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2010. 3. 13일(토)
*소재지 :전북전주/김제
*산높이 :794m
*산행코스:도계모악산출입통제소-금곡사-모악산-장근재
-금산사-금산사주차장
*산행시간:11시30분-17시53분(6시간23분)
*동행 :나홀로
새내기 1학년으로 입학한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의 보충강의시간에 한 교수님에게서 4계의 봄이 “보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배웠습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봄이라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 보이기 시작하고 겨우 내내 동면에 들어갔던 개구리가 잠을 깨고 활동을 시작해 보이기 시작하는 등 봄이 되면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다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여름은 열매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여름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봄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열매인 여름이 열린다하여 여름이라 불린다 하셨습니다.
봄의 어원이 이럴진대 대학을 졸업하고 39년만에 처음 치르는 중간고사가 아무리 중요하고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코앞의 과제라 하더라도 저는 집에 가만히 앉아서 봄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해서는 이제 막 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한 이런 저런 생명체들의 몸놀림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3월 들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붓는 눈을 보고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고 투정을 부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날씨가 이럴수록 더 짬을 내어 가까운 산과 들을 찾아 나서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 한다면 아파트 숲에서는 볼 수 없는 꽤 많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는 현장을 쉽게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한참 동안 고심하다 나중에 중간고사야 삼수갑산을 가든 말든 저는 먼저 산을 다녀와야겠다며 서둘러 배낭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 7년 전 이맘때 한 번 올랐던 전주의 진산인 모악산으로 향했습니다.
강원도의 산에서라면 눈 속에 파묻혀 신음하고 있을 봄이 남쪽에 자리한 이 산에서는 눈을 훌훌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 산을 오르며 봄이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생명체들과 함께 비발디의 “4계”중 첫 악장을 연주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런 저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모악산을 오르는 길에 조그마한 늪에서 개구리 알을 보았고 금산사로 하산하는 길에 활짝 핀 노랑 꽃송이가 다닥다닥 달린 산수유를 만나보았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 있다가 며칠 전에 내린 폭설이 녹아 콸콸 흘러내려가는 계곡물소리와 이 소리에 놀라 재잘대는 새소리를 들으며 봄의 교향악이 따로 없다 했습니다. 이 교향악을 들으려 모악산을 찾아 나선 여심(女心) 또한 춘심(春心)이다 싶어 봄이 풍성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것은 다 놓더라도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소리만은 움켜쥐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이어서 이마저도 놓고 가시는 법정스님의 높으신 뜻을 따르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봄의 현장을 훔쳐왔습니다.
오전11시30분 주차장이 들어선 모악산출입통제소를 출발했습니다. 택시로 전주에서 중인동버스정류장을 거쳐 이곳 도계의 통제소까지 이동하는 데 꼭 1만원이 들었습니다. 국립공원에서는 벌써 탐방안내소로 다 바꾼 것을 아직도 출입통제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명령적기능만 중시하고 미학적기능은 간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KBS송신탑이 자리한 모악산 정상이 정남쪽으로 보이는 넓은 시멘트 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정감어린 돌담과 과수원 옆을 지났습니다. 출입통제소 출발 10분 만에 다다른 삼거리에서 오른 쪽의 소나무 숲 사이로 낸 큰 길로 오르다가 오른 쪽 아래 계곡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다리 건너 자그마한 사찰인 달성사를 들러 대웅전과 석불입상을 사진 찍은 후 0.5Km 떨어진 금곡사로 향했습니다. 태고종의 달성사에 이르기까지 길의 운치를 더해준 소나무 숲이 조계종 사찰인 금곡사가 가까워지자 편백나무 숲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며 금곡사는 앞서 들른 달성사보다 훨씬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절도 터만 크게 잡았을 뿐 석불입상과 대웅전만 달랑 서 있어 산 너머 금산사의 해우소만도 그 크기가 못할 것 같았습니다.
