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산(3)
*산행일자:2015. 5. 1일(금)
*산높이 :파평산 동봉457m/정상495m
*소재지 :경기파주
*산행코스:파평산체육공원-봉영사갈림길-벙커 위
-파평산동봉-샘터-사방댐-임진강폭포어장
*산행시간:11시22분-16시45분(5시간33분)
*동행 :경동고 동문8명
(24회 이기후, 이규성, 김주홍, 김종화, 조현,
우명길, 29회정병기/김의정 부부)
서울에서 이사를 갈 만큼 제 고향 파주(坡州) 땅이 살만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휴전선과 인접해 있어 원천적으로 개발이 불가능했던 파주 땅에 5층 이상의 아파트가 올라간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로 기억합니다. 1980년대 파주에 살고 있는 시골의 형님도 젖소를 치려고 목장을 지을 때 각종 규제 때문에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주둔 미군이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남북긴장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파주 땅은 개발이 지속되어 몇 년 전 운정 지구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철로 바뀐 경의선이 작년부터 문산에서 용산을 거쳐 용문산역까지 이어져 교통 또한 엄청 편해졌습니다.
한북정맥을 같이 종주한 이기후 동문이 서울에서 파주 땅 운정으로 이사를 간 것은 작년의 일입니다. 어제 이 친구의 파주이전을 기념하기위해 고교동창 몇 명이 모여 파평산(坡平山)을 올랐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파주를 떠난 저는 한수 이남의 산본에서 살고 있는데, 충북 단양이 고향인 이 친구는 서울에서 한수이북의 파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파주 땅이 여러 모로 살만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친구의 파주이전이 고마워 파평산 산행을 주선했습니다.
집결지를 문산역으로 정하고 친구들을 10시30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가 반시간 가량 늦게 도착해 버스로 이동하겠다는 계획을 바꾸어 택시를 탔습니다. 파평산체육공원으로 가는 길에 파평윤씨의 시조설화가 담긴 용연(龍淵)을 들러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버스로 오가며 몇 번 보았던 용연을 이번에 처음 자세히 보았습니다.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용연(龍淵)은 파평윤씨의 시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설화가 깃든 곳입니다. 파평윤씨의 시조는 신라 진성왕 때의 인물 태사공 휘(太史公 諱)인 신달(莘達)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연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파가 떠오르는 옥함을 열어보자 오색 깃털에 싸인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합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으로 책봉된 신달로 파평윤씨의 시조가 됩니다. 고려 때 여진 족의 침략을 막은 윤관 장군과 일제강점기에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일본인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의사, 그리고 조선조 세조의왕비 등이 파평윤씨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파주 땅을 본으로 삼아 명문가를 일군 일가가 파평윤씨 외에 또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저 같은 파주사람들에는 용연이 소중합니다.
오전 11시22분 파평산체육공원을 출발했습니다. 체육공원에서 하차해 곧바로 들머리로 향했습니다. 약도가 그려진 안내판에서 산행코스를 설명한 후 남동쪽으로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몇 분후 오른 쪽으로 봉영사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러 직진코스로 올랐습니다. 철문을 지나고 사방댐 위를 건너 왼쪽 산길로 들어선 후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산행은 코스도 길지 않고 급할 것이 전혀 없어 느릿느릿 완보로 오르다가 1시간도 못 되어 길가에 자리 잡고 한참동안 쉬었습니다.
12시45분 벙커 위를 지났습니다. 점심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고 산 오름을 계속 했습니다. 능선 길을 따라 오르며 한 번을 더 쉬어 벙커 위에 올라섰습니다. 한가운데 환기구가 설치되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공터로 보이는 벙커 위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여 전망대로 손색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늘노천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임진강은 흐릿하게 보였지만 지근거리의 송악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주 광탄의 선산에서도 잘 보이는 송악산이 더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불청객 황사 때문일 것입니다. 그나마 북쪽 아래로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늘노천이 내려다보여 다행이었습니다.
