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님 따리마까시
따리마까시.
우리말의 “감사합니다”를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의 고유언어로 옮겨 본 것입니다. 고유 언어는 있어도 이를 표기할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찌아찌아족이 우리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해 이미 배우기 시작했다하니 이들이 한글을 익혀 세종대왕께 “따리마까시”할 날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우리 한글이 다른 나라 소수민족의 공식문자로 채택되었다는 낭보를 접하고 이제야 비로소 우리나라도 일등 문화강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싶어 뛸 뜻이 기뻤습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주 바퉁섬 바우바우시는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인구6만여 명의 찌아찌아족이 쓰고 있는 토착어를 표기할 공식문자로 우리 한글을 도입했다 합니다. 언어만 있지 기록할 문자가 없어 고유 언어가 사라져갈 위기상황에 처한 찌아찌아족을 위해 인도네시아의 바우바우시 당국이 그들의 공식문자로 영어나 인도네시아를 제쳐놓고 우리 한글을 채택했다는 것은 우리 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우수한 표음문자임을 인정한 것으로 이것은 분명 대한민국이 경제강국에서 문화강국으로 도약한 역사적 쾌거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도 우리 언어를 담아낼 고유문자를 갖지 못해 중국의 한자를 빌려 우리의 말과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의 한자란 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가 아니고 그림이나 사물의 형상을 베껴 시각에 의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표의문자여서 우리말을 모자람 없이 한자로 표현하기위해서는 엄청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했습니다. 지배계층이나 부유층이라면 몰라도 죽어라고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일반 백성들이 한자를 깨우쳐 써먹기란 턱도 없는 일이었기에 상류층은 한자로 시문을 지며 음풍농월을 즐기고 있어도 무지렁이 백성들은 시집간 딸에 안부를 전할 편지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신라의 설총이 한자를 우리말의 어순에 맞게 고치고 토를 붙인 이두를 만들어 써왔다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에는 문자해독이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반만년 역사상 우리 민족의 최대 행운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난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한창 르네쌍스를 맞아 근대유럽문화가 막 태동되는 15세기 초반에 한반도에서는 세종대왕께서 22세의 나이로 조선조 네 번째 임금으로 등극하시어 32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정치,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어느 제왕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들을 해내어 신생국 조선을 반석 위로 올려놓으셨습니다. 대왕께서는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해 오늘의 남북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하고 나라를 이끌어갈 동량들을 길러냈으며 이들로 하여금 국가통치의 바이블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토록 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조선통보를 만들어 화폐유통에 힘쓰셨고 농사직설을 펴내 영농의 지침서로 삼는 등 백성들의 살림이 나질 수 있도록 각별히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측우기와 혼천의, 물시계와 해시계 등을 제작해 당대 세계최고수준의 과학기술을 자랑했으며 아악을 정리하고 고려사를 편찬하는 등 어느 분야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업적들은 다른 제왕들처럼 백성들을 들볶아 만든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속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고루 등용해 이룩한 것이기에 지금까지도 대왕께서 성군으로 받들려 지는 것입니다. 군주열전의 작가 이한우님이 집념과 포용의 정치로 애민과 훈민을 몸소 실천하고 조선의 표준을 세웠다고 대왕을 치켜 올린 것이 저는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세종대왕의 최대 업적은 훗날 한글로 불리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신 것입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만든 것이 바로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훈민정음입니다. 새로 만든 28자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닿소리 17자와 삼재의 원리를 본뜬 홀소리 11자를 이르는 것으로 닿소리와 홀소리를 적절히 결합하면 우리말을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문자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 훈민정음 창제란 가히 우리 민족 언어의 혁명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가 혁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전제왕조시대에 일반백성들을 위해 임금께서 손수 만들었다는 것과 또 이들이 손쉽게 배워 익힐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창제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훈민정음창제 역시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마저 연명으로 새 문자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로 든 것은 첫째 훈민정음 창제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고, 둘째 글자를 따로 만들어 쓰는 일은 오랑캐들이나 해온 일이며, 셋째 신라 설총이 만든 이두를 써도 충분하며 넷째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억울한 송사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두를 쓴다 해서 송사의 원망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최만리 등이 내세운 반대명분도 지금 와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보다 그들이 반대한 솔직한 이유는 자기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한문을 배웠는데 훈민정음 때문에 이제 아무나 문자를 쉽게 배워 문자생활을 누리게 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데 있었습니다. 대왕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반대한 이들을 손수 궁중으로 불러 설득하고자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을 보고 대왕의 집념과 포용이 어떠한 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완벽한 체계를 갖춘 소리문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찍이 정인지는 “훈민정음해례” 서문에서 훈민정음으로 닭울음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진화생물학과 인류학의 세계적 권위자이면서 언어와 문자에도 전문 학자 못하지 않다는 재레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 “문명의 붕괴”등 인류문명의 발전과 붕괴에 관한 불후의 역작을 내놓은 분입니다. 