12시33분 “정상2.1Km/주차장2.1Km”이정표가 세워진 능선 길로 올라섰습니다. 차가 다닐만한 큰 길은 금곡사에서 끝나고 본격적인 산길은 이 절 왼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작은 계곡을 건너고 목제계단을 걸어 오르며 이렇게 훌륭한 탐방 길을 냈으면서 "탐방안내소"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출입통제소"를 고집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새삼 궁금했습니다. 우리말은 워낙 까탈스러워 자칫 잘 못 쓰다가는 말을 듣는 이들에 마음의 상처를 주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현들께서 ‘아’와 ‘어’가 크게 다르니 가려 쓰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2차 대전 중 영국의 국군병원이 그 이름을 한때 야전병원으로 바꾸어 전쟁 중 의료서비스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퍼붓는 언론의 비난을 잠재웠다는 일화가 바로 이름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짧은 석성이 보이는 등성을 올라 다다른 능선삼거리가 오름길의 한 가운데로 정상과 출발지인 주차장까지의 거리가 모두 이정표에 2.1km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정표가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 쪽 위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오르며 고도를 높여가자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어 아이젠을 꺼내 찼습니다.
13시20분 북봉 아래 능선쉼터에서 점심식사를 마쳤습니다. “정상2.1Km/주차장2.1Km” 의 능선삼거리에서 반시간을 채 못 걸어 왼쪽으로 꺾어 하얀 눈이 덮인 너덜 계곡을 지났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눈길다운 눈길은 이 너덜길이 전부였습니다. 능선 길에 퍼져 있던 햇살이 여기 너덜 계곡에는 미치지 못해 며칠 전에 내린 눈이 그나마 곱게 남아 있어 눈 사진을 몇 커트를 건졌습니다. 너덜 길을 지나 만난 능선삼거리에서 다시 오른 쪽으로 올라가 북봉 아래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풀고 점심을 들며 모처럼 10분 넘게 편히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오르자 왼쪽으로 북봉을 우회하는 길이 보였습니다. 이 길로 매봉과 정상을 잇는 주능선으로 올라서자 “해발690m”의 표지목과 “해발650m”의 스테인리스 표지봉이 나란히 서 있어 헷갈렸습니다. 여기 능선 삼거리에서 남동쪽으로 0.9Km 떨어진 정상을 향해 5-6분가량 걸어 북봉제2헬기장에 이르자 오른 쪽 아래로 금산사와 금평저수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14시26분 해발794m의 모악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심원암 길이 갈리는 북봉헬기장에서 남쪽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선 송신소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돌아 전망데크에 올라서자 동쪽 아래로 금평저수지보다 훨씬 큰 구이저수지가 잘 보였습니다. 전주 시내 곳곳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모악산은 전망데크가 없던 때에도 전주의 진산이어서 7년 전 이산을 올랐을 때 여전히 붐볐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송신소삼거리로 돌아가 남서쪽의 장근재로 향하다가 모악산 정상을 점하고 있는 송신소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한 분에 여쭸더니 들어갈 수 있다해 뛸 듯이 기뻤습니다. 돌계단과 철계단을 거쳐 정상보다 더 높은 옥상 위로 올라가자 2007년 여름 호남정맥 종주 길에 들렀던 그림 같은 옥정호가 남쪽 멀리로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장근재를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호남정맥을 만나게 되고 왼쪽으로 꺾어 조금 더 가면 닿게 되는 옥정호가 보이자 3년 전에 밟았던 호남정맥 종주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정상에서 내려가 남쪽 아래 헬기장으로 옮겼습니다.