14시5분 해발 파평산 동봉에 올랐습니다. 벙커 위에서 평화의 쉼터까지 오름길이 계속됐습니다. 왼쪽 정자에 한 부부 팀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왼쪽 평화의 쉼터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김종화 동문이 정성스레 준비한 반찬들이 돋보인 이번 점심의 주 메뉴는 김밥으로 여느 때보다 조촐했지만, 긴 시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맛있게 들었습니다. 임도를 걸어 오르다 나무계단 길을 따라 올라 다다른 동봉에도 정자가 들어서있어 이곳에서도 반시간 가까이 푹 쉬었습니다. 감악산과 한북감악지맥, 그리고 한북감악파평분맥 상의 비학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동봉에서 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 막혀 있어 해발495m의 파평산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하산했습니다. 평화의 쉼터로 되 내려가 정자 앞에서 오른 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15시1분 샘터에서 또 다시 쉬었습니다. 오름 길에 지나쳤던 야생화들에 눈인사를 하게 된 것은 김종화 동문 덕분입니다. 야생화들의 이름과 그 생태를 자세히 알고 있는 이 친구가 자세히 알려주어 가던 길을 멈추고 야생화 몇 종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그늘진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하산 길이 더욱 여유로웠습니다. 산 중턱에 벤치 몇 개를 설치하고 돌탑도 여러 개 쌓아 놓은 샘터에서 잠시 쉬면서 떠 마신 샘물이 생각만큼 차가워 뼈 속까지 시원한 듯했습니다. 샘터에서 연초록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 왼쪽 옆 계곡으로 옮겨 탁족을 했습니다. 아직 봄이 지나지 않았는데 초여름을 방불할 만큼 기온이 높아 계곡물이 그다지 차갑지 않았습니다.
16시45분 임진강폭포어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끝냈습니다. 탁족을 마치고 조금 내려가자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사방댐이 보였습니다. 산행코스가 그려진 대형안내판과 마을을 지나 늘노천 위에 놓은 샘내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늘노천의 북쪽 뚝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가 임진강폭포어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잘 꾸민 어장에서 횟감으로 길러지는 철갑상어 등의 물고기를 사진 찍은 후 바로 앞 37번 도로변의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문산 행 92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 버스가 장파리를 들러 1950년대 후반에 제작된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의 주 무대를 일별했습니다. 문산 읍내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귀가 길에 올랐습니다.
이번에 걸은 뚝방 길 아래 늘노천은 법원읍 직천리의 수레너미고개 아래에서 발원해 직천저수지를 거쳐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임진강의 제1지류로, 우리가 이번에 오른 파평산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에돌아 흐릅니다. 큰 누님이 시집간 곳이 늘노리여서 어렸을 때 누님 댁에 놀러가 늘노천 갯가에서 물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매형께서 이 하천에서 손수 잡은 가물치 몇 마리를 장모께 드리고자 시골집으로 가져오신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꽤 오래전 누님께서 서울로 이사를 가셔, 그 후로 늘노리를 우정 찾아간 일은 없지만, 이곳을 지날 때면 큰누님이 생각납니다. 어렸을 때 저를 업어 기른 큰누님은 제게는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많이 그리울 때는 지금도 큰누님께 전화를 드립니다.
<산행사진>
파평산(2)
*산행일자:2009. 7. 10일(토)
*소재지 :경기파주
*산높이 :496m
*산행코스:미타사입구-안부사거리-파평산정상(서봉)
-금곡리고려개발입구
*산행시간:9시36분-13시49분(4시간13분)
*동행 :나홀로
이번에는 하산 후 파주 명소 몇 곳을 들러보고자 파주의 파평산(坡平山)을 올랐습니다.
파평산(坡平山)의 파평(坡平)이 문자 그대로 고개(坡)를 평평하게(平) 만드는 것을 뜻한다면, 한 가지는 맞고 또 하나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선 맞지 않는 것은 고개를 평평하게 했으니 이 산 아래로 넓은 벌이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파평산의 산자락들이 내려선 곳에서 아주 가까이에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어 평야가 들어설 공간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여기 눌노리나 장파리의 파평벌보다 곡릉천변의 교하벌이나 문산천유역의 파주벌이 훨씬 넓게 파주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 맞는 점은 고개를 평평하게 했으니 파평에 이렇다 할 고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파평은 물론 파주 땅 어디에도 고개다운 높은 고개가 하나도 없으니 이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봄 수필가로 문단에 막 등단한 동향 선배 청파 윤도균님은 “한국의 산하”사이트에 올린 산행기에서 파주에는 이렇다 할 고개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 또한 고양에서 파주로 넘어오는 고령산 줄기의 됫박고개만 그 높이가 200m를 넘을 뿐 파주 땅 안으로 들어와서는 100m 넘는 고개도 몇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파평(坡平)하면 파평 윤씨(坡平 尹氏)를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것 같습니다.
