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수로왕능비릉
*탐방일자:2011. 3. 27일(일)/4월3일(일)
*탐방지 :경남 김해소재 구지봉/수로왕비릉/수로왕릉/국립김해박물관
*동행 :나홀로
낙남정맥 종주 길에 김해 땅 옛 가야의 유적지 몇 곳을 탐방했습니다. 낙남정맥이란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져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다 김해 앞에서 낙동강으로 침잠해 끝이 나는 긴 산줄기를 이릅니다. 그러기에 낙남정맥을 종주하려면 낙동강 남쪽에 자리했던 옛 가야의 땅을 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8년 10월 낙남정맥에 첫발을 들인 후 그간 고령가야의 진주, 소가야의 고성, 아라가야의 함안을 차례로 지나 드디어 금관가야의 김해에 이르렀습니다. 김해는 김수로왕이 가야를 세우고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와 결혼해 158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일생을 살아온 곳입니다. 낙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3월27일에는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을, 그리고 4월3일은 수로왕능과 국립김해 박물관을 둘러보았습니다.
1)구지봉(龜知峰)
가야(伽耶)의 건국은 구지봉(龜知峰)에서 시작됩니다. 김해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구간들이 여기 구지봉에 올라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꼭대기의 땅을 파면서 부른 노래가 구지가((龜知歌)로 구간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가야나라를 세울 김수로왕을 맞습니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와 더불어 3대 고대가요(古代歌謠)의 하나인 구지가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전해집니다.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내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구간들은 거북이를 겁주어 머리를 내어놓게 했는바 이러한 “머리 내놓기”를 한자로 표현하면 바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의 首露가 됩니다. 여기서 거북은 지모신(地母神)을 뜻하며 머리를 내놓는 것은 출산(出産)을 의미한다 합니다.
구지가를 낳은 구지봉은 수로왕비능과 인접해 있는 봉우리로 해발고도가 백m도 채 안 되는 낮은 구릉입니다. 이 당시 지금의 김해시가지는 모두 바닷물에 잠겼다 하니 구로봉의 높이는 지금보다 더 낮았을 것입니다. 송림 한가운데 산마루에 세워진 바위 비석은 오늘도 구지봉을 찾은 탐방객 모두에 가야 건국의 역사를 반듯하게 증언했을 것입니다. 바위 비석에서 몇 걸음 옮겨 한석봉이 썼다는 龜知峰石(구지봉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인돌의 상석을 보았는데 생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4-5세기 경 이 지방을 다스린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 지방 구간들이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를 나지막한 구지봉에서 들었기 망정이지 동쪽 가까이 자리한 분성산에서 들었다면 꼼짝없이 해발376m의 가파른 고산을 오를 뻔 했습니다. 그랬다면 인근 주민들도 쉽게 오르지 못해 소생의 계절 봄을 맞아도 구지봉의 썰렁함이 한 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모두 이 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접근이 편하고 오르내림이 별반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다른 유적지보다 누구나 쉽게 올라 구지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만든 김해시의 배려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2)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서력42년 김해지방에 금관가야를 세우고 나머지 다섯 가야를 같이 출범시켜 6가야의 맹주로 등장한 수로왕은 그 여섯 해 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입니다. 공주는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스스로 이름을 밝힌 것으로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생전의 수로왕비 허황옥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그리다가 왕비가 태어나고 자란 아유타국이 어떤 나라이기에 그동안 듣도 보도 못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일었습니다. 문제의 아유타국을 인도 간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로 보는 설과, 이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로 보는 설외에도 몇 가지 설이 더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창희님이 지은 “살아있는 가야사이야기”에 따르면 고고학자 김병모님은 쌍어문에 대한 조사를 심화하여 중국보주(普州)출자설을 내놓았는데 허황옥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 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보주로 갔다가 양쯔강-황해-남해-김해로 이어지는 해로를 따라 가락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며, 또 인제대 이영식교수는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것이 아니고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김해로 온 이주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허황옥이 한반도 서남해에 있던 왜(倭)출신일 것이라는 역사학자 이희근님의 주장이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에 방영이 종료된 KBS의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왕의 큰 아들이 아유타국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드라마에서는아유타국을 왜국의 한 나라로 그렸습니다.
이상의 다섯 설 가운데 어느 설이 되었든 허황옥의 사랑의 여로는 당시로는 목숨 건 험난한 바닷길이어서 수로왕과 결혼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은 것이 잘 되었다 싶습니다. 삼국유사는 허황옥을 맞으러 가는 길을 “드디어 유천간을 시켜 날랜 배를 몰고 준마를 끌고 가 망산도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 분부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고 자세히 적어놓았습니다. 이 길을 복원하는 데는 여러 설이 있어 성공하지 못했지만 설화에 나와 있는 길을 “허황후 초행길”이라 명명하고 역사체험코스로 만들고자 한 김해시의 시도는 살만하다는 생각입니다.
