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동정맥 종주기

낙동정맥 종주기15(시티재-도덕산-이리재)

시인마뇽 2011. 12. 28. 18:03

                                                      

                                                         낙동정맥 종주기15

 

 

 

                                        *정맥구간:시티재-도덕산-이리재

                                        *산행일자:2011. 12. 19일(월)

                                        *소재지 :경북경주/영천

                                        *산높이 :도덕산703m

                                        *산행코스:시티재-오룡고개-도덕산-이리재-수성리버스종점

                                        *산행시간:7시24분-15시54분(8시간30분)

                                        *동행 :나홀로

 

 

  낙동정맥에 오르기 하루 전 포항의 오어사(吾魚寺)를 들러 신라의 고승 혜공대사님을 뵈었습니다. 운제산에 자리한 오어사(吾魚寺)는 혜공대사와 관련한 재미있는 설화가 서려있는 절입니다. 자장율사, 의상대사와 원효대사 모두 혜공대사와 함께 이 절에 머무르며 수도했던 스님들인데 이 절의 이름과 관련해 일화를 남긴 두 분은 혜공대사와 원효대사입니다.

 

  오어사에 관한 이야기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이 책의 ‘권 제4 의해(義解)’편에 여러 스님이 나오는데 혜공스님에 관해서는 “혜숙과 혜공이 여러 모습을 나타내다(二惠同塵)”라는 장에 실렸습니다. 신라의 대승 혜공은 늘그막에 지금의 오어사인 항사사(恒沙寺)로 옮겨 살았습니다. 이 때 원효는 여러 불경의 소(疏)를 지으면서 항상 혜공을 찾아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고, 가끔씩은 서로 말장난을 했다 합니다. 어느 날 원효와 혜공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봤는데 혜공이 원효의 변을 가리키며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라고 말한 데서 오어사(吾魚寺)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일연은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원효법사가 한 말이라 하는데 이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했으나, 오어사(吾魚寺)라는 절 이름은 계속 전해져 오늘까지 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의 집에서 품을 파는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기를 터뜨려 천진공의 생명을 구한 혜공은 신령스럽고 기이함이 드러나자 승려가 되었습니다. 만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춤을 추었고 종종 절의 우물에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는 등 기행을 보인 혜공은 늙어 옮긴 이 절에서 원효대사를 만나 위 일화를 남긴 것입니다. 죽을 때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입적하는 등 신비스런 자취를 많이 남긴 혜공스님이 일찍이 후진의 학승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서 “이것은 내가 예전에 지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합니다.  일연은 이래서 혜공스님이 승조의 후신임을 알았다고 ‘二惠同塵’ 장(章)에 덧붙였습니다.

 

  아침7시24분 시티재를 출발했습니다. 포항버스터미널에서 6시30분에 하양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 안강을 거쳐 안강휴게소로 이동했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급강하해 장갑을 벗고 스틱 길이를 조절하는 그새에 손끝이 시려왔습니다. 휴게소 고개마루에서 영천 쪽으로 조금 내려가 표지기가 걸린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 길에 낙엽이 쌓여 자칫 잘못하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겠다 싶은 오름길을 조심해서 올라가는데 고라니 두 마리가 제 앞을 가로질러 질주했습니다. 묘지2기가 있는 능선에 서 오른쪽으로 올라가 덤불길을 지났고, 이내 안강휴게소 바로 위 봉우리에 다다라 낙동정맥 마루금에 복귀했습니다. 8시 정각에 올라선 묘지봉인 363m봉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오른 쪽으로 꺾어 얼마간 높낮이가 별로 차이나지 않은 평탄한 능선 길을 따라 걸어 ‘수봉학원개교70주년기념산행’ 표지판 앞을 지났습니다.

