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주최 '한국풍속화대전'을 보고 나서
*관람일자:2011. 10. 27일(목)
*관람장소:서울 성북구성북동 소재 간송미슬관
*동행 :방송대 국문과 학우 5명
실로 오랜만에 미술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방송대 국문과 선배 한 분의 주선으로 지난 달 동해안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온 헌화가 팀 멤버들이 다시 모여 성북동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간송미술관은 봄과 가을 한 해에 두 번씩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골라 전시회를 열어 왔는데 좀처럼 보기 힘든 국보급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여서 꽤 많은 관람객들이 미리 와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이 전시회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선배 분은 집이 먼 우리 후배들을 위해 먼저 가서 줄을 섰습니다. 절정을 맞고 있는 가을하늘이 내뿜는 냉랭한 공기가 계절을 앞당겨 여기 간송미술관도 분명 초겨울을 맞은 듯했는데 길게 줄서 있는 관람객들이 내뿜는 열기로 냉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전시회가 열린 2층의 시멘트 건물이 본관인 것 같았고 출입이 금지된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작은 석탑이 몇 개 보였습니다. 이번 대전을 준비해 전시회를 여는 간송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돌아가신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세우셨습니다. 1906년 중추원의관인 전영기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선생은 1962년 환갑을 네 해 남기고 이 세상을 뜨기까지 오로지 민족문화재를 수집하고 보호하는 일에만 전념하셨습니다. 부친으로부터 10만석의 재산을 물려받아 당대 전국부호 40위안에 들을 정도로 갑부였다는 전형필선생은 전 재산을 바쳐 우리 민족문화재가 일본으로 방출되는 것을 막고자 이것들을 사들여 지켜내셨습니다. 이렇게 사들인 민족문화재를 제대로 보호하고 연구하고자 선생은 1934년 북단장을 개설했고 그 안에 국내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우셨습니다. 해마다 두 권의 ‘澗松文華’(간송문화)를 펴내온 ‘한국민족미술연구소’는 ‘북단장’의 후신이고, 보화각은 1966년에 ‘간송미술관’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5천여 점에 이르고, 그중 국보급 문화재만도 '훈민정음 해례본'등 12점이나 된다하니 국내 굴지의 재벌들이 이 미술관을 인수하려고 기를 쓸 만도 했을 것입니다.
본시 이 미술관은 선생이 수집한 우리 민족문화재를 보관하고 또 우리 미술사를 연구하는 일에 설립목적이 있기에 다른 미술관처럼 상시로 전시회를 열지는 않는다 합니다. “한국풍속화대전”으로 명명된 이번 전시회는 조선왕조가 배출한 52명의 화가들이 그려낸 인물풍속화를 한자리에 모아 여는 것입니다. 이 전시회에 세종시대의 화원화가인 안견에서 순종의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에 이르는 조선의 쟁쟁한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는바,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 호생관 최북의 작품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습니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이정명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 만든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단원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어서 그림의 문외한인 저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그림 몇 점을 화집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이름조차 별반 알려지지 않은 한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화가가 바로 방송대국문과 교재에 실린 “최칠칠전(崔七七傳)”의 주인공 최북(崔北)이란 분입니다. 산수화를 부탁한 어떤 사람이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은 산수화를 보고 힐난조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 종이 밖이 모두 물이잖소!”라고 답했다는 최북의 이야기가 실린 “최칠칠전(崔七七傳)”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이 쓴 사전(私傳)입니다. 제가 남공철의 이 사전을 미리 읽어보지 못했다면 자가 칠칠이고 호가 호생관인 최북의 작품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10분 여 줄을 서서 기다려 10시 정각에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입구에 비치된 안내책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繪畵五十二風俗人物’(회화52 풍속인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펴낸 ‘澗松文華’로 이번이 82호 째이니 매년 두 권이 발행되었다 해도 그 연륜이 40년이 넘는 보기 드문 반년보입니다. 나중에 이 책을 보고 안 것이지만 이번 전시회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전영우소장이 이 책의 도언(導言)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의 진경시대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그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작 전시의도를 파악했다면 그림들을 보는 재미가 더했을 텐데 다녀와 감상후기를 쓰고자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어 뒤늦게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전시된 그림들은 모두 손상되지 않도록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어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만큼 질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담백함과 풍속화 특유의 장난기어린 여유로움을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저를 가장 괴롭힌 과목은 미술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 사는 것이 최고의 선결과제였던 가난한 집안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때여서 물감을 사고 스케치북을 준비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어서였습니다. 실기점수가 거의 다인 미술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는 애당초가 불가능해 어쩌다 필기고사를 보는 학기 외에는 평균60점대를 넘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잘 못 그려 미술점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그 영향이 미술과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어려서 그림그리기를 통해 공간감각을 키우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내내 애를 먹었고 지금도 입체를 다루는 3차원의 문제만 나오면 주눅 들곤 합니다. 이런 제가 감히 국보급의 작품들을 보고 이 그림은 어디가 좋고 저 그림은 기대보다 별 것이라는 등 입방아를 찧어댈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澗松文華’에 실린 강관식님의 ‘진경시대 인물화’라는 논고에서 몇 문장 인용하는 것으로 제 감상기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진경시대(眞景시대)’란 조선 성리학의 고유이념을 토대로 우리의 자연과 사회를 우리의 개성적인 미감과 화법으로 형상화하여 조선적 풍격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조선 후기 숙종 대(1675-1720)에서 순조 대(1801-1834)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일컫는 시대구분의 명칭으로, 1985년 간송미술관의 ‘진경시대’ 특별기획전을 통해 최완수 선생이 처음 제시했다 합니다.