망천고개에서 낙남정맥 종주산행을 마친 후 김해시내로 들어가 오후 5시경 수로왕비릉을 찾아갔습니다. 6가야의 수많은 왕 중에서 죽어서 왕릉에 모셔진 분은 수로왕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이 따로 떨어져 있어 이번에는 구지봉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수로왕비릉을 먼저 탐방했습니다. 수로왕비릉의 구남문(龜南門) 안으로 들어가 오른 쪽으로 숭보재와 고직사가, 왼쪽으로 잔디밭이 조성된 묘역의 중앙통로를 따라 북쪽 상단에 자리한 왕비릉을 찾았습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왕비릉은 커다란 원형봉토분으로 그 지름이 16m-18m, 높이가 5m라 합니다. 봉분 앞 비석에 아유타 공주 허황옥이 중국의 보주(普州)에서 건너왔다는 중국보주출자설에 힘을 보태줄 수도 있는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는데 바짝 다가가지 못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수로왕비릉에서 제 눈을 끈 것은 파사석탑(婆娑石塔)이었습니다. 이 탑에 관한 일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지금은 폐사가 된 김해시내 호계사에서 이곳으로 옮겨놓은 파사석탑은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건무24년인 서력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라 합니다.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바다를 건너지 못한 공주는 부왕에 아뢰어 이 탑을 배에 실고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불법을 받들지 못하다가 질지왕 2년인 452년에 남쪽 언덕인 기출변에 절을 짓고 복을 빌어 남쪽의 왜를 진압했다 합니다. 지금은 여기 묘역에 파사각을 지어 파사석탑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5층으로 된 이탑은 돌이 약간 붉은 반점을 띄고 있었습니다.
허황후의 행보가 김해 땅에 머무르지 않아 합천의 가야산에도 황후의 족적을 찾아볼 수 있으니 이 산의 칠불봉에 관련된 전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김수로왕이 아유타국공주인 허황옥과 결혼해 낳은 왕자 열 명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과 삼남은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한 후 생불이 되었다는데 왕비 허황옥은 칠불봉의 그림자가 비치는 해인사 앞 영지를 찾아 발심 출가한 일곱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구지봉 구릉에 왕비가 모셔진 것은 조선조인 1446년 수로왕능과 함께 정화되고 나서이고 능비와 상석이 설치된 것은 1647년의 일입니다. 이곳에 모셔지기 전에는 죽어서도 출가한 아들들을 못 잊어 가야산의 해인사에서 유했을지 모릅니다.
거의 2천 년 전에 아유타국에서 이역만리 가야로 이주해 수로왕과 해로한 허황후야말로 이 땅에 다문화가족의 기원을 연 여인입니다. 저는 이제껏 허황후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야에서 홀대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저희들이 다문화가족에 마땅찮아 하는 눈길을 보낸다면 허황후를 따뜻하게 맞은 가야백성들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떴습니다.
3)수로왕릉
한식을 사흘 앞두고 김해의 수로왕능을 찾아가 수로왕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가 묻혔든 또 그 자리가 어디든 관계없이 산 자와 죽은 자가 대화를 나누는 곳이 묘지입니다. 묵언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 대화는 주로 산 자가 죽은 자의 살아생전의 모습과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봄이 오면 성묘를 가는 것은 봄이 기억을 되살리는 소생의 계절이어서 추억을 되살리며 대화를 끌어가기가 쉬워서일 것입니다. 말상대가 국왕이 되면 개인의 추억뿐만 아니라 나라의 역사도 같이 되살아나기에 수로왕과의 대화는 자연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로왕은 서력42년에 탄강하여 여기 김해에 금관가야를 연 가야국의 시조입니다.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한 설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은 서기42년입니다. 이해 3월 계욕(稧浴)하는 날 구간들은 구지봉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 후 하늘로부터 드리워진 자주색 줄 아래를 살펴보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있는 금빛 상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상자에서 꺼낸 둥근 황금알 6개는 집으로 옮긴지 열이틀이 지나 모두 동자로 바뀌었고 열흘 후 그중 한 동자는 키가 아홉 자로 자랐으며 그달 보름 날 즉위를 하였는데 이분이 바로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수로왕이고 이 나라가 금관가야인 것입니다. 나머지 다섯 동자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바 이들 다섯 가야는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결성했습니다. 이 설화는 수로왕 역시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난 천손임을 보여주어 탄생의 신비로움을 더해주었습니다.
