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35.가야유적지 탐방기2(함안 도항리/말산리고분군)

시인마뇽 2011. 5. 26. 00:19

                                              

 

                                              함안 도항리/말산리고분군

 

                               *탐방일자:2011. 3. 7일(월)

                               *탐방지   :경남함안 가야면소재 도항리/말산리고분군 

                               *동행      :나홀로

 

 

  우리 역사서에서 낙동강 서남지역을 5백년 넘게 지배해온 가야의 역사가 동시대의 경쟁국인 고구려, 신라, 백제에 비해 많이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가야가 이들 나라처럼 단일국가가 아니고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고령가야, 대가야와 성산가야 등 6개소국의 연맹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수로왕이 42년에 건국한 금관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그 30년 후 마지막 남은 대가야가 어느 나라보다 철기문화를 찬란히 꽃피웠으면서도 백제나 고구려보다 대략 100년 먼저 신라에 정복당한 것도 연맹국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해서입니다.

 

 

 

  이렇게 ‘가야’라는 나라는 삼국보다 먼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가야’라는 이름은 그 생명력이 끈질겨 지금도 지명이나 산 이름에 ‘가야’가 쓰인 곳이 여럿 남아있습니다. 이번에 하룻밤 묵은 경남함안의 가야읍을 비롯해 부산진구의 가야동, 경남합천의 가야산, 충남서산의 가야산, 강원도설악산의 가야동계곡 모두 ‘가야(加耶)’가 들어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 지명보다 훨씬 더 수명이 오래갈 ‘가야금’이라는 이름은 악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신라’나 ‘백제’, 그리고 ‘고구려’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곳을 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가야’가 단일국가가 아니고 6개국의 연맹체여서 이름이 더 많이 불렸기 때문이라면 세상 참 공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단락은 박창희님의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를 일부 참고 했습니다.)

 

 

 

  낙남정맥 종주 길에 작정하고 하루 미리 가야읍을 찾아간 것은 60평생처음으로 함안 땅에서 하룻밤을 묵고자 했으며 아라가야의 유적지를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심야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내려가 들머리인 마재고개를 출발해 천주산을 올랐다가 창원의 신풍고개로 내려가 낙남정맥의 한 구간 종주를 마친 후  이내 마산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가 함안으로 넘어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의 한 분과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었고, 또 악양루와 합강정 등 함안의 명소도 소개받았습니다. 함안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군청 뒤 아라가야의 고분군을 찾아갔으나 해가 막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 고분들은 둘러보지 못한 채 ‘함안3.1독립운동기념탑’만 사진 찍고 가야읍 시내로 내려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군청 뒤 도항리/말산리고분군을 찾아 올랐습니다. 여기 도항리/말산리 구릉일대에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160여기의 대형고분이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있고, 그 아래로 1,000여기의 중소형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분들이 분포한 유역면적이 14만평에 달한다 하니 규모면에서 지난달에 다녀온 고성의 송학동고분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여기 함안 땅에 터 잡아 이토록 많은 고분군을 남긴 아라가야가 그 전성기에 국력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가늠되었습니다. 아라가야 고분군 탐방은 함안3.1독립운동기념탑에서 시작됐습니다. 바로 뒤 4호 고분은 홀로 떨어져 있는데다 규모 또한 다른 고분에 비해 큰 편으로 여기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대표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왼쪽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4호 고분보다 조금 작은 9, 10, 11호 고분을 차례로 보았습니다. 낮은 구릉에 봉곳이 솟아오른 고분들이 따사로운 아침햇살을 온전히 받아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이 성묘 온 당신 아들을 대견해하시며 웃음 짓는 어머니 같았습니다. 나무계단 길을 걸어  대나무 숲길의 안부로 내려갔다가 나지막한 구릉으로 올라섰습니다. 오름 길에 여러 기의 개인 묘가 고분군 아래에 자리 잡은 것을 보고 여기가 국가로부터 대접받는 조선의 왕릉이었어도 저렇게 개인 묘들이 들어앉았겠나 싶어 고분에 묻힌 아라가야의 왕들에 죄송했습니다. 표고가 백m를 넘지 않는 구릉이 꽤 길게 뻗어나가 끝머리의 32-37호 고분들은 가보지 못하고 31호 고분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후 4호 고분 앞 사거리로 돌아갔습니다. 인근 2-3호 고분을 둘러보며 내버려진 깨진 유리들을 보면서 전체적인 묘지 관리가 왕릉에 미치지 못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부지런히 걸어도 십 수분이 걸리는 외딴 곳에 자리한 1호 고분은 앞서 보아온 고분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묘지 앞에 ‘사적 제85호’와 ‘1호 고분’을 알리는 표지석 두 개와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적혀 있는 안내판이 같이 서 있어 과연 ‘1호 고분’이다 했습니다. 다시 4호 고분 앞으로 돌아가 함안 박물관으로 내려가면서 5-8호 고분을 마저 보았습니다.