네이버의 “지식in”에 올라온 파평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 중 파평 윤씨와 관련된 것들이 제일 많아 보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파평산 북쪽 자락에 위치한 연못 용연(龍淵)이 신라 진성왕 7년인 893년에 파평윤씨의 시조인 신달이 태어난 곳으로 널리 알려져서겠지만, 그보다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고려조의 명장 윤관장군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에 이르기까지 파평 윤씨 가문에서 이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덕분일 것입니다. 제 고향이 파주(坡州)로 불리는 것도 기실 파평 윤씨 덕분입니다. 고구려 때 솔이홀현이 삼국통일 후 봉성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때는 서원현으로 고쳐 불렸고, 조선조 태종 때에 이르러 원평도호부로 지명이 바뀐 곳이 지금의 파주 땅입니다. 수양대군의 부인은 파평에 살고 있던 파평윤씨 윤번의 따님이었는데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이 분은 정희왕후가 되셨습니다. 그 후 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원평도호부를 높이 부르고자 파평 고을의 파주목(坡州牧)으로 고쳐 부른데서 지금의 파주(坡州)가 시작됐다합니다. 그렇기로서니 국내 제1 포털사이트의 지식in 란에 파평이 어느 곳에 있고 그 지리적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찾아보기 힘든데 어느 한 명문 가에 관한 질문이 수두룩하게 많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UN의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 내 노라 하는 선진국들과 어깨를 같이하는 OECD의 당당한 회원국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주요관심사가 이러한 국가위상에 맞지 않게 아직도 명문가의 내력을 알아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세계화를 주도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을까 싶어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오전9시36분 미타사입구를 출발했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오전 9시 반이 조금 못되어서 파주의 법원리 사거리에 도착했습니다. 7-8분을 기다려 적성 행 버스에 올라타 두 번째 고개인 노패고개를 막 넘어 내려선 곳이 미타사 입구의 삼거리였습니다. 치마대 사적지를 가리키는 돌비석이 초라하게 서있는 미타사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남자 두 분이 묘지를 손보고 있는 첫 번째 고개를 넘자 왼쪽으로 아직 봉분이 들어서지 않는 묘역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른 쪽 아래로 군부대가 들어앉았습니다.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판에 주눅이 들어 쉬엄쉬엄 사진도 찍지 못하고 땡볕을 쪼여가며 달아오른 시멘트 군사도로를 마냥 걸어 오른 다는 것이 적지 아니 짜증스러웠지만, 이 또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고 좋아서 하는 것이기에 팔자려니 생각하자 짜증기가 많이 가셨습니다. 대형거울이 세워진 커브 길 몇 곳을 지나 산행시작 50분 만에 “미타사_ KM"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안부사거리에 도착했습니다.
10시27분 안부사거리에서 오른 쪽 아래 흙길의 도로로 내려섰습니다.
왼쪽 위로는 정상으로 가는 차도가 이어졌고, 오른 쪽 위로 난 길이 동봉으로 향함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정상가는 길을 잠시 접고 오른 쪽 아래로 내려선 것은 이 길이 미타사로 가는 길로 착각해서였는데 이 바람에 1시간 넘게 헛걸음을 했습니다. 완만한 흙길을 따라 한 참 동안 내려가 만난 것이 군부대취수장 건물인 듯싶었습니다. 이곳에서 흙길은 끝나고 까까비탈에 낸 시멘트군사도로가 오른 쪽으로 꺾여 130m 높은 곳의 산등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미타사가 들어설 마땅한 공간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알아챘는데도 굳이 고집 부리고 길 끝까지 올라간 것은 순전히 길 끝에 무엇이 나타날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비알도 이런 된비알이 없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데다 시멘트도로를 낸 것은 길 끝 산등성에 군부대가 들어있어서였는데, 어느 한 분이 군부대 조금 못가서 폐타이어 길을 따라 동봉을 올랐다 함은 나중에 안 것이고, 군부대 울타리까지 올라 미타사 가는 길이 아님을 최종 확인하자 안부사거리로 되돌아가는 길이 정말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취수장으로 다시 내려와 그늘 진 길가에서 처음으로 짐을 풀고 10분여 쉬었습니다. 미타사 입구에서 올라올 때는 이 산 정상인 서봉이 더부룩하게 보였는데 안부사거리로 되올라가는 길에서는 꽤나 정연하게 보였습니다. 알바를 해도 이번 산행코스가 워낙 짧아 흙길을 걸으며 수더분한 모습의 야생화들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인사를 할 정도로 제 마음이 여유로웠습니다.
