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시험 소회
방송대 국어국문과에 입학해 1학기 중간시험을 치른 지 일주일이 다되갑니다. 충분히 시험준비를 하지 못해 허둥대며 중간고사를 치렀듯이 그 후에도 허둥거리다 한 주일을 다 보냈습니다. 시험 그 이튿날 경북 김천의 수도산을 다녀왔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 동안 밀린 산행기 3편을 작성해 블로그에 올리고 박태상교수님의 저서 “북한문학의 사적탐구”를 일독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했습니다. 현운재동아리들과 함께 다녀온 여주명소의 탐방기를 중간시험을 며칠 앞두고 작성해 올린 것도 시험 준비를 다 마쳐서가 아니고 제가 써야 할 글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서였습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대개가 판에 박힌 산행기거나 탐방기여서 남들처럼 머리 싸매고 쥐어짜야 나오는 창작에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그렇다 해도 산행기 3편에 탐방기 1편이면 질릴만한 편수여서 여주명소탐방기를 먼저 해치운 것입니다. 그리 신경 쓰이는 산행기는 왜 쓰고 산은 뭐 하러 올라가느냐고 묻는 다면 제게는 왜 사느냐고 묻는 실존적인 질문이어서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간시험을 치르는 일 이상으로 제가 실존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제 두 다리로 산에 오르는 일이기에 시험에 관계없이 한 주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이번 중간시험성적이 가히 불문가지의 수준으로 드러날 것이 분명한 소이연입니다.
미국의 교육학자 쏜다이크(Thorndike)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양으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교육학자가 아니고 과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현상은 모두 양으로 존재하기에 그들은 벌써부터 이 양을 계량화해 숫자로써 자연현상을 설명해왔습니다. 앞으로 몇 년 후면 지구의 평균기온이 몇 도 올라가고 극지방 빙하가 몇 % 녹아 해수면이 몇 m 올라가서 해안 유역의 몇 %가 침수될 것이라고 온난화의 영향을 설명하는 과학자들은 숫자를 빼놓고 학문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학자는 다릅니다. 그들이 학문하는 대상은 자연이 아니고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쏜다이크가 양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내재하는 것은 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질로 존재하기에 측정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수량화할 수 없다는 생각을 완전히 바꾼 사람이 바로 쏜다이크입니다. 쏜다이크의 이론에 힘입어 미국의 교육학자들은 측정도구를 계속 개발했습니다. 머릿속 깊이 들어있는 지능을 측정해 IQ(지능지수)를 만들었고, 가슴속의 훈훈함을 측정해 EQ(감성지수)를 개발했습니다. 방송대에 입학해 두 달 가까이 공부한 것을 측정해 수량화하겠다는 중간시험의 이론적 근거도 결국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양으로 존재한다는 쏜다이크의 행동주의 이론에 귀결됩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것은 분명 인간에 내재하는 사랑을 측정할 도구를 아직은 그 어느 누구도 개발하지 않은 점입니다. 이 도구가 개발된다면 가정법원 판사는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혼하러 온 부부에 사랑지수인 LQ(Love Quotient)를 시험 보게 해 일정 점수 이하면 이혼을 허하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가정법원 판사는 편할지 몰라도 남편을 직장에 내보내는 부인은 매년 이 시험을 치자고 졸라댈 것이고 자신 없는 남편은 따로 사교육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만약 40대 나이에 집사람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았다면 일만 알고 사랑을 모른다고 점수가 낮게 나와 쫓겨났을 것입니다. LQ테스트를 개발만 하면 돈이 될 만 할 터인데 아직도 개발하지 않은 것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할 줄 아는 인간의 지혜가 남아 있어서일 것입니다.
