타세콰이어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나무는 자전거 길을 낼 때 같이 심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물차적재소를 지나자 자전거길은 한강우안에 바짝 붙어있어 한강의 얼음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강을 보고 놀란 것은 한강의 얼음이 강을 가로질러 일정 폭으로 녹아 있어서였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의 양가장자리는 얼음이 얼지만 강 한가운 데는 얼지 않아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번처럼 강 저쪽에서 이쪽까지 1m 가량의 폭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녹아 얼음장이 양분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신원역에 도착해 만난 의외의 인물은 노비 출신의 시인 정초부(鄭樵夫, 1714-1789)입니다. 시(詩)로써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정초부가 나뭇짐을 지고 걸었을 길을 복원한 것이 지겟길입니다. 지겟길이란 신원역을 출발해 월계주막-강한정-초당-구름나루전망대를 거쳐 힐링치유의숲 구간을 왕복하는 코스로 저도 이번에 이 지겟길의 신원역-울계주막-강한정 구간을 걸었습니다.
14시25분 신원역에서 800m가량 떨어진 몽양기념관을 들렀습니다. 양평이 낳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몽양기념관은 크지 않아 유명한 문인들의 기념관보다 작게 보였습니다. 몽양기념관 안내문에 몽양의 일생과 업적이 잘 요약되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여운형선생은 국권을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국외에서 신한청년당을 발기하고(1918), 파리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1919), 삼일 독립운동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였다(1919). 특히 제국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연설하고(1919),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1922), 세계지도자와 교유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은 다음에는(1929-1932),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를 경영하며(1933), 문학을 장려하고 체육 스포츠 진흥에 힘썼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는 손기정 에게는 조선인임을 잊지 말라고 격려하고 일장기를 지운 신문으로 손기정의 우승을 알렸다(1936). 해방이 다가옴을 느낀 선생은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대비하고(1944), 8.15해방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시켜91945), 건국의 전국적 기반을 다졌다. 남북분단에 반대하여 좌우합작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다가(1946),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터리에서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희생되었다.”
신원역을 출발해 묘골애오와공원과 몽양어록길을 거쳐 기념관과 교육자료관을 둘러본 후 생가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좌파인 여운형이 해방정국을 주도할 만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냐는 것입니다. 신복룡의 저서 『해방적국의 풍경에 따르면, 1946년7월22일자 동아일보는 한국인 6,6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지도 조사에서 이승만 29%, 김구 11%, 김규식 10%, 여운형 10%의 지지를 얻었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 결과를 보고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잠시 정국을 주도한 여운형이 몰락하고 뒤늦게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해방정국을 주도한 까닭이 바로 국민의 지지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몽양기념관에서 남한강자저전거길로 복귀해 한강 우안의 월계주막에 도착한 것은 14시45분이었습니다. 월계마을에 주막이 들어선 것은 월계원이란 역원(驛院)이 자리잡고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강변 쉼터로 자리바꿈한 월계주막터를 지나 들른 곳은 2층의 누정 강한정(江閑亭)입니 다. 문인들이 한강상류를 지나면서 거쳐가던 강한정은 광해군 폭정시대에 명사들이 은거하여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합니다. 제가 걷고 있는 길이 ‘계정초부지겟길’이라는 신원1리 안내판과 표지목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내 도착한 부용1터널을 지나 2,3,4 터널도 차례로 통과했습니다. 구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강 위에 세운 고가도로가 나 있고, 오른 쪽에는 터널이 연달아 뚫린 자전거길이 나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터널 길과 고가도로 중 어떤 것이 먼저 건설되었느냐인데, 터널을 뚫는 것이 물 위에 다리를 놓는 것보다 공사가 쉬워 먼저 터널길을 냈을 것 같습니다. 부암1,2,3,4터널을 지나 마지막으로 통과한 터널은 용담터널입니다.
16시45분 양수역을 지났습니다. 용담터널을 출발해 한강하구85Km 전방지점을 지나 양수역에 이르자 그새 기온이 내려가서인지 한기가 느껴져 웃옷을 껴입고 두물머리로 향했습니다. 두물머리로 가는 길에 양수리의 명소인 세미원을 들러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옛 성현의 말씀에 기원했다는 세미원(洗美苑)은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난 연꽃을 주로 식재해 계절에 맞도록 꾸민 정원입니다. 제철에 왔으면 보았을 연꽃이 보이지 않아 공원 전체가 스산했습니다. 국사원과 장독대분수를 휘 둘러 본 후 백련지와 홍련지를 거쳐 세족대에 이르는 길이 비교적 한산했던 것은 아직은 연꽃이 꽃을 피울 때가 아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신양수대교를 밑으로 지나 세한정을 잠시 둘러본 후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이어주는 세미원배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 앞 안내판에 세미원 배다리는 아래와 같이 소개되었습니다.
"세미원 배다리는 정조대왕의 효심과 정약용 선생의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중요한 통로로 관광객이 우회하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설치했다. 2012년 7월 21일에 처음 설치했고, 2024년 4월 12일에 재설치했다. 배 한 척은 강의 상류를 향하고, 한 척은 하류를 향하도록 하여 서로 교차시켜 가면서 늘여 세웠다. 강안 양끝에는 각각 홍살문을 세워 왕의 행차에 대한 권위와 경건함을 상징하는 문을 설치했다. 각 배에는 조선시대 군대를 지휘하는데 사용한 오방기(五方旗)와 고초기(高招旗)가 걸려 있다. 제작과정에는 역사 문헌인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의 주교도와 노량주교도섭도를 최대한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세미원 배다리는 1795년 조선후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화성 현륭원(顯隆園) 을 참배하기 위해 서용보, 정약용에게 지시해 한강에 설치됐던 주교(舟橋)를 재현해 만든 것으로, 물과 꽃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세미원과 남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선박 44척을 이어 다리 형태로 연결했다.”