평소 검소와 인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수로왕이 시련을 맞은 것은 신라의 석탈해가 침공해와서인데 수로왕은 지혜 겨루기로 탈해를 물리치고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서기48년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정중하게 왕비로 맞았는데 허황옥과 관련되어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는 앞의 “수로왕비능”란에서 얘기 드린 바와 같습니다. 수로왕이 고려 태조 왕건처럼 지역 실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공주를 맞아들였다는 것은 수로왕의 왕권이 건국 몇 년 사이에 견고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수로왕은 탈해의 침공을 물리쳤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천수를 넘겨 158세까지 살다가 서기199년에 마음 편히 세상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컨트리 클럽을 좌우로 가르는 영운이고개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고 택시를 불러 수로왕릉으로 옮겼습니다. 저녁 5시가 다 되어 숭화문을 지나 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수로왕비릉에서 보지 못한 홍살문을 지나자 비로소 왕릉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락루를 지나 능침의 정문인 납릉정문에 이르렀습니다. 납릉정문 현판 양 옆에 새겨진 물고기무늬가 인도에서 널리 사용되는 물고기무늬를 많이 닮은 쌍어문이다 싶어 2천년이나 전해 내려온 역사의 자취를 만나보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 새겨진 비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봉분의 크기가 지름이 22m, 높이가 5m로 수로왕비릉보다 약간 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봉분의 전모를 보는데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봉분 앞의 문석인과 무석인 및 석마는 조선왕릉에서 본 것과 같은 위치였는데 봉분 뒤편의 석호와 석양등이 보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조선왕릉에 비해 초라해 보였습니다.
능침에서 숭신각으로 자리를 옮겨 태양문양이 새겨진 신도비를 보았습니다. 신도비 상단의 태양문양도 납릉정문의 물고기무늬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태양무늬와 유사해 허황옥공주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건너 왔다는 설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왕릉경내에는 숭신각 외에도 숭선전, 안향각, 제기고 등 각종 부속건물이 많습니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이들 건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봄가을로 제를 올리는 춘추제례에는 수로왕의 후손들인 김해 김씨들이 주로 참석하겠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 모든 잠룡들이 얼굴을 내보여 시장판처럼 북적대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보았는데 이번에는 경내가 조용했습니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춘광이 가득히 내려앉은 뒤뜰로 나갔습니다. 나물 캐는 모녀의 춘심을 벚꽃과 목련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왕릉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릉 탐방 3주 후에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랑진의 만어산을 찾아가 왕릉에서 못 다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수로왕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해 노심초사했나를 들려주는 다음 설화를 삼국유사에서 옮겨 적는 것으로 수로왕과의 긴 대화를 이만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니, 부근에 가라국이 있었다. 옛날에 알이 해변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당시 나라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연못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는 나찰녀 다섯 명이 독룡과 오가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영글지 않았다. 왕은 주술을 막고자 했으나 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에게 청하여 설법을 한 연후에야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아 이후로는 폐해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바위로 변하여 골짜기에 가득 찼는데 각기 쇠북과 경쇠소리가 났다.”
4)국립김해박물관
수로왕릉에서 20분 거리의 국립김해박물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마침 일요일이라서 평일보다 1시간 늦은 저녁 7시까지 문을 열어놓는다는 정보를 얻어듣고 나서입니다. 이른 아침 산본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박물관 탐방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40분가량 시간이 나 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들르기를 정말 잘했다 싶은 것은 “낙동강유역의 선사문화”, “가야의 여명”, “가야제국의 발전” 및 “가야와 가야사람” 이라는 테마로 꾸며진 전시실을 둘러보며 나름대로 이번 낙남정맥 종주 길에 들른 가야의 유적지에서 보고 들은 바를 총정리 한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오는 길에 구입한 책 “철의 왕국 가야”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간행한 명품선집으로 이번 낙남정맥 종주 길에 가야의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배운 것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자를 풀이해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패총이 무엇인지 큰 사진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노출전시관을 보았습니다. 시내 대성동의 나지막한 구릉이 고분인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내 보여주는 노출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탐방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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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땅을 지나는 낙남정맥 종주는 수로왕릉 탐방일 다음날 모두 마쳤습니다. 종주 길에 가야 유적지 몇 곳을 들러보았고 가야에 관한 서적 3권을 사서 우선 박창희님이 지은 “살아 있는 가야사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나머지 두 권을 마저 읽어 잊혀진 왕국 가야를 보듬고자 합니다. 내친 김에 낙동강을 둘러싸고 있는 낙동강둘레산줄기 환주에 나설 뜻입니다. 그리되면 3-4년 후 낙남정맥 길 거의 다를 다시 한 번 걷게 됩니다. 그때쯤이면 가야왕국에 관한 저의 지식도 많이 쌓일 것입니다. 가야의 자취가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다시 수로왕과 왕비를 다시 불러내어 이번에 못다 한 심중의 이야기를 나눠볼 뜻입니다.
<탐방사진>
1)구지봉(3월27일)
2)수로왕비릉(3월27일)
3)수로왕릉(4월3일)
4)가야박물관 및 노천전시관(4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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