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동정맥 종주기

낙동정맥 종주기6(화엄늪갈림길-천성산-영산대 갈림길)

시인마뇽 2011. 8. 11. 11:00

                                                     낙동정맥 종주기6

 

 

                                 *정맥구간:화엄늪갈림길-천성산-영산대갈림길                                

                                 *산행일자:2011. 8. 9일(화)

                                 *소재지 :경남양산

                                 *산높이 :원효산921m, 천성산813m

                                 *산행코스:홍룡사-화엄늪갈림길-화엄늪-천성산-영산대갈림길-영산대학교

                                 *산행시간:8시27분-16시57분(8시30분)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동문

 

 

  낙동정맥 종주 길에 들른 화엄늪은 넓었습니다. 안개 속에 몸을 숨긴 화엄늪이 그 크기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넓게 느껴졌습니다. 안개가 가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면 아무리 화엄늪이 넓다 해도 그 끝이 보일 것이 분명하기에 크기를 가늠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광활하다 해도 영남알프스의 사자평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원효산의 화엄늪이 끝없이 넓게 느껴진 것은 순전히 안개 덕분입니다.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한 밤중에는 사방이 캄캄해 늪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기에 넓고 좁고를 이야기할 계제가 못됩니다.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낮에는 십 수 분만 내달려도 한 끝에 다다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해 실제 크기가 한 눈에 잡힙니다. 화엄늪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질 수 있는 것은 안개가 이 늪을 휘감아 오로지 상상으로만 그 크기를 가늠할 때뿐인데 이번이 그러했습니다.

 

 

 

 

  저는 희뿌연 안개를 좋아합니다. 제가 농도 짙은 안개를 더욱 좋아하는 것은 세상 만물이이 안개 속에 숨어 모처럼 편안히 쉴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공익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비밀스러운 부분도 다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투명성 확보가 곧 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사람들은 툭하면 버선목을 뒤집어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아름다운 비밀은 추억으로 숨겨두고 성공한 기업의 경영 비밀은 그 기업의 노하우(know-how)로 남겨두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온 저로서는 투명성제고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보여 달라는 주장하는 이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밤의 어둠은 이 세상을 모두 검은 색으로 덮어버리고  낮의 밝음은 이 산하의 현란한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하지만 안개는 이른 아침 밤과 낮의 완충지대에 자리 잡아 희뿌연 색깔로 이들 간의 색 대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안개의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낮과 밤의 양극사이에 완충지대(Buffer Zone)를 만들어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기에 세상만물이 안개 속에 숨어 편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화엄늪에 몸을 숨긴 도롱뇽은 저처럼 안개에 고마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원하지도 않은 천성산터널공사 중단송사의 주인공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차가운 시선이 그간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꾸몄을지도 모를  송사가 훤한 대낮에 진행될 때마다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도롱뇽이기에 설사 인간변호사가 대리 출석을 한다 해도 신경이 엄청 쓰였을 것입니다. 1,400여 년 전 원효대사께서 여기 화엄늪에서 수천 명의 불제자들에 화엄경을 강의하실 때 그분들과 함께 들은 것 말고는 인간들과 이렇다 할 인연을 맺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별안간 한 여스님이 자신들의 생존권확보를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몸 둘 바를 몰랐었기에 낮과 밤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기를 도롱뇽은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도롱뇽을 만나 인간들의 괴롭힘에 대해 사과 말을 전하고자 했으나 안개 속에 몸을 맡기고 편히 쉬고 있을 그들을 불러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돌아왔는데 역시 잘한 일 같습니다.

 

 

 

 

  부산역에서 첫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2번 출구로 나가 바로 옆 음식점에서 아침을 들고자 했으나 문을 열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지나가는 몇 분에 물어 근처 시장 안의 한 음식점을 찾아갔습니다. 값이 저렴하고 양도 적지 않은 얼큰한 맛의 선지국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범어사역으로 되돌아가 2번 출구 아래 정류장에서 언양 가는 12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양산 시내에서 한참동안 더 가 다다른 대성에서 렌트카로 바꿔 탄 것은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홍룡사로 가는 노선버스가 없는데다 택시도 양산에서 불러야 해 5천원을 가지고는 턱도 없어서였습니다.