진경시대의 회화를 초상화, 풍속화와 고사화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진경시대의 초상화는 조선중심의 주체적 의식이 드러나는 큰 변화가 나타났으니, 숙종 대부터 중국의 채전(彩氈) 대신 새롭게 나타난 화문석(花紋席)과 운학흉배(雲鶴胸背)가 그것들입니다. 조선에서는 오색털실로 화려한 문양을 수놓아 직조한 모직담요인 채전을 사용하지 않고 돗자리를 사용했는데도 명나라의 초상화를 모방해 태조의 어진에 채전을 그려 넣었습니다. 숙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어진에다 채전을 빼고 사실 그대로 화문석을 그린 것입니다. 조선의 문관들이 정장의 관복차림에 품계를 나타내고자 부착한 흉배에 중국에서 쓰이는 실제 존재하지 않은 공작대신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살고 있는 학을 그려 넣은 것도 진경의 정신을 살린 좋은 예입니다.
둘째 풍속화는 동시대의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18세기에 특히 발달한 진경시대의 풍속화는 서구나 일본의 그것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대부 출신들의 문인화가들이 자기 목적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예술작품으로 창작한 것이 많았고 또 관원신분의 화원화가들이 윗분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겸재와 단원은 조선적 고유성과 국제적 보편성이 상생적으로 융합된 수준 높은 진경풍속을 창조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분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셋째 고사도(故事圖)란 옛 고전에 나오는 성현과 명인들의 아름답고 빼어난 행적을 그려 감계(鑑戒)와 우의(寓意)로 삼는 그림입니다. 고사도에서 진경시대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회화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화가는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이라 합니다. 공재와 겸재의 성현도는 서로 다른 역사의식과 조형의식을 보여줬다는데 이에 대한 상론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진경시대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중심적인 사고와 의식이 강해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며 당대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진경시대 회화의 특징을 모른다 해서 국보급 풍속화를 보는 기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명욱과 홍득구의 ‘어초문답(漁樵問答)’들은 고기를 잡고 기뻐하는 어부들을 그려 구도가 비슷했으나 겸재 정선의 ‘어초문답(漁樵問答)’은 지게꾼과 어부가 같이 앉아 담소하는 장면을 그려 앞서 두 그림과 그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담뱃대로 고양이를 쫓아내는 익살스러운 그림이 김득신의 ‘야묘도추(野猫盜雛)’인 줄은 이번에 비로소 알았습니다. ‘최칠칠전’에서 최북에 관한 일화를 읽고 나서 그림에서도 얼마간 기이한 면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호계삼소(虎溪三笑)’나 ‘고사소요(高士逍遙)’는 구도가 반듯했습니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그림들은 화집에서 여러 번 본 것들이어서 반가웠고 특히 진본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기쁨이 배가되었습니다. 아쉬운 한 가지는 2층 중앙에 마련된 혜원 신윤복의 전시대는 발 딛을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찬찬히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전시회에 와보니 11년 전에 암으로 먼저 간 집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저를 끌고 전시회를 같이 다녀준 사람은 집사람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집사람은 동양화에도 관심이 높아 틈틈이 서예를 하고 사군자를 그리곤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재직한 시골의 같은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집사람에게서 몇 달간 난초 치기를 열심히 배운 것은 어떻게든 잘 보여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의 난초치는 일은 결혼과 동시에 끝났지만, 그 후 집사람 성화로 전시회는 꽤 여러 번 따라다녔습니다. 또 이 무렵 월간지 신동아에서 매달 유명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을 4-5페이지에 걸쳐 소개를 해 김환기화백이나 유영국화백 등 당시 열심히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을 지면으로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으로 말로만 들어온 ‘진경’의 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이 제게는 가장 큰 보람입니다. 이런 보람은 헌화가 팀원들이 혼자 가기가 쑥스럽고 익숙지 않아 한동안 미술관을 찾지 못한 저와 동행해준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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