배다리를 건너 군밤을 사 요기를 한 후 두물머리로 향했습니다. 17년 전 한남행자지맥을 종주할 때 올랐던 강 건너 정암산이 잘 보이는 두물머리에는 400년된 느티나무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북한강의 만남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두물머리의 또 다른 명물은 ‘두물머리 돛단배’입니다. 길이 16m, 너비 3m, 높이 8m의 이 배는 전통적인 돛단배로 돛의 색깔이 누렇다 하여 황포돛배로 불리기도 합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두물머리나룻터는 남한강 수운의 마지막 정박지이자 남한강 물류의 집합지였으며 또한 옛 양근 지역이던 광주분원과 생활권을 이루었던 나루터였습니다.
17시57분 양수역에 도착해 28차 한강탐방을 마쳤습니다. 두물머리를 출발해 양수역에 이르기까지 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녁이 되자 빠르게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양수역에 도착해 곧이어 문산행 전철을 타고 산본 집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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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시(詩)로써 신분의 벽을 넘은 분은 많지 않습니다. 손종흠 · 안대희 두 교수는 공저한 『한국한문고전강독』에서 이런 분들의 시 4편을 소개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4명의 문인은 이달, 정초부 백대붕과 이단전등입니다. 서얼출신의 이달(李達, 1539-1612)은 허균의 스승으로 한시 「佛日庵贈因雲釋(불일암증인운석)」를 지었는데, 특히 당풍(唐風)의 한시를 잘 지어 최경창, 백광운과 더불어 3당 시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천민출신의 위항 시인(委巷詩人) 백대붕(白大鵬, 1550-1592)은 같은 천민 출신인 유희경과 함께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렸으며, 한시 「秋日(추일)」을 남겼습니다. 노비출신의 이단전(李亶佃, 1755~1790) 은 연암 박지원의 절친한 친구로 한시 「題關王廟(제관왕묘)」를 남겼습니다. 노비 출신의 정초부(鄭樵夫, 1714-1789) 는 면천(免賤) 후 양평의 월계에서 땔나무를 해서 한양에다 팔아 생계를 유지한 나무꾼으로 꾸준히 시를 지어 한시 「東湖(동호)」를 남겼습니다.
이번 한강 따라 걷기는 양평의 아신역에서 출발해 신원역과 두물머리를 차례로 거쳐 양수역에서 마쳤습니다. 이번 한강 탐방이 뜻깊었던 것은 신원역을 지나면서 조선 후기 노비 출신의 시인인 정초부와 대화를 나누어서였습니다. 제가 정초부를 만난 것은 십수 년 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할 때 그의 시 「東湖(동호)」를 감상했을 때입니다. 그때 배우기로는 정초부는 영조시대에 살았으며, 참판을 지낸 여씨집안의 노비였습니다. 그의 한시 공부는 주인집 아들이 책을 읽는 것을 부러워하여 구경하는 것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나무하는 틈틈이 시(詩) 짓기를 즐긴 정초부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진 것은 그의 시가 너무 훌륭해서였다고 합니다. 정초부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지나는 길에 찾아갔으나 마침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서 만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이름난 시인였다고 『한국한문고전강독』은 전하고 있습니다.
정초부의 생애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안대희교수가 2011년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軒適集)』을 찾아냄으로써 알려졌습니다. 물푸레 마을인 수청리 청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초부는 자가 운보이고 본명이 정이재(鄭彛載)로, 이명으로는 정초부, 월계초부, 수청초부 등이 있습니다. 참판을 지낸 함양여씨 여동식(呂東植) 집안의 노비였던 정초부가 면천된 것은 자애로운 주인 여춘영이 그의 시재(詩才)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면천 후 양평의 월계에서 나무를 해다가 한양에 내다 파는 나무꾼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주옥같은 명시를 남긴 천재 시인 정초부는 주인의 소개로 당대의 고관대작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신광수 외에도 수원부사 김상묵 등 많은 사대부들이 정초부를 만나고자 수청리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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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시는 정초부가 지은 칠언절구의 한시 「東湖(동호)」입니다.
東湖春水碧於藍 (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
白鳥分明見兩三 (백조분명견양삼) 백조 두세 마리 뚜렷하게 보이네
搖櫓一聲飛去盡 (요노일성비거진)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없고
夕陽山色滿空潭 (석양산색만공담) 석양의 산색이 강물에 가득하네.
위 시는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산수화 「渡江圖(도강도))」에 화제(畫題)로 들어가 있는 시입니다. 손종흠 · 안대희는 이 시를 두고 “자연의 색깔과 고요하고 맑은 고즈넉한 공간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인의 정서가 한 폭의 그림으로 형상화한 느낌을 준다.”라고 평했습니다. 또 이 시는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따뜻한 봄날에 땔나무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인이 지금의 동호대교 부근인 동호 어딘가에서 한강의 아름다운 저녁 풍경에 홀려서 읊은 것으로 보인다.”고 느낀 바를 말했습니다.
사족을 붙인다면 정초부는 땔감을 팔려고 월계에서 한양으로 걸어가면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 같습니다. 지고 가는 나뭇짐이 무거워 힘들더라도 아우라지에서 한양까지 뗏목을 실어 나르는 뗏목꾼의 노고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시심(詩心)이 일었을 것 같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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