 

 

 

  아침8시27분 홍룡사를 출발했습니다. 홍룡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오른 쪽 위 홍룡폭포(虹龍瀑布)를 먼저 들렀습니다. 4년 전 겨울 처음 보았을 때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고 4일 전에는 이번에 들르려고 먼발치서 사진만 찍고 내려가 홍룡폭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폭포수가 3단으로 떨어지면서 생기는 물보라가 햇빛을 만나 빚어내는 무지개가 일품이라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 그 오색영롱한 빛 놀음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낙차가 크고 수량도 많아 움푹 파진 소(沼)로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장대한 폭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양산8경을 다 둘러본 듯 흐뭇했습니다. 대웅전과 종각 및 요사채 등 몇 채만 조촐하게 들어서 있어 신라 문무왕 때 이 절을 창건한 원효대사의 명성이나 오랜 역사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해 보이는 홍룡사를 잠시 둘러본 후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습니다. 나무계단 길로 시작되는 오름길은 경사가 급해 그리 오래 걷지 않았는데도 등 뒤에 땀이 배기 시작했습니다. 표고를 5백m가량 높여야 다다를 수 있는 “화엄늪/원효암” 갈림길로 오르는 길이 땡 볕에 오른다면 비지땀을 엄청 흘릴 비알 길이어서 집중호우만 아니라면 어떤 비라도 감수할 뜻이었는데 하늘이 때 맞춰 잔비를 뿌려주어 고맙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금세라도 비를 내릴 것 같은 담천이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찔끔찔끔 뿌려대는 빗방울에 놀라 비옷을 꺼냈다가 그냥 넣으면서 이번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빌었습니다.

 

 

 

  9시35분 화엄늪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홍룡사에서 1.4Km 거리의 화엄늪 갈림길을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1시간이 조금 더 걸린 것은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미끄러워 천천히 걸어서인데 이 정도의 속력만 유지해도 6-7시간이면 이번 산행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남은 길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갈림길에서 십 수분을 쉰 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군부대가 들어섰던 원효산을 서쪽으로 우회했습니다. 원효산 정상부근은 과거 군부대에서 지뢰를 매설한 지역으로 그 후 제거 작업을 마쳤지만 혹시라도 찾지 못한 지뢰가 터질 수 있다며 출입을 금지해 이 산을 빙 돌아 낸 우회 길로 들어섰습니다. 4년 전 혼자서 한 겨울에 동쪽으로 돌아간 이 산을 이번에는 한 여름에 친구와 함께 남은 우회 길을 서쪽으로 에도는 것이어서 넉넉잡고 1시간 후면 원효대사가 정좌하고 계실 원효산 정상부근을 완전하게 한 바퀴를 빙 돌게 됩니다. 그렇다고 원효대사께서 저를 불러 가상하다며 칭찬 말씀을 주시리라 기대하지는 않는 것은 전국적으로 원효의 이름을 딴 산봉우리들이 꽤 여럿 있고 “조선사찰전서”에 수록된 절만도 원효사 넷에 원효암이 열둘이라는데 원효대사께서 때 맞춰 이 산에 머무르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덜길이 끝난 즈음 샘터를 막 지나 제 길을 찾느라 잠시 멈칫하다가 오른 쪽 위 바위 길로 오르자 다시 제 길이 보였습니다.

 

 

 

 

  10시50분 경 화엄늪에 올라섰습니다. 짙은 안개에 가린 화엄늪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그 광활함을 그려보았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산악서를 펴낸 김장호님은 그의 또 다른 저서 “韓國百名山記”에 원효대사께서 이 산 암자들에 기거하는 수천 불제자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한 자리가 바로 여기 화엄벌입니다. 당대 최고의 스님이신 원효대사께서 최고의 경전으로 불리는 화엄경을 강의한 최고의 늪지 화엄벌이 세인들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천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내원사의 한 여스님이 천성산터널공사를 저지하고자 백일단식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된 것인데, 이 스님께서 목숨 걸고 저지에 나선 것은 화엄늪으로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화엄벌의 도롱뇽을 살리겠다는 높은 뜻에서였다 합니다. 수천 제자들과 함께 원효대사로부터 화엄경을 같이 들었을 수많은 도롱뇽들도 이 스님의 본뜻에는 고마워했을지 모르지만 그 방법에는 반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산 밑에 터널을 뚫는다고 늪지의 물이 밑으로 새 늪이 마르고 그 결과 도롱뇽이 전멸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도롱뇽들도 절대로 믿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원효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수 천 명의 제자들이 대사님의 고귀한 뜻을 중생들에 가르쳐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이 나라에서 기술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사전에 대비하지 않고 무조건 공사를 강행해 자기들을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터널공사가 끝나 고속열차가 쌩쌩 달리는 요즈음 이 스님의 행동이 과했다는 것이 중론이어서 본의 아니게 세금을 축내 죄송하다는 사과성명을 내리라 기대했는데 다시 4대강 살리기 공사에 반대하고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 버릇 개도 안준다"는 옛 말씀이 저 같은 범인뿐만 아니라 고매하신 스님에도 해당되는 것 같아 영 씁쓰레했습니다.