 

  9시15분 삼각점이 박혀 있는 512.5m봉에 올라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얼마간 평탄한 길이 방향을 조금씩 바꿔 가며 더 이어져 오랜만에 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데 정작 한 여름에 매미와 함께 산중음악회를 즐겨 열던 산새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들도 숨죽이고 바람소리조차 잦아들자 산속에 적막감이 감돌아 스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른쪽으로 삼성산이 아주 가깝게 보이는 안부에 이른 후 곧바로 비알 길을 올랐는데 512.5m봉까지 고도차가 100m정도 밖에 안 되어 단숨에 올랐습니다. 망부석 및 묘비 등이 갖춰진 제대로 된 묘지가 들어선 512.5m봉에 삼각점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쳐 바로 위 삼성산 갈림길에서 쉬었을 텐데 삼각점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에서 사진 몇 장을 더 찍으며 숨을 돌렸습니다. 조금 더 오르자 오른 쪽으로 삼성산 길이 갈리는 분기점이 나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룡고개로 향했습니다.

 

 

 

  10시31분 오룡고개를 막 지나 20분 넘게 쉬었습니다. 삼성산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내리받이 길은 경사가 급했습니다. 모처럼 꺼내 신은 겨울용 등산화가 뒤축이 많이 달아 엉덩방아를 찧지 않으려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220m가량 고도를 낮추어 묘지가 들어선 안부로 내려갔다가 완만한 길을 따라 다시 올랐습니다. 삼각점이 박혀 있는 덤불봉을 지나 다시 내려선 곳이 오룡고개로 마침 왼쪽 아랫수홍 마을 쪽으로 향하는 버스 한 대가 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 전신주 옆 임도로 들어섰다가 곧바로 오른 쪽 묘지로 옮겼습니다. 산행시작 3시간이 넘어 처음 쉬는 것이어서 간이의자를 꺼내 앉고 과일을 꺼내들었더니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12시35분 해발703m의 도덕산을 올랐습니다. 묘지에서 일어나 임도로 복귀했으나 넓은 길은 이내 끝났습니다. 밭가를 지나고 넝쿨 길도 지나자 가파른 치받이 길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걸어 저만치 앞에서 저를 보고 있는 멧돼지 한 마리를 오랜만에 보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등성을 넘어 다른 쪽으로 피해가 눈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왼쪽 옆으로 넓은 폭의 너덜이 보이는 오름길이 급경사의 된비알길이어서 400m이상 고도를 높여 도덕산 정상에 이르는 일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바로 옆 너덜 한가운데로 오름 길이 나지 않아 얼마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는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마루금이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덕산 정상 쪽으로 향했습니다.  분기점에서 15분 넘게 걸어 삼각점과 조금 떨어져 있는 도덕산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때마침 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따뜻해 이곳에서 점심을 들면서 20분가량 푹 쉬었습니다. 왼쪽 아래로 삼포지가, 오른 쪽 아래로 옥산지가 보이는 도덕산 정상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방송대국문과 학형들에 전송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빗자루가 놓인 마당바위를 지나 갈림길에서 마루금을 다시 밟은 시각이 13시9분이었습니다.

 

 

 

  14시43분 민내마을 길이 가리는 장방형팔각정 쉼터에 이르렀습니다. 도덕산에서 내려가 되밟은 마루금은 북서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디가 배티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570.7m을 넘어 왼쪽으로 천장산 길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해발고도390m대까지 내려가자 임도가 나타났습니다. 임도 따라 오른 쪽으로 십수미터를 옮겨 오른 쪽 아래로 옥산서원 길이 갈리는 장방형 8각정의 쉼터에 다다른 시각이 13시37분이었습니다. 옥산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그려놓아 정맥종주 꾼에는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낙동정맥트레일로드’ 입간판을 뒤로하고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을 이리재에서 끝내고 왼쪽으로 20분여 내려가면 임고면 수정리의 버스종점에 이르게 되는데 영천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18시40분에 출발해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막차를 타는 데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지만, 안에 들어가 쉴 곳이 전혀 없는 시골 종점에서 오들오들 떨며 밖에서 긴 시간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은 분명 고역입니다. 그 앞 버스의 출발시간이 16시5분이어서 이 차를 타기 위해 도덕산을 출발하고 나서부터 최대한 속도를 높였습니다. 첫 번째 쉼터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힘껏 내달려 묘지봉을 넘었습니다. 낙엽이 몇 겹씩 쌓인 산길을 지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지막한 봉우리를 더 넘어 다다른 두번 째 쉼터 역시 장방형 팔각정으로 오른 쪽 아래로 민내마을 길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팔각정 안 마루턱에 걸터앉아 10분가량 쉰 후 봉조산 쪽으로 향했습니다.

