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9.서북산 전적비 앞에서

시인마뇽 2012. 9. 6. 13:15

 

                                                      서북산전적비 앞에서

 

 

 

  낙남정맥 종주 길에 올라선 서북산은 경남 마산과 함안을 어우르는 고산으로 해발고도가 738m에 이릅니다. 여항산에서 남동쪽으로 4Km 가량 떨어져 있는 이 산은 정상에 전적비가 세워질 만큼 치열하게 한국전쟁을 치러낸 전장이기도 합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은 여세를 몰아 대전을 점령한 후, 8월15일 광복절 안에 부산을 탈취하겠다는 목표로 8월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서남부지역과 경주-포항지역을 공격하여 유엔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대구의 정면과 좌우측을 공격해 대구에 이어 부산을 점령한다는 작전 하에 낙동강 방어선 전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였습니다. 서갑산을 뺏기고 빼앗는 마산전투도 북한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음은 물론입니다.

 

 

  미(美)25사단장 킨(William B. Kean) 장군은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한국 전쟁 최초로 유엔군의 사단급 반격작전을 펼쳤습니다. 동년 8월7일부터 12일까지 치른 마산전투에서 북한군에 선점된 서북산은 여러 차례 혈전 끝에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유엔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온창일 박사가 그의 저서 “한민족전쟁사”에서 전하는 대로 서북산 전투는 8월7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해 8월말까지 접전이 계속 되었으며, 그 동안 서북산의 주인은 19차례나 바뀌었습니다.

 

  서북산 정상에서 식빵을 들며, 제가 겪은 휴전 후 한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기억하건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후 몇 년간 겪었던 일입니다. 3살 때 6.25전쟁이 발발해 전쟁을 어떻게 치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은 제가 6살 때여서 그 후부터는 그 때 일이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그즈음 동계훈련 차 동네 가까이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미군들을 쫓아가 식빵을 얻어먹은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크기나 맛이 요즘의 제빵 집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식빵을 미군들로부터 얻어먹는 날은 모처럼 배를 불릴 수 있어 그들이 훈련을 나오면 만사 제쳐놓고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드물게 터키 군도 훈련을 나왔는데 그들은 미군들보다 훨씬 인색했고 던져주는 식빵도 밀가루로 만든 고급(?) 빵이 아니고 보리 가루로 만든 시꺼먼 빵이었는데,  이것들도 감지덕지해 받아먹었습니다. 그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면 버리고 간 탄피를 주어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고향 파주에는 미군과 터키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빨간 제복의 영국군도 주둔했고, 제가 대학을 다니는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국으로 돌아간 태국군도 있었습니다. 이들 우방국이 더 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은 그 나라 군인들이 제게 빵을 던져주었기 때문이 아니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목숨 바쳐 지켜주어서입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우방국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전쟁에서 패했다면, 오늘날의 국부는 절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직도 1인당GNP가 천불도 안 되었을 것이고, 자연재해라도 크게 당하면 온 국민이 기아선상에서 헤매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낙남정맥을 종주할 수 있는 것도 이들 나라들이 군대를 파병해 한국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지켜준 덕분입니다.

 

 

  전적비 앞에서 고개 숙여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생소한 남의 나라에 와서 전사한 우방국 장병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그리고 먼저 간 집사람을 떠올렸습니다. 1990년대 후반 어느 해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운 터키에서 대 지진이 일어나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엄청 많다는 방송보도를 접하고 집사람은 주저 않고 방송국에 성금을 보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터키 이재민들을 도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마을 근처에 와서 훈련 나온 몇 몇 터키 군은 밤에 동네로 내려와서 젊은 여자를 내놓으라며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도 작은 누님을 벽장 속에 숨겨 위기를 면하기도 했습니다. 극소수의 터키 군이 저지른 비행이었지만, 어린 제게는 충격적인 일이어서 터키 군에 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집을 잃어 어려움에 처한 터키국민을 도울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자 집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도와줄 차례라며 저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낙남정맥 종주는 단순히 지리산에서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밟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낙남정맥이 치러냈을 역사를 돌아보고 보듬는 일도 함께 해야 제게 길을 내준 낙남정맥이 서운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쉬워 19번이지 그 많은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은 무릇 그 수가 얼마이겠습니까? 전적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한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한 뭇 영혼들의 편안한 영면을 빌며 이 글을 맺습니다.

 

                                                        2012. 9. 6일 산본에서

 

*위 글은 낙남정맥 종주기에 실린 글에 조금 첨가해 재 작성했습니다.

'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 > 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안개의 변신  (0) 2012.09.17
10.나비를 노래하다  (0) 2012.09.09
8.나무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0) 2012.08.21
7.된장의 6덕  (0) 2012.08.16
6.기다림에 감사하며  (0) 201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