이런 분이 인류의 문자를 비교검토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한 논문을 1994년 미국의 과학전문지 “디스카버(Discover)에 실어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1985년 그의 저서 “문자체계(Writing System)에서 우리 한글을 가장 독창적이고 훌륭한 음성문자라 명명하면서 한글을 음소문자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질문자(feature system)라는 새로운 글자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음성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하는 글자들이 그 모양에서도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기본자에 획을 더 함으로써 새로운 문자를 파생시킨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수한 한글이 국어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창제 당시 최만리 등의 반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층은 아예 새 글을 배울 뜻이 전혀 없었을 뿐더러 백성들이 이 글을 쉽게 배우고 익히는 것조차 못마땅해 했습니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외면한 한글을 앞장 서 배운 이들은 왕실의 여인들이었고 일반 백성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사대부들은 한글을 배우고 익히는 백성들이 점점 늘어나자 이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지못해 배웠을 뿐 그들은 여전히 한문으로 그들의 뜻을 폈기에 조선의 석학인 퇴계 이황선생이나 율곡 이이선생은 물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조차도 그들의 대표작품들을 한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 임금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한 투서를 한글로 썼다하여 언문금압(諺文禁壓)을 발표해 선조께서 만든 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한글이 국문으로 인정받아 국가공식문자로서 한자와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은 1894년으로 1443년 한글이 창제된 지 무려 451년만의 일입니다. 한글이 국문의 지위를 얻었다하여 그 수난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토록조치하면서 한글강습을 전면금하고 조선어학회를 해산하는 등 한글탄압에 나섰습니다. 해방 후 한글이 겪은 큰 소동은 1953년 이승만 정부에서 이제껏 잘 써온 받침을 없애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풀어쓰기로 한글맞춤법을 바꾸겠다고 나선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여론에 밀려 철회함으로써 풀어쓰기 소동은 진정됐습니다. 한마디로 한글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는 한문에 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어에 국어자리를 뺏겼으며, 해방 후에는 영어에 밀려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등 온갖 시련을 다 겪었습니다.
이토록 불리한 여건에서 한글을 보급시킨 일등공신은 소설이라 합니다.
한글창제 이전에는 소설이란 한문으로 옮긴 짧은 설화나 중국소설의 문체를 흉내 내는 정도였으나 한글이 만들어진 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수많은 한글소설이 쏟아져 나왔고 이 소설의 보급으로 한글 사용이 급격히 확대됐습니다. 화복이 윤회한다는 내용의 “설공찬전”이 한글로 번역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자 내용이 요망하다하여 한문으로 지은 원저자 채수를 파직시킨 것이 훈민정음 창제 68년 뒤인 1511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필화사건만 보아도 한글소설이 우리 한글을 빨리 그리고 널리 보급시킨 일등공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가 한글로 쓰이지 않았다면 숙종임금이 내쫓은 민비의 복위를 여론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구한말까지도 주시경의 모아쓰기와 지석영의 풀어쓰기가 서로 대립해 설전을 벌일 만큼 통일된 맞춤법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한글을 갈고 닦아 오늘 날 세계적인 언어로 가꾼 공은 누가 뭐라 해도 소설가와 시인 등의 문인들에 돌려져야 합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나 “당신들의 천국”을 쓴 이청준 선생이 작년에 타계하셨을 때 한 쪽 가슴이 휑하니 빈 것 같은 공허감이 느껴진 것은 이 두 분들이야 말로 우리의 말과 글을 풍성하게 만드신 분들로 제가 존경해 마지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글이 이렇게 빨리 세계어로 발돋움할 줄은 저는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 한글이 세계어로 비상한 것은 한글 자체의 우수성에 우리의 경제력이 뒷받침된 덕분입니다. 이번 찌아찌아 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도입한 배경에는 한글을 배워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우리나라 회사에 취업을 해보겠다는 그들의 실리적인 계산도 작용했다는 후문도 있었습니다. 우리 한글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북한에서 이 민족에 한글도입을 교섭했다면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북한주민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알고서는 그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선뜻 받아들이겠다고 나설 민족이 없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이 점에서 세종대왕께서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전 대통령에 표창장이라도 수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룬 데는 우리 국민들의 높은 교육수준이 한 역할을 단단히 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고유문자를 소유한 중국 국민의 문맹률이 우리나라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국민들에 배우고 익히기 쉬운 한글이 없었다면 이 나라 경제발전은 훨씬 더뎠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또한 세종대왕께 고맙고 또 고맙다며 큰 절을 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찌아찌아족의 한글상용화사업은 훈민정음학회가 한글세계화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온 것입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우리 한글이 해외로 전파된 첫 사례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한글세계화사업이 지속적으로 성공해 이 지구상의 문자가 없는 많은 민족들이 우리 한글을 가지고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나가고 또 우리 민족과 국가의 브랜드가치도 더불어 높아지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저는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그들 고유의 언어를 우리 한글로 담아낼 날도 그리 멀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벌써부터 “세종대왕님 따리마까시”하며 전하는 찌아찌아족의 감사인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2009. 8. 31일 산본에서
*이 글을 쓰는데 참고한 문헌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일히 인용부호를 넣고 출전을 밝혀야 하는 데 그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1.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최경봉/서정곤/박영준 공저, 책과함께 간
2.한국사 이야기(9) 조선의 건국-이이화 저, 한길사 간
3.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이한우 저, 해냄 간
4.총, 균, 쇠-재래드다이아몬드 저, 문학사상사 간
5.일자미상의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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