 

 

  15시34분 영천시와 포항시를 가르는 이리재에 내려섰습니다. 두 번째 쉼터에서 원기를 회복해 오른 쪽으로 봉좌산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로 올라서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지척의 거리인 봉좌산을 들르지 못하고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 614.9m봉에 다다랐습니다. 이제부터는 하산 길이어서 서두르면 16시5분발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쉬지 않고 오른 쪽의 내리받이 길로 하산했습니다. 북서쪽으로 15분가량 걸어 만난 봉우리에서 서쪽 아래로 이어지는 하산 길이 경사가 급해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고 나자 버스를 놓치더라도 무리하게 빨리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속도를 조금 늦추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보이고 차 소리가 들려오는 가했는데 어느새 이리재에 이르렀습니다. 15시34분에 내려선 이리재에서 수성리버스 종점까지 20분 밖에 걸리지 않아 버스 타는데 문제가 없겠다 싶어지자 두 다리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길 건너 들머리를 확인한 후 구 도로를 따라 왼쪽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마음의 여유도 생겨 원기지 저수지 앞에서 잠시 멈춰서서 꽁꽁 얼어 냉랭한 수면을 사진 찍었습니다.

 

 

  수성2리 마을회관 앞에서 웃옷을 갈아입은 후 스마트폰을 켜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메시지가 떠 깜짝 놀랐습니다. 현 질서를 깨트리는 근본적 변화를 바라지 않는 중국이 아들 김정은을 도와 김정일의 뒤를 잇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데 생각이 모아지자 김씨 왕조가 3대째 통치하는 폭압정치에 계속 시달릴 수 밖에 없는 북한주민들이 얼마나 절망할까 걱정되었습니다. 재스민 혁명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지구촌에서 자식에 통치권을 물려주는 북한의 세습왕조는 분명  세계 여러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겠다 싶어지자 부끄럽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도덕산 정상에서 갈림길로 되돌아가는 길에 널따란 마당바위를 지났습니다. 마음 놓고 장난을 쳐도 될 만큼 널찍한 마당바위가 오어사(吾魚寺)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효와 혜공 두 스님이 이 바위를 모르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이분들이 이 바위에 들러 놀고 가셨다면 과연 흔적을 남겼을까 궁금해 한 것은 마당바위에 놓인 빗자루를 보고나서였습니다. 보통사람들처럼 흔적을 남기실리 없는 대사들께서 누구라도 자취를 남길까 걱정해 싸리비(?) 한 자루를 놓고 가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싸리비로 누군가 남긴 흔적뿐만 아니라 그 흔적을 남긴 누군가도 같이 쓸어버리라는 뜻에서 놓고 가신 것이라면 잘만 쓰면 만파식적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대변보다 훨씬 더 고약한 흔적을 들라면 저는 단연 북한의 왕조세습이라 답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조선조도 세습왕조였는데 김씨 일가가 대를 잇는 북한정권이 문제될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많은 분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일가(一家)가 전횡하는 정권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정권일 수밖에 없고, 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사학자 로드 액턴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갈파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절대 권력을 막고 절대부패를 방지하는 길은 민주화 밖에 없기에 재스민 혁명의 민주화열기가 중동지방을 휩쓸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은 그의 아들 김정은에 절대 권력을 넘겨주고 죽었습니다. 천혜의 경승지인 금강산에 붉은 페인트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낙서를 남긴 것만으로도 모자라 권력을 세습시키는 김씨 왕조를 이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다면 이 빗자루가 바로 잃어버린 만파식적이 아니겠는가 하고 혜공대사께 여쭤보고자 합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