11시36분 안부사거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을 걸어 얼마 후 커브 진 곳에 이르자 오른 쪽 아래로 미타사로 가는 길이 나 있었습니다. 꽤 가파른 돌계단 길을 걸어 내려가 만난 미타사는 세상에 이런 절도 있나 할 정도로 초라하고 지저분했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서기1095년에 창건된 이 절은 6.25 때 전소된 후 1997년에 혜정선사께서 중수했다는데 어찌해서 동구의 금강사에서 옮겨 모신 아미타불을 군부대의 임시 막사 같은 초라한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고 주변도 공사가 덜 끝난 곳처럼 어수선하게 변했는지 몰라도 900년이 넘는 긴 세월에 이 절이 겪었을 환난이 어떠했을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여러 기의 돌탑과 오층 석탑이 없었다면 사이비굿터로 오인받기 십상이어서 저 아래 들머리에 세워진 커다란 표지석과 미타사 전용 주차장 아래 영어로 병기한 일반 차들의 주차를 금한다는 내용의 경고판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미타사에서 다시 올라와 시멘트 길을 따라 계속 오르자 왼쪽으로 길이 확 꺾이고 곧바로 군부대 정문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대로 정문에서 아래로 되 내려가 이 군부대를 오른 쪽으로 에도는 교통호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직도 지난 가을에 다친 허리가 다 낫지 않아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는 중이어서 전날 내린 비로 교통호 길이 미끄러워 엄청 신경이 쓰였습니다.
12시37분 해발496m의 정상인 서봉에 올라섰습니다.
교통호 길로 군사기지를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아 정상에 올라서자 두해 전 한북감악파평분맥을 종주할 때 몇 번이나 길을 잃는 악전고투 끝에 해가 막 질 무렵 간신히 이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어둠에 쫓겨 서쪽의 임진강변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동쪽의 노패고개로 되 내려간 생각이 났습니다. 정상 대부분을 군사기지가 차지하고 있고 그나마 접근이 허용된 남쪽 귀퉁이는 풀숲이 우거지고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군부대 경고가 없었더라도 조망이 별로여서 어느 한 곳도 카메라에 옮겨 실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동쪽으로 비학산만 보일 뿐 북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는 감악산조차도 보이지 않았으며 서쪽으로는 파평분맥이 지나는 임진강변의 박석고개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리 몸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이번에도 노패고개로 하산하기로 하고 이내 정상을 떴습니다. 바로 아래 무인산불감시초소까지 가는 길도 풀숲을 헤치고 가야했고 감시초소에서 제 길을 찾기까지 십 수m도 그런 풀숲을 뚫고 가느라 잠시 애를 먹었습니다. 정상에서 노패고개까지는 이미 한번 오르내린 길이어서 길 잃을 염려가 전혀 없어 마음 놓고 하산했습니다.
13시49분 법원읍의 금곡리로 하산해 4시간 남짓 걸린 파평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까지 방심이 낳은 알바를 족히 십 수번은 겪었는데도 이번에도 방심해 빤한 길을 놓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노패고개로 하산하지 못하고 그 남서쪽의 파평면과 맞닿은 법원읍 금곡리로 내려가 고려개발 앞 8번도로에서 하루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정상에서 노패고개로 하산하는 파평분맥 능선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아주 희미했습니다. 십 수분 후 임도다 싶은 길을 만나 그 길로 몇 십m를 내려가자 넓은 길이 끝나고 왼쪽 아래로 표지기가 보였습니다. 이 표지기를 눈여겨보지 않고 편안한 능선 길을 따라 직진해 두 번째 알바를 불러들였습니다. 하산 후 자세히 지도를 보니 표지기가 가리키는 왼쪽 아래 급경사 길이 노패고개로 가는 제 길이었고, 제가 진행한 직진 길은 동쪽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이내 방향을 바꾸어 남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해발고도 300m 쯤 되는 지점에서 나침반을 꺼내보고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갈림길에서 이미 한참동안 내려온 터라 그냥 이 길로 하산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산줄기를 이어 밟는 선(線)의 산행이었다면 당연 갈림길로 복귀해 제 길로 들어서야 맞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종주산행이 아니고 어느 한 산을 정해놓고 오르내리는 점(點)의 산행이어서 설사 다른 길로 하산해도 안전만 하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안 가본 길을 걷는다는 설렘까지 더해져 조심해서 새길로 능선을 따라 하산했습니다. 종종 사람 다닌 흔적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암릉 길이 아니고 완만한 능선 길이어서 하산 길을 이어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묘지가 바로 아래로 보이는 전나무 숲에서 점심을 든 후 묘지를 지나고 야생화들이 화원을 이루고 있는 풀밭을 가로질러 밭가 큰 길로 내려섰습니다. 골재채취장인듯한 고려개발 입구를 지나 법원읍과 파평면을 경계 짓는 작은 내가 가로 질러 흐르는 8번도로에 다다랐습니다. 8번 도로에서 법원리 행 버스를 타기 위해 500m 가량 걸어 금곡1리 삼거리로 나가야했는데 마침 파평산을 오르고자 미타사입구를 찾는 젊은 부부가 길을 물어와 길 안내를 해주었더니 고맙게도 이분들이 차를 태워주어 삼거리로 나가 법원리행 버스를 탔습니다. 귀가 길에 파주 명소인 법원읍의 자운서원을 들른 후 적성면의 두지 나루에서 황포돛대를 타고 임진강을 유람하느라 밤10시가 넘어 산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가을 추락사고 후 기가 많이 꺾인 것은 사실입니다.