 

 

 

  매주 월요일이 박물관의 휴무일인줄 모르고 일정을 잡아 모처럼 찾아간 함안박물관 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전시된 유물들만 보았습니다. 2003년 10월에 개관한 함안박물관은 고대 안라국에 관련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에서 근대유물까지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어 아라가야가 꽃피운 찬란한 문화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에 딱 좋은 곳인데 허탕을 치게 되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박물관에서 발행한 팜플렛에 따르면 안라국(安羅國)이란 고대 함안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로 일반적으로 아라가야(阿羅伽耶)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가야시대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후대에 부쳐진 이름이라 합니다. 아라가야 전성기 때의 권역은 지금의 함안지역 뿐만 아니라 인근 마산의 진동지역과 현동지역, 의령과 진주의 일부지역을 포함했었다는 내용을 보고 여기 도항리/말산리고분군이 엄청 넓게 자리 잡은 것도 다 그럴 만 했다 싶었습니다. 박물관 밖에 전시된 유물 중 제 눈을 끈 것은 암각화고인돌이었습니다. 잔디밭 바닥에 누워 있는 널찍한 적철광바위에 3-4개의 동심원이 그려진 원들이 꽤 여러 개보였는데 사진으로 보아온 울산의 반구대암각화와 비슷했습니다. 이 원들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곧 원시문학의 내용일진데 이를 해독할 능력이 없어 안타까워하면서 박물관을 떠났습니다.

 

 

 

  나선 김에 함안의 명소 한 두 곳을 더 들러보고자 택시를 불렀습니다. 악양루로 이동하는 중 함안에서 태어나고 30년 넘게 택시를 몰고 있다는 자랑 섞인 기사분의 자기소개를 듣고 나서 참으로 안심한 것은 이분이라면 좀 연세는 들었어도 엉뚱한 곳에 내려다 놓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악양루를 찾아 가는 길에 훈련장으로 가는 싸움소들을 보았습니다. 구제역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싸움소들이 두 눈을 연신 껌벅이는 것을 보자 그들의 강인함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렸을 때 꼴을 베어다 먹인 집소처럼 마냥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래로 천이 흐르는 암벽에 면해 있는 악양루에 오르자 남강과 그 방축길이 훤히 보였습니다. 소문만큼 빼어난 경승지는 아니다 싶어 오래 머무르지 않고 낙동강과 남강의 합수점으로 이동했습니다. 4대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남강/낙동강 합수점은 한강 양수리와는 영 딴 판으로 강물이 거의 보이지 않아 적지 아니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한껏 믿었던 기사분이 길을 잘 못 들어 한참 동안 헤매는 바람에 택시비가 제 예상보다 배 이상 나왔습니다. 중간에 길이 아니다 싶어 지도에 나와 있는 길로 가자고 몇 번을 일렀는데 30년 경력의 고집을 꺾지 못해 사단이 난 것입니다. 제가 안내하는 대로 가야읍내로 다시 돌아가 왕복요금을 내겠다는 제 제안을 기사분이 받아들여 요금분쟁은 마무리됐지만 계획했던 인근 합강정 탐방은 취소해야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악양루근처로 다시 가서 “처녀뱃사공”기념비를 사진 찍고나서  가야 읍내로 돌아가 약속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경험만 믿고 지도를 무시하고 가다가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저도 쓸 데 없이 가야로 돌아가 택시비를 더 물었고, 기사분도 메타요금을 다 받지 못했습니다. 기사 분은 나이가 들었다고 경험만 믿고 고집을 부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며 제게 고마워했습니다. 저 또한 다른 일로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의 유일한 프리미엄이 경험의 가치일 텐데 그것도 믿을 것이 못 된다면 어쩌나 싶어 기사 분으로부터 감사인사를 받기가 겁이 났습니다.

 

 

 

  대규모 고분군의 주인공인 아라가야가 망해가는 스토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529년에 대가야와의 결혼동맹을 깬 신라가 가야지역 진출을 도모하자 가야남부의 나라들이 안라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를 주도한 나라가 아라가야였습니다. 아라가야는 자신의 힘과 성장을 알리고 신라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자 안라회의를 소집하고 신라와 백제 및 왜국을 초대했는데 신라는 물론 불참했습니다. 고구려와 왜가 국내사정으로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음을 간파한 백제의 성왕은 왜국에 친밀하게 대하며 백제의 말을 듣지 않는 아라가야를 531년에 침공해 함안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는 이 사건이 있은 후 다음 해 금관가야는 신라에 투항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백제에 복속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아라가야가 신라에 복속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561년으로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기 한 해전의 일입니다.

 

 

 

  중국의 선철 왕언장은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삼국은 망해서 ‘삼국사기’를 남겼는데, 아쉽게도 가야가 남긴 것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혹자는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한 것을 가지고 신라에게 역사의 오명(汚名)을 남겼다고 따질지도 모릅니다. 만주벌을 통치한 고구려의 명성이 서라벌의 신라에 패망한 것을 보고 허명(虛名)이었다고 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주색에 빠져 신라에 멸망한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란 이름은 추명(醜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야는 삼국이 남기지 못한 지명을 남겼습니다. 어느 누가 가야에 오명과 허명, 그리고 추명을 남겼다고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입니다. 곱든 밉든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땅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낙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가야 고분을 탐방했고, 덕분에 아직도 ‘가야’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 가야읍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가야'에서  하룻밤을 보낸 소회를 탐방기로 가름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