15시28분 장근재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을 출발해 남봉제3헬기장으로 옮겼습니다. 제3헬기장에서 올려다 본 정상에 송신탑을 세운 KBS가 7년 전처럼 밉살스럽지 않은 것은 이번에는 정상을 열어놓고 산객들이 오를 수 있도록 한 배려가 고마워서였습니다. 헬기장에서 남쪽 암봉을 지나 다다른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내려가면서 연초록색을 되찾아가는 산죽 길을 지났습니다. 아직은 물이 오르지 않은 물푸레나무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려선 해발491m의 안부인 장근재에서 제가 내려가야 하는 오른 쪽 아래 모악정 길이 폐쇄된 것을 보고 적지 아니 당황했습니다. 7년 전에 한 번 내려간 길인데다 제가 가지고 간 개념도에 금산사로 내려가는 길이 이 길 밖에 나와 있지 않아 별 수 없이 폐쇄된 길로 내려서면서도 영 찜찜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금산천 골짜기의 상류를 건넜습니다. 이 계곡이 큰 비가 내리면 위험하겠다 싶었지만 이미 잘 나있는 길을 폐쇄하고 다른 곳에다 이만한 길을 다시 내려면 자연손상이 불가피할 텐데 여기에다 다리를 놓으면 될 것을 길을 아예 폐쇄한 조치가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곡을 건넌 후 10여분간 마음을 놓지 못하다가 케이블카탑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보고나자 비로소 안심됐습니다.
16시50분 금산사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송신소 전용 케이블카 출발지부터 금산에 이르는 길은 시멘트 길로 차들이 다닐 만큼 넓었습니다. 폭설이 녹아내리는 지곡 물을 알뜰살뜰 받아낸 금산천 계곡물이 금산사 길과 나란한 방향으로 콸콸 흘러내려가는 데다 새들이 이리저리 날며 지저귀는 소리가 더해져 이 소리들이 바로 봄의 교향악이다 싶었습니다. 모악정을 지나 시멘트 다리 위로 넘쳐흐르는 물을 건너 심원암삼거리에 이르자 계곡물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햇살이 내려 살포시 내려앉은 작은 소(沼)를 지나면서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는 햇살과 더불어 너울너울 춤추는 물결이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금동계곡입구에서 200m떨어져 있는 연리지 소나무 두 그루를 보면서 곁에 있음이 행복이라는 명제는 저 소나무에도 잘 들어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랑꽃의 산수유와 돌담 위를 날아다니는 새 한마리가 이번에 비로소 보인 것은 봄이 왔기 때문입니다.
금산사는 역시 대찰이었습니다. 이 절을 먼저 들렀다면 산 너머 달성사와 금곡사가 엄청 초라해 보였을 것입니다. 대한조계종17교구 본사인 금산사에 들어선 절 건물이 모두 33개가 될 정도로 절터도 넓었습니다. 이 많은 건물 중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절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어 대적광전이 대신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오층석탑과 미륵전만으로도 그 웅장함에 부처님의 위용이 절로 느껴져 나머지 것들은 대충 둘러보았는데도 반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느긋하게 금산사를 나서면서 1,075년 전에 허겁지겁 이 절을 빠져나갔을 후백제의 견훤을 떠올렸습니다.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935년 3월, 모악산의 진달래가 한창 자태를 뽐낼 무렵 이른 새벽에 큰 아들 신검의 지휘를 받는 군사들이 궁궐로 들어가 신검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아들 신검에 의해 여기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한 달쯤 지난 뒤 수비병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후 금산사를 탈출해 나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왕건에 귀순의사를 밝히고 송악으로 가는 것으로 금산사탈출사건이 끝납니다. 아들에도 마음 놓고 넘겨주지 못하는 권력을 한 번 움켜쥐고 나면 그 날부터 죽을 때까지 걱정되는 것은 권력을 놓는 일일 것입니다. 평화롭게 권력을 내놓는 일은 선거로 가능합니다. 권력을 계속 잡을 뜻으로 선거를 피하고자 무리하게 애쓴 사람들의 말로가 어땠는가는 우리나라 대통령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 다음 대통령들이 청와대문을 대 낮에 걸어서 나올 수 있는 것도 공명하고 평화로운 선거덕분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이 견훤보다 더 비참하게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면 그래서 대낮에 걸어서 주석궁을 빠져나가려면 늦었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견훤처럼 몰래 밤에 빠져나와 대한민국에 귀순을 요청하는 길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합니다.