 

 

 

 

 

  12시31분 해발812m의 천성산을 올랐습니다. 동행한 친구는 물론 저도 비가 많이 오는 한 여름에 화엄늪을 와본 적이 없어 이번이 도롱뇽을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많이 기대했는데 안개가 시야를 거의 완벽하게 가려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천성산으로 향해 자리를 떴습니다. 원효산의 북서쪽을 돌아 오른 쪽으로 원효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러 잠시 쉬었습니다. 왼쪽으로 난 천성산 길로 들어서 조금 진행하자 전에 한 번 사진 찍었던 허리 잘린 시멘트 기둥이 보여 반가웠습니다. 안개는 가시지 않았고 길바닥이 미끄러워 은수고개로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져 뒤로 자빠지는 바람에 땅에 부딪친 오른 쪽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오른 쪽으로 미타사 길이 갈리는 은수고개에서 봉우리하나를 왼쪽으로 돌며 조금씩 고도를 높여 가는 중 잠깐 잠깐 얼굴을 내미는 태양을 맞았습니다. 임도 왼쪽 위 능선을 따라 올라선 천성산 정상에 “천성산2봉 비로봉 해발812m"의 표지석이 서 있었습니다. 원효산을 천성산1봉으로 그리고 여기 천성산을 천성산2봉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지만 이 산행기에서는 원효산과 천성산으로 나누어 적습니다. 서해안을 강타한 태풍이 북한 땅에 상륙했다는 데도 서풍이 꽤 강해 산마루를 넘어가는 구름의 몸놀림이 쏜살보다 더 빨라 보였습니다.

 

 

 

 

  원효산 아래 화엄벌이 원효대사를 따르는 불제자 수 천 명의 야외학습장이었다면 천성산의 내원사는 원효대사의 문하생 천 명(千 名)이 도를 터득한 도장이었습니다. 내원사의 역사는 문무왕13년인 서기631년에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판자를 던져 장마로 무너진 흙더미에 묻힐 위기에 처한 당나라 태화사의 1천 대중을 구출한데서 시작됩니다. 이들 1천 대중이 대사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대사께서 이 산에 내원사와 89개의 암자를 지어 이들을 머물게 했다 합니다. 천명의 제자들이 도를 터득했다면 당연히 성인(聖人)이 되었을 것이기에 누구라도 감히 이 산을 천성산(千聖山)으로 부른다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원효대사가 앉아계신 원효산이 천명의 성인들을 모신 천성산보다 90m가까이 높은 것으로 보아 당나라에서 온 천명의 성인을 다 합쳐도 우리나라의 원효대사에는 한참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14시43분 천성산 북쪽 바로 아래 “영산대/짚북재” 갈림길로 되돌아왔습니다. 천성산 정상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든 후 북쪽의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몇 분을 더 걸어 만난 “영산대/짚북재” 갈림길에서 오른쪽 영산대방향으로 진행해야 할 것을 짚북재 방향으로 직진한 것이 1시간 20분이 더 되는 긴 시간 알바의 시작이었습니다. 또 다시 나무계단 길을 내려가 평탄한 길을 걸으며 친구에게 이런 좋은 길은 넋 놓고 걷다가 길 잃어버리기가 십상이라 말했는데 이 말처럼 길을 잘 못 들어 알바를 확인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왼쪽 아래로 내원사매표소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전망바위에 이르자 의연한 산줄기와 그 사이 계곡이 깊이 보여 천성산도 역시 산이 거한 고산이다 하면서도 오른 쪽 아래로 보여야 할 시가지가 전혀 보이지 않아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나무계단을 지나 고도가 급속히 낮아지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발걸음을 멈춘 것은 이쯤해서 계속 진행여부를 결정해야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꼼꼼히 지도를 살펴본 즉 이제껏 걸어온 산줄기는 짚북재로 내려가는 천성산 북쪽의 능선이고, 저희들이 가야할 능선은 천성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가는 낙동정맥이어서 전혀 다른 줄기였습니다. 별 수 없이 천성산으로 되돌아가 길을 다시 찾기로 하고 친구에게 알바를 알렸습니다. 느긋하게 내려간 길을 서둘러 되올라가는 것이 몇 배 더 힘든 데도 내색 않고 따라준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다른 산이라면 삼거리 갈림길마다 정맥 길을 알리는 표지기들이 걸려 있는데 이 산에서는 정맥종주 표지기를 단 한 장도 보지 못해 혹시라도 도립공원 측에서 떼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내려갈 때 쉬어 간 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려 “영산대/짚북재”갈림길로 회귀하는데 40분이 채 안 걸렸습니다.