요즈음은 난코스의 암릉 길은 근접을 안 하고 알바를 할 만한 길을 잘 모르는 산은 아예 오르지를 않습니다. 이직도 다친 허리가 다 나은 것이 아니어서 혹여 또 다시 미끄러지거나 넘어진다면 다시 산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조금도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알바는 참으로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알바를 이겨내 이번의 알바가 제게는 오히려 잃었던 기를 되살린 좋은 기회였습니다. 길을 잘 못 든 지 한참 후에야 알바를 알아차리고도 무섭다가나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짜릿한 여유까지 느껴져 이만하면 알바를 지나치게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망가진 몸과 잃었던 기를 조금씩 되찾는다면 가을 늦게부터 중단한 정맥종주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지자 가슴이 콩닥 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고향 땅 파평산은 제게 기를 다시 불어준 고마운 산입니다.
<산행사진>
잘보고 갑니다.안전 산헹 하시고요~~부인에 셋인데 한꺼번에 합장도 하는가 보군요.지방마다 야간씩 틀리는군요.
- 시인마뇽
- 2009.07.13 15:19
- 자세히 보니 그러네요. 안전산행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파평산(1)
*산행일자:2007. 5. 17일
*소재지 :경기 파주
*산높이 :파평산495m/비학산450m
*산행코스:오현리고개-390봉-비학산-개목이고개
-노파고개(350번지방도)-파평산-노파고개
*산행시간:9시30분-19시7분(9시간37분)
*동행 :나홀로
고향 산이라 해서 마냥 자비롭지만은 않았습니다.
별반 높지도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산들을 고향의 산이라고 찾아주는 것은 고마워할 일이지만 세심한 준비 없이 덜렁대고 산행하는 것만은 설사 고향 사람이라 해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산 버릇을 혼을 내주어 새롭게 뜯어 고칠 요량으로 고향 산이 제게 든 회초리는 다른 산들보다 더 아팠고 매서웠습니다. 지도에 마루금도 정확하게 긋지 않고 종주를 하겠다고 덤벼든 제게, 또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가를 꼼꼼하게 챙겨 보지 않고 덜렁대며 내달리는 제게 고향의 산들이 들은 채찍은 단호했습니다. 9시간 반 동안의 산행 중 길에서 헤매도록 한 채찍의 시간이 무려 3시간이 넘었습니다.
고향의 산들은 제게 끝까지 가혹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채찍을 달게 받은 제게 다른 곳의 산들처럼 아예 내치어 산 밑으로 쫓아버리지 않고 길을 내주었습니다. 길 찾느라 기진맥진해 이제는 포기하자고 마음먹는 순간 다시 일어서 내달리라고 등 두들기며 살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길로 목적했던 산을 올랐음을 고마워하는 제게 고향의 산들은 파평산 정상에서 단맥의 끝 지점인 임진강으로 하산하는 마지막 길만은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둠을 불러들여 임진강행을 막아 선 파평산에 조만간 다시 올라 미답의 마지막 구간을 기필코 밟겠노라고 약속하고 오른 길로 하산해 하루 산행을 마감했습니다. 이렇듯 고향 산들이 제게 든 회초리는 제 잘못에 한 치도 더함도 덜 함도 없는 꼭 그만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역시 고향 산은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했습니다.