17시53분 주차장에 도착해 모악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전주역으로 나갔습니다. 호남정맥을 종주할 때 여러 번 들른 전주역에서 20분가량 기다려 용산 행 무궁화열차를 탔습니다.
일단 열차에 몸을 맡기고 나자 이번 모악산 산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땅 위에서, 산 속에서, 그리고 계곡에서 이런 저런 생명체들의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봄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렇게 이 땅위에 나타난 봄이 제 모습을 보고 봄이 왔음을 느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모악산에 멈춰선 봄이 변한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보여주지 못한 저를 보고 봄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네들이 봄 화장을 하고 봄나들이를 나서는 것은 남정네들보다 춘심을 훨씬 잘 읽기 때문임을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이제라도 저도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어 봄이 완성되는 데 일조해볼 생각입니다.
<산행사진>
*무심거사
* 2010.03.19 08:59
*모악산에서 여심이 춘심임을 느꼈다는데,
다음에는 산악여성과 동행하면
더 좋은 산행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꾸벅.
- 시인마뇽
- 2010.03.20 07:29
- 모악산에서 하산해 금산사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해성고등학교를 지났습니다.
님께서 나온 학교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반가웁디다. 이렇게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 데 언제부턴가 다시 안 볼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싸움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학교가 아담하고 조용하겠습디다.
- 워니
- 2010.03.29 10:52
- 다음달 모악산 산행을 계획하면서
우연하게 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후기 잘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시인마뇽
- 2010.03.29 22:11
- 졸고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세이에 가까운 산행기라서 크게 도움이 못될 것입니다.
안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모악산(1)
*산행일자:2004년 2월21일
*소재지 :전북 김제
*산높이 :794미터
*산행코스:구이면 모악산입구-정상-금산사
*산행시간:10시36분-15시10분(4시간34분)
어제는 전북 김제의 모악산을 올랐습니다.
광주시민들이 즐겨 오르는 산이 무등산이라면 전주시민들에게는 단연 모악산입니다.
모악산은 해발 794미터로 고산이랄 수는 없지만 그 오지랖이 하도 넓어 모든 것을 감싸서 담고 있기에 이 지역의 주민들에는 어머니 산이라 불리는 소중한 산입니다.
아침 7시 15분 월 산악회의 버스를 타고 사당 역을 출발하여, 전주를 거쳐 10시 30분 경 완주군 구이면의 모악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비가 뿌려 준비를 단단히 해 왔는데 충청도를 들어서자 비가 그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10시 36분 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모악산 시비에 고 은 님의 시 “모악산”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악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어머니 산이라는 시구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 모두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오르는 모든 산은 먼 훗날 우리들을 받아들일 어머니 일터인데 어찌 모악산만 어머니 산이겠습니까?
10시50분 전주 김씨 시조묘지에 오르니 구이저수지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십여 년 전 어느 한 음식점에서 시레기를 함께 넣어 끓인 매운탕을 맛있게 들며 구이저수지를 내다보니 금붕어를 양식하고 있는 가두리주위의 저수지물색이 온통 새빨갛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주김씨 시조묘에서 내려와 방향을 틀어 계곡을 따라 다시 올라가니 왜란 중 서산대사에 버금가는 진묵대사가 중생을 제도하고자 좌불 삼매를 했다는 대원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경내를 둘러보고 일행들을 찾고자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아 “월산악회”를 연호하였습니다. 마침 지난 12월 황석산을 오를 때 후미에서 같이 산행한 여성대원 한 분이 대답을 보내와 천일암까지 같이 오를 수 있었습니다. 대원사에서 산허리를 질러 나가 천일암으로 오르는 계곡을 만났습니다. 힘찬 계곡의 물소리에서 봄기운에 녹아 스러진 겨울눈의 일생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사랑바위와 입지바위를 지났습니다. 설악산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작은 바위에 예쁜 이름을 지어준 이곳의 선조 분들의 세심한 배려가 바로 남도예술을 이끌어온 원동력입니다.
