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수필습작

제22회 방송대 국문과 서울지역 가을축제 "통문제"를 다녀와서

시인마뇽 2010. 10. 14. 10:17

                                                       제22회 통문제

 

                                *일시:2010.10.10일 오후 4시 반

                                *장소:방송대 역사관(구 서울 문리대자리)

                                *주최: 제24대 방송대국어국문과  서울지역학생회

                                *행사:

                                  -오태권교수의 "스토리텔링"  강연

                                  -강예자 학형의 판소리 "흥부전"

                                  -수상자 시상:6명

                                      최우수상:김생자

                                      우수상   :오보근, 박윤희

                                      가작      :김철권, 김용의, 우명길

                                *축하:방송대국문과 현운재 동아리 학형들

                                *사진:박선녀 선배/하보경팀장/국문과 학생회

 

  60평생 글로써 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방송대국문과 서울지역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통문제에 졸고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를 둘러보고"라는 제목으로 투고했는데 영광스럽게도 가작으로 뽑혀 상을 받았습니다.

 

  시상식에 와주신  현운재 식구들과 사진을 찍어주신 박선녀선배님, 하보경 팀장님에 감사드리며 글과 사진을 올립니다.

 

 

 

 1.수상작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를 둘러보고>

 

  1950년대 말쯤의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공지사항이라며 말씀하셨다. 문둥병 환자들이 어린 애들을 죽여 간을 빼먹는다며 여러분들은 혼자 다니지 말고 꼭 두 세 사람씩 같이 다니라는 것과 반드시 고춧가루를 준비해 그들이 공격해오면 얼굴에 뿌리고 도망치라는 내용을 전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국가기관인 초등학교에서 공공연히 문둥병환자들의 공격을 막아낼 더 할 수 없이 무지한 지침을 학생들에 교육시킨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흥분하겠지만 당시로는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 폐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풍문이 풍미하던 때여서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무지가 빚어낸 슬픈 이야기다. 국가도 무지했고 학교도 무지했고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무지했다. 물론 문둥

 

병 환자들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지가 판을 치는 세상을 주름잡은 것은 폭력의 공포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분명 문둥병 환자들뿐만 아니라 상이군인들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삶이 저주스럽도록 절망적인 상

 

이군인들의 횡포 또한 어린 나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 바쳐 싸우다가 팔다리를

 

잃고 간신히 목숨 건져 고향으로 돌아온 상이군인들에 우리나라는 참으로 염치없이 대했다. 이 나라는 더 이

 

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해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그들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사회로부터 냉대 받은 그들

 

은 궁핍한 생활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농가를 찾아가 쌀을 내달라고 위협하고 불응 시에는 갈고리 의수

 

를 휘둘러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빼앗다시피 받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둥병 환자도 상이군인도 모두가

 

 스스로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기에 구걸행각이 불가피했는데 이들의 잦은 구걸이 그렇잖아도 먹을 것이 부족

 

해 춘궁기에는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대부분의 농민들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에 대

 

한 농민들의 시선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었다. 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국가공무원들이 미국에서 원조해준 분유

 

를 몰래 집으로 빼돌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어린 나도 알 정도였으니 그들의 공포상황 연출은 거의 유일한

 

삶의 수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0년대 초 군 출신의 박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참전용사 등 국가유공

 

자에 대한 국가적 배려가 제도로서 정착되었고 나환자에 대한 실질적 치료혜택이 확대되어, 70년대부터는 거

 

리를 떠도는 나환자들과 상이군인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머릿속에 입력된 그들은 무섭고 멀

 

리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잘 못된 인식만은 그 후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커서 이른바 문둥이라 부르는 나환자들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74년으로 월간지 “신동아”에 연

 

재된 이청준선생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으면서다. 소록도가 무대인 이 소설의 큰 줄거리는 대략 이러했

 

다. 한 현역대령이 소록도의 병원장으로 취임해 이 섬의 나환자들에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주고자 득량만 매립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 공사를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환자

 

들의 저항에 부딪혀 싸우다가 섬을 떠났고, 그 7년 후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가 미감아 두 사람의 주례를 맡

 

는 것으로 끝을 맺는 내용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나환자들을 위해 세우는 천국이

 

 원장 등 몇몇 사람들을 위한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고 나환자들 전체를 위한 “우리들의 천국”이 되기 위해서

 

는 이 천국이 자유와 사랑에 기초해 세워져야 하고 이 천국에서 살아갈 사람들과  대립하는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나환자들의 생생한 삶과 생각을 접하고 나서 어렸

 

을 때부터 이들에 가졌던 편견과 오해가 더욱 부끄러웠다. 어떻게든 이들에 가까이 가서 사죄하고 싶은 마음

 

에서 벌써부터 소록도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마침 호남정맥 종주 차 이 섬과 멀지 않은 보성 땅을 지나게 되어

 

이번에 짬을 내어 들른 것이다.