한북감악지맥의 노고산에서 갈라져 북서쪽으로 뻗어나가며 400m대의 비학산과 파평산을 일군 후 임진강으로 침잠하는 산줄기를 한북감악파평단맥이라 이름붙이고 손수 답사한 신경수님의 산행기와 제가 마루금을 대충 그려 놓은 5만분의 1 지형도를 챙겨 저 혼자서 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산객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이름 없는 산들이지만 고향의 산들이어서 설레는 가슴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밤사이 내린 비로 막 목욕을 끝낸 듯이 싱그러운 숲 속이 어서 들라고 손짓하는 시발점 노고산은 군부대가 들어서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북서쪽으로 얼마 떨어진 오현리고개에서 단맥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아침9시30분 오현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의정부가능역에서 32번 버스를 갈아타고 금촌 방향으로 가다가 법원리 못 미쳐 오현리고개 군부대 앞에서 하차하면 오른 쪽 바로 옆에 삼거리가 있는데 단맥 길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따라 났습니다. 4-5분후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진행하다가 마루금이 부대 안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대는 동도라지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몇 집을 지나서 왼쪽 산길로 접어들어 묘지를 지나고 3-4분 후 부대에서 빠져나온 단맥 길에 올라 오른 쪽으로 꺾어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런 표지가 없는 들머리를 눈짐작으로 들어서 다시 마루금을 밟은 것만으로도 1차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싶어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둥굴레 꽃들이 막 피기 시작한 능선 길을 따라 가다 십자안부를 조금 지나서 법원리/동두천성당의 신도들이 걸어놓은 “신암-갈곡공소도보순례”표지기를 보았습니다. 둔덕을 올라 잠시 그대로 직진했다가 다시 둔덕으로 돌아온 시각이 10시 17분으로 경미한 첫 번째 알바가 더 큰 알바를 조심하라는 경고였음을 깨달은 것은 하루 산행을 다 마치고 나서였습니다.
10시53분 초리골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합류해 오른 쪽의 390봉으로 향했습니다.
되돌아온 둔덕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오른 쪽 아래로 인삼밭이 있는 임도로 내려섰다가 이내 왼쪽의 산소가 있는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10여분을 걸어 다다른 능선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해 참호가 파진 낮은 봉우리 삼거리에 오르자 포성이 멈췄습니다. 56년간 끊겼던 경의선과 동해선을 다시 이어 철마가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다고 축포를 터뜨린 같은 시간에 북쪽의 진의를 손 틈만치도 믿지 못하는 저로서는 서부전선에서 차분히 훈련하는 포격 소리가 우리 군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봉우리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을 잡아 연탄재가 내버려진 안부사거리로 내려섰다가 무명봉을 하나 넘어 "등산로/샘골동도라지 0.6Km" 이정표가 세워진 안부에 다다르자 하늘 높이 치솟은 푸르른 낙엽송이 저를 반겼습니다. 직진 길 등산로는 몇 걸음 안 걸어 왼쪽아래 초리골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만났고 오른 쪽 멀리 비학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작년 7월 된 비를 맞으며 고향 선배이신 청파님과 함께 걸은 낯익은 길이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넓은 공터의 풀 숲길을 지나고 십 수분을 더 걸어 오른 통나무쉼터 둔덕에서 짐을 내려놓고 모처럼 15분간 긴 시간을 편히 쉬었습니다.
12시10분 해발450m의 비학산을 올랐습니다.