12시 정각 천일암에 다다라 첫 쉼을 가졌습니다.
일선대사께서 이곳에서 현대 단학을 창시하였다하니 천일암은 명소임에 틀림없습니다. 암자를 버티고 있는 시멘트축대가 눈에 거슬렸습니다만, 천일암 뒤편의 암벽들이 보기 좋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아이젠을 꺼내 차고 오른쪽으로 10여분 전진하니 어느 조상 분의 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의 고도가 해발 600 미터가 넘는지라 후손들의 효심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때 맞추어 성묘를 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깔딱고개의 치받이 코스로 겨우 내내 쌓인 눈이 녹아 질펀해진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2시 55분 방송국의 중계소에 터를 내준 정상을 오를 수 없어 바로 밑의 공터에 머물렀습니다. 산자락까지 드리운 짙은 안개로 시야가 전혀 트이지 않아 갑갑했지만, 산밑에서 치켜 불어 올라오는 차가운 산바람이 삽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상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가지런히 놓여진 나무계단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타났습니다. 3주전 위암으로 수술을 받으셨다는 전주 분이 후미의 저희들을 안내하셨는데, 수술 후 4번째 모락산에 오른다는 말씀에 저희 일행 모두가 놀랐습니다.
13시 10분 준비해간 인절미로 요기를 했습니다.
장근재까지 길 양옆에 허리높이의 산죽들이 숲을 이루어 푸르른 산색이 보기 좋았습니다. 장근재에서 모악정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산사계곡을 따라 금산사로 하산하였습니다. 대원사에서부터 함께 산행한 여성대원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섬주섬 나누었습니다. 젊어서 텔렉스를 쳤다는데 그 분이 아쉬워하는 텔렉스의 소멸사가 바로 우리나라 산업의 발전사를 가름하는 보기입니다. 70년대 성행했던 텔렉스가 80년대에는 팩스로 바뀌었고 90년대에 접어들자 팩스 또한 컴퓨터에 상당 부분 그 자리를 내주어 이제는 간신히 연명하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문명사는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바뀌어 왔습니다. 그래도 시공을 뛰어 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산입니다. 물론 4계절의 변화로 때맞추어 옷을 갈아입기는 하지만, 누가 산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흙을, 그리고 계곡을 옮겨 놓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계곡의 힘찬 물소리를 들으며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내 후미로 쳐져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잘 포장된 길로 들어서니 주변의 경관을 카메라에 옮겨 놓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자연 발걸음이 늦어져 견훤이 그 아들에 의해 유폐되었다던 금산사에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8년 전 한번 사찰을 둘러본 일이 있어 어제는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15시 10분 주차장에 도착하여 약 4시간 반만에 모악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2월 내내 눈꽃을 쫓아다니느라 남녘의 봄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영국의 서정시인 셀리의 “서풍부”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성큼 성큼 다가선 봄을 알아채지 못하는 아둔함은 면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늦게나마 벌써 봄이 와 있음을 증언하고자 늘연계곡의 버들강아지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이곳 남녘의 산들을 오르내리면 회색의 도시에서 쉽게 지나칠 계절의 작은 변화도 가슴으로 읽어 낼 수 있어 좋습니다. 모악산에 쌓인 눈들이 녹아 계곡을 흐르고, 그 물들이 모여든 금평제에도 얼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봄이 와있음을 실감했습니다.
19시 30분 남녘의 봄을 실고 과천의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제 하루 남녘에서 맞은 봄소식을 정리해두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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