 

 

 

 

  15시52분 영산대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되돌아온 “영산대/짚북재” 갈림길에서 영산대방향으로 내려가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한 번 알바를 심하게 한 터라 산행이 조심스러워져 몇 번이고 나침반을 꺼내 진행방향을 확인했습니다. 별 변동 없이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어가면서 불안했던 것은 표지기가 안보여서였는데 반시간 쯤 되어 “강남건축사동호회”표지기가 보여 반가웠습니다. “영산대/짚북재” 갈림길에서 안적고개로 이어지는 정맥 길은 정맥종주 꾼 외에 다른 산객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데다 정맥표지기도 걸려 있지 않아 오로지 지도만 보고 진행해야해 엄청 신경이 쓰였습니다. 북동쪽으로 뻗어나가야 길이 중간에 잠시 동쪽으로 완전히 휘어가 또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가하고 잔뜩 긴장했는데 얼마 후 낙동정맥이라 쓴 하얀 헝겊자락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며 안도했습니다. 조금 더 걷자 오른 쪽 아래로 임도가 보여 안적고개가 멀지 않겠다 했습니다. 곧이어 천성산-정족산의 낙동정맥과 짚북재에서 영산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교차하는 안부사거리 영산대 갈림길에 도착해 짐을 벗어 내려놓고 푹 쉬었습니다.

 

 

 

 

  앞서 알바 길에서 그대로 진행해 짚북재까지 내려갔다면 동쪽으로 1.9Km를 이동해 영산대 갈림길로 바로 올라오는 길도 있는 가 봅니다만, 그리해도 정맥 길을 이탈한 것이기에 아까 “짚북고개/영산대학” 갈림길로 되돌아간 것은 잘 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천성산의 짚북재는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이라 합니다. 이번에 내려갈 뻔 했던 짚북재는 천성산 정상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 밖에도 상리천이 쌍갈래로 뻗어 오른 상단에, 동서로 주남과 산하로 내리는 잘룩이 마루터기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짚북재(集鼓峙)란 이름이 이 산이 품고 있는 암자들에 시간을 알려주고자 북을 매달아 쳤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하니, 한 곳에서 북을 쳐서는 그 많은 암자들에 일제히 시간을 알릴 수 없어 여러 곳에다 북을 설치했을 것이고 보면 그짚북재가 여러 곳에 있다는 전설이 설득력이 있게 들립니다.

 

 

 

 

  16시57분 영산대학으로 하산해 낙동정맥 6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영산대 갈림길에서 급하게 떨어지는 동쪽 사면에 갈 지(之)자로 길을 내어 내려갈 만 했습니다. 300m 넘게 급하게 고도를 낮추어 내려선 곳이 영산대 캠퍼스로 높은 곳에 위치해 다음에 저 아래 시내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는 일도 만만치 않겠다 싶었습니다. 동행한 이상훈교수의 고교동창인 이석인님이 차를 갖고 와 저희들을 기다렸습니다, 이 분 차로 천성산온천장에서 목욕을 한 후 일광해수욕장 앞 동해바다를 조망한 후 인근 음식점에서 원님 덕분에 나발 한 번 잘 불었다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로 고급 복요리로 배를 불렸습니다. 부산역에서 이분에 고마움을 표한 후 23시에 부산역을 출발하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원효대사님을 끝내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안개가 가셔 원효산 정상에 정좌하고 계실지도 모를 대사님을 뵐 수도 있겠다 싶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으나 끝내 원효산은 정상을 내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 덕분에 이 땅에서 숙면을 취하고 계실 대사님을 아직은 깨울 때가 아닙니다. 뒤뚱거리기는 해도 우리나라는 북녘 땅 나라보다 훨씬 잘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두고온 화엄늪의 짙은 안개를 그리며 눈 좀 붙이고자 합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