통나무쉼터에서 삼각점이 세워진 390봉에 이르는 길이 비알 길이었지만 비 그친 뒤 촉촉한 흙길을 밟는 발끝의 감촉이 편안하게 느껴져 힘든 줄 몰랐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390봉은 이 산 최고의 전망지여서 뒤쪽으로 노고산, 불곡산, 북한산, 고령산이 차례로 눈에 잡혔고 지난달에 종주한 한북감악금병단맥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왼쪽으로 잠시 내려섰다 다시 오른 대피소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금곡리임도를 만났습니다. 임도에서 똑바로 치올라 벙커 위 450봉인 비학산에 올라선 것까지는 깔끔한 산행이었는데 이 다음부터가 산행기로 남기기에 부끄러울 만큼 뒤죽박죽 엉망이었습니다. 다시 대피소로 돌아가 삼거리 평상에서 김밥을 든 후 신경수님의 산행기를 꺼내 다시 읽다가 마루금이 비학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짐을 발견하고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땡볕에 금곡리임도를 다시 지나 비학산에 올라선 시각이 13시3분이었으니 점심시간을 빼더라도 반시간은 족히 알바를 한 셈입니다. 이번 알바도 예고편에 불과했고 30여분 후 더 큰 알바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15시 정각 첫 번째 헬기장을 지나 바로 위에 있는 한 봉우리에 주저앉아 1시간 23분 동안의 긴 알바를 반추했습니다. 다시 오른 비학산은 나무들에 가려 전망이 별로여서 쉬지 않고 직진했습니다. 7분 후 길 왼쪽 북서쪽으로 시야가 탁 트이는 바위에 올라 파평산을 카메라에 담은 후 시꺼멓게 불에 탄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능선 길을 지나 헬기장에 다다르자 전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직천리저수지가, 그 너머로 감악산이 선명하게 보였고 왼쪽 가까이에 법원리 시가지와 그 뒤로 문산 하동의 임진강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무명봉에 올라선 시각이 13시 37분으로 이 때부터 본격적인 알바가 시작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산행기에 적힌 대로 등산로를 버리고 왼쪽 길로 들어서 얼마고 내려갔는데도 길이 나오지 않아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닌 듯싶어 다시 올라와 등산로를 따라갔습니다. 이내 두 번째 헬기장이 나타났고 조금 후 넓은 평상이 놓여진 십자안부에 다다라 잠시 쉬었습니다. 왼쪽 하산 길은 안개목이 길이고 직진 길은 4코스정상 행이라는 표지목의 안내를 보고 직진해 앞에 보이는 꽤 높은 봉우리를 힘들여 넘자 단풍나무 조림지 옆으로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큰 길이 나타났습니다. 큰 길을 건너 벙커의 환기통이 서있는 암봉에 오르자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배회해 섬뜩했습니다. 다시 헬기장을 지나서 계속 내려가다 왼쪽 아래 마을이 보여 잠시 멈춰서 제가 선 위치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내려다보이는 350번 지방도가 파평산 정상에서 오른 쪽으로 한참 비껴선 마을을 지나고 있어 이제야 길을 잘 못 들었음을 깨닫고 시계를 보니 14시13분이었습니다. 반시간 이상의 헛걸음을 되돌리는 데 47분이 걸려 다시 무명봉으로 돌아와 긴 시간의 알바를 끝냈습니다.
15시10분 다시 왼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방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림 길이 얼마 후 다시 나타나 이제는 알바를 끝냈구나 싶어 안도했습니다. 7-8분을 내려가 만난 봉우리삼거리에서 별 생각 없이 왼쪽 길로 내려가다가 제 방향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다시 올라와 오른 쪽 길로 들어선 것이 네 번 째 알바로 그 시간은 2-3분밖에 안되는 아주 경미한 것이었지만 그 5-6분 후 다시 만난 삼거리에서는 또 다시 45분간을 왼쪽 길 오른 쪽 길을 몇 번이고 번갈아 오르내리는 알바를 하는 바람에 완전히 기진맥진해 무조건 삼거리에서 앉아 한참을 쉬었습니다. 가져간 지도가 별 도움이 안 된 것은 왼쪽 길-오른 쪽 길의 각도차가 아주 작았고 나뭇잎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데다 제가 지형도에 그려놓은 마루금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습니다. 산행기를 읽고나서 오른 쪽 길이 맞는 것 같아 한참을 내려가 보니 잡목이 우거진 풀숲이 길을 가로막아 더 이상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다시 올라 왼쪽 길로 내려섰다가 이 길도 아닌 듯 해 다시 삼거리로 오르기를 3번이나 반복하고나자 맥이 빠졌고 더 이상 강행하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삼거리에서 꼼짝 않고 10분가량을 쉬었습니다.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기에 길이 제대로 나있는 왼쪽길이 마루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단맥 종주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15시55분에 왼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길은 맞았고 산행기를 잘못 읽어 생고생을 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17시13분 350번 지방도가 지나는 노파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문제의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안개목이와 바깥개목이를 가르는 개목이고개로 내려서기까지 37분간도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갈림길을 만날 적마다 한번 되게 혼이 난 터라 길 잡기에 엄청 신경이 쓰였지만 제 길로 잘 들어섰고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어 시멘트 길의 개목이고개에 다다랐습니다. 곧바로 길 건너 산길로 다시 들어선지 20분후에 색동헝겊을 묶어 놓은 당산목이 서있는 성황당고개를 지나면서 산행기에 이 고개가 적혀있음이 생각나 이제야 제 길로 왔음에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다시 봉우리로 올라섰다가 가파른 절개지 왼쪽으로 내려서 밭을 지나 350번지방도로 내려섰는데 오른 쪽으로 보이는 고개 마루가 어려서 늘노리 큰 누님 댁에 놀러가느라 자주 넘었던 노파고개였습니다. 길 파평산 산신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파평산으로 들어섰습니다.