강의를 들을 때는 고개가 절로 끄떡여질 만큼 내용이 거의 다 이해되는 데, 시험공부는 전혀 딴판이어서 어려웠습니다. 그 어려운 첫 째 이유는 귀담아 들은 것을 머릿속에 넣자마자 밖으로 휘발해버리는 휘발성메모리로 제 머리가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가 갖고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는 컴퓨터를 꼭 닮아 읽기만 하고 쓸 줄은 모릅니다. 읽고 이해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불러내 시험지에 옮겨 쓰는 데는 별 소용이 안 되는 비휘발성 메모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둘 째 한창 공부할 나이의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 데 딴 짓거리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제가 즐기는 딴 짓거리는 물론 등산이 주입니다만, 시험공부의 주적이 바로 이 등산입니다. 산행 전에는 지도를 찾아 산행계획을 세우고 산행 당일은 새벽같이 집을 나서 자정이 다되어 돌아오고 그 이튿날 비로소 노곤한 몸으로 책을 펴지만 이내 글씨가 아물거리고 고개가 푹 떨어집니다. 등산과 공부를 병존시킬 수 있는 특단의 방책이 서지 않는 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심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셋째 꼭 공부를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아직 몸에 배어있지 않아서입니다. 노느니 염불한다는 그런 한가한 마음으로 방송대를 입학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저 나름대로 목표도 세웠고 이 악물고 한 번 해보자는 충만한 도전정신이 뒷받침되었기에 입학한 것입니다만, 이렇게 공부해서 어디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실용적인 목표가 없고 보니 자연 입학 때의 결심이 풀어져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앞에서 제가 열거한 이유들을 단 한 번에 극복할 수 있는 비법이 있기는 합니다. 한번 과락을 당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앗 뜨거워라 하고 만사 제쳐놓고 공부에 매달릴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공부에서 지고나면 그 모든 원인이 저의 게으름때문이라는 자책감때문에 무섭게 공부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시험을 앞두고 딴 전을 부리는 것도 그런 극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시험 당일 제 딴에는 일찍 집을 나섰는데도 결국은 시험감독선생님보다 늦게 입실했습니다. 보라매역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서울공고까지는 잘 찾아 갔는데 교실을 바로 못 찾아 늦었습니다. 1965년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도 혼쭐 난적이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하고자 응시한 경동고등학교근처 버스정류장을 잘 몰라 한참 떨어진 신설동의 대광고등학교에서 내렸고, 그래서 2km 가량 되는 거리를 들입다 뛰어 들어가 좌석에 착석하자마자 감독관 선생님이 들어와 이제 살았다 했습니다. 그때 시험성적은 괜찮아서 입학을 했듯이 이번에도 그 때처럼 성적이 웬만하기를 기대해봅니다. 첫 시간 컴퓨터과목은 반은 알고 반은 모르고 썼고 두 번째 세계사 과목은 내용은 모를 바 없는 데 교수님이 출제한 지문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어서 문제에서 요구한 700자 이상을 훨씬 넘겨 시험지 앞뒷면을 거의 다 채웠는데도 제대로 답한 것인지 잘 몰라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컴퓨터 시험 감독관 한 분은 시험지 양면을 모두 채워나가는 제가 달리 보였던지 어떻게 그리 많이 아시냐고 해 부끄러웠습니다. 알든 모르든 빈 칸을 메우는 것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할 바라고 배워온 저였기에 여백의 여유를 멋 부릴 계제가 아니어서 채운 것 뿐 인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수그레한 학생이 맨 앞에 앉아 열심히 쓰는 모습이 가상해 보였나봅니다.
공자님께서 나서기를 잘하는 제자 자로(子路)에 하신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신 것 같아 섬뜩했습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不知是知也)”라는 공자님 말씀이 지당한 것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아는 척 한다면 누가 가르쳐주지를 않아 알 기회를 잃을뿐더러 이는 자기기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백이 아무리 커 보여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고 엉뚱한 내용으로 칸을 메우는 일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급한 것과 중한 것을 가름하지 못하고 소리를 탐해 빈 칸을 다 채운 일을 철저히 반성해야 기말시험부터라도 철저히 준비할 것 같아 고해성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만,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부분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분량보다 훨씬 많지 않고서는 공자님의 말씀을 자신 있게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초 사흘 간 지리산을 다녀온 후부터는 마음 다져 먹고 책과 한 판 붙어볼 뜻입니다.
2010. 4. 30일 산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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