 

 

 

 

  2007년 8월10일 새벽5시에 순천시내 버스정류장에서 고흥반도 남단의 녹동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벌

 

교와 과역, 그리고 고흥을 차례로 지난 다음 6시 20분을 조금 넘어 녹동에 도착했다. 기사식당을 먼저 들러 5

 

천 원짜리 밥상에 무려 14가지 반찬이 나오는 아침을 맛있게 들고 나서 소록도행 첫배가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승선장으로 옮겨 갔다. 첫 배에 오르고자 새벽부터 서둘러 첫 버스로 왔는데 관광객은 8시 반 배부터 승선이

 

가능하다며 승선을 막아 난감했다. 아침 일찍 소록도를 둘러본 후 인근 팔영산으로 옮겨 여덟 봉을 차례로 오

 

른 후 저녁 6시에 순천을 출발하는 천안행 기차를 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아 놓았기에 이 항구에서 시간 반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해 하던 중  마침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조반을 차려 갖다 주느라 승합차를 몰고 승선하는 기사식당 주인 내외분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당신들 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해 그 차에 올라타 7시 배로 몇 백m의 좁은 바다를 건넜다. 오른 쪽 가까이에

 

소록도로 들어가는 연륙교는 공사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어 올 추석 때 처음으로 일시 개통될 것이라 한다.

 

 

 

 

  7시10분 경 식당주인 분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중앙공원 앞에서 하차했다. 막상 차에서 내리자 어디를 가볼까

 

난감했던 것은 너무 일찍 와 외부관광객들이 거니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장도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중앙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원은 깔끔했고 나무들도 단정했다. 잡초를 깎아내는 예초기의 소리만 요란할 뿐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해 공원이 아니고 정원을 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기 전 고흥 땅을 뒤덮은 먹구름은 어디

 

론가 사라져 하늘이 쾌청했고 그래서 비옷을 걸치지 않은 것만도 퍽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의

 

기념비와 나무들을 사진 찍고 나서 지나가는 수녀 한분의 안내를 받아 성당을 찾아갔다.

 

 

 

 

  단층의 성당은 지은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때마침 아침미사가 7시 반에 시작되어 4-5분을 기다렸다가

 

여기 나환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올렸다. 밀알이 산채로 그대로이면 한 알로 남지만  죽어 이 땅에 묻히면 수

 

많은 밀알을 만든다는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듣고 호남정맥 종주 길에 그저 한번 들러볼 요량으로 이 섬에 들

 

어 온 것이 부끄러웠다. 옆자리의 한 분이 손가락이 없는 두 손으로 성가집의 책갈피를 넘기는 것을 보고 팔다

 

리가 멀쩡해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나야 말로 무한한 은총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토록 엄청

 

난 은총을 받고서도 달랑 몸만 왔다 가는 것이 왠지 모르게 이 분들에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미사 시간 중 어

 

렸을 때 이분들에 편견을 가졌던 나의 못남에 대해 용서를 빌었고 또 이 분들이 항상 주님과 함께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빌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선 후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내게 몇 분들이 어떻게 성당을

 

왔냐고 물어와 송구스러웠다.

 

 

 

 

  더 이상 공원을 돌아다니기가 민망해 바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중앙공원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왼쪽으로 솔

 

밭이 바다와 면하고 있는데 해안선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깔끔해 눈길을 끌었다. 솔밭 가까이 선도반 건물

 

이 있고 그 건너편 건물에 원생 자율반 간판이 붙어있어 소록도가 나환자들의  자치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8시반 에 들어오는 배를 타고 나갈 심산으로 선착장 행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가

 

는 중 승합차 1대가 멈춰 섰다. 기사식당 주인 내외분들이 조반을 갖다 주고 돌아가는 길에 나를 보고 차를 세

 

운 것이다. 이분 들 차로 선착장으로 옮겼다. 8시40분 경 소록도를 빠져 나와 녹동 항으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소록도가 더 이상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 기뻤다. 손가락을

 

잃고 몸은 비록 불구이지만 몽당손으로 성가집 책갈피를 넘기는 한 분의 안온한 얼굴을 보고 이 섬은 이제 “우

 

리들의 천국”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청준 선생이 진정으로 세우고자 했던 천국을 이들이

 

결실한 것 같아 온 섬에서 평화로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러한 천국을 세우는 데는 국가의 역할도 컸을 것

 

이다. 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치료를 도맡았기에 어렸을 때 공포를 자아낸 이들의 무지한 행보가 끝날 수 있었

 

을 것이다. 자유와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께서 앞으로 이들의 천국을 지켜주실 것

 

이다. 이제 이분들에 더 이상 나의 편견을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 섬

 

을 떠났다.

                                         

 

*위 글은 졸고 "소록도 탐방기"에서 내용을 따왔습니다.

 

 

 

 

 

     

  2.통문제 행사 사진                                                

                                                     1)박선녀 선배님 촬영사진                                              

  

  

 

 

 

2)하보경팀장님 촬영사진  

 

축하 드립니다~~^&^

현운재를 대표하여 총무님이 꽃다발을~~

 

 

 

 

 

 

                                                             3)국문과 카페 등재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