18시15분 해발495미터의 파평산 정상 바로 앞에 섰습니다.
산신각에서 오른 쪽으로 들어서 능선으로 오른 후 왼쪽으로 따라 가다가 바로 오래 묵은 임도 길을 만났습니다. 파평산 산객들 대부분이 미타사 길로 올라서인지 임도에 사람들이 걸은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임도 길은 반시간만에 끝났고 마지막 반시간은 길도 없는 된비알의 산등성을 치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해지기 전에 산행을 마쳐야 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오름길을 강행했더니 뒷다리가 댕겼습니다. 정신없이 걸어 능선 바로 밑에 올라서자 파주시에서 세운 무인산불감시소가 나타났고, 10여m폭의 사계정리구역을 지나 군부대 철조망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철조망 울타리 안에 둥그런 돔형의 군 건물이 들어선 곳이 파평산 정상지점으로 보였으며 오른 쪽 아래로 부대로 올라오는 시멘트길이 나있었습니다. 부대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옮겨 능선에 오르자 임진강으로 이어지는 단맥 길이 잡혔습니다. 임진강 건너 개성의 진산 송악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여기 파평산이 고향 산중 최전방의 고산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감악산, 도봉산, 북한산, 비학산과 고령산도 모두 보였습니다만, 메모리카드 용량초과로 어느 산하나 카메라에 옮겨 담지 못했습니다. 날이 흐리고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해 임진강으로 내려서는 마지막 단맥 구간은 다음 숙제로 미루고 오른 길로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오름 길이 급했던 만큼 내림 길도 만만치 않아 조심스레 임도로 내려서는데 20분이 걸렸습니다.
19시7분 노파고개로 되돌아와 9시간 반이 넘는 장시간의 단맥 종주를 끝냈습니다.
정상에서 내려선 임도 길을 따라 산신각으로 하산하는 길은 낙엽이 쌓여 폭신하게 느껴졌으며, 산자락에 내려선 어둠이 숱한 알바로 도전과 응전을 반복한 낮의 하루를 먹어 삼킬 듯이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산신각과 인접한 파평윤씨 정정공파 사과공 18세손 이하 조상을 모시는 봉선단 옆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바로 옆 350번 차도에서 하루산행을 마무리하고 금촌 행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엄격하고도 자비로운 고향 산들을 오르내리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산은 모두 그냥 산이었습니다. 고향 산이든 타향 산이든 서로 다를 바가 없는 산이었는데 산을 대하는 저의 생각이 달랐을 뿐입니다. 고향 산은 그저 포근하고 오르기 쉽고 길이 훤히 나있을 것이라고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던 반면에, 타향 산은 뭔가 어색하고 길이 잘 나있지 않을 것 같고 알바를 하면 큰일이다 싶어 두려움이 앞서는 등 저의 생각만 달랐을 뿐 고향 산이든 타향 산이든 엄격하고 자비로운 정도는 모두가 같다는 것이 이번산행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파주와 양주를 가르는 한북감악지맥은 다른 정맥 길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꼼꼼히 챙기고 준비한 후 종주 길에 나설 뜻입니다.
<산행사진>
하늘에 구멍이 뚫린 양 무차별적으로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장맛비로 전국적으로 수해가 많다는 보도에 걱정입니다.
철저하게 대비하셔서 무탈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 다시 한주일이 시작했습니다.
활기 넘치는 휴일 빕니다.
저는 아직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을 오르지 못했는데 올해는 힘들 것 같고 내년에는 종주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 뜻입니다. 고미영님의 죽음이 많은 산악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만, 그 님은 영원히 히말라랴에 머무를 수 있으니 이 또한 그님의 뜻이려니 생각해봅니다. 먼 곳에서나마 편하게 영면하기를 빌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jbglog
- 군생활할때..파평산 똥꼬를 엄청 찔러 댔는데.....산신이 용서해주실려나~~
에구..저도 불러주시지요..
2009.07.14 08:06
- 송림통나무에서 바뀐 지 모르고 누군가 했습니다.
한남앵자지맥을 하려다 무리다 싶어 급하게 산행지를 바꾼 곳이 파평산이엇습니다. 재작년에 한 번 오르고 이 번이 두번째였습니다. 다음은 늘노리 쪽으로 가서 올라볼 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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