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11.안개의 변신

시인마뇽 2012. 9. 17. 11:03

                                               안개의 변신

 

                              

 

 

  산자락을 가득 메운 안개와 동녘 하늘에 솟은 아침 해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금남정맥의 한 능선을 차지하겠다고 벌이는 싸움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원래부터 햇살과 안개는 상극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능선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혼전을 현장에서 지켜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다고 비행기가 못 뜨는 일은 별로 없지만 안개가 짙게 끼었다 하면 자주 이륙이 불허되곤 하는데 이는 햇빛이 안개를 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햇빛을 막아내는 데는 안개가 굵은 빗줄기보다 훨씬 강하고 유용합니다. 이런 안개도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생명을 다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 상대습도가 100%를 넘게 되면 과포화상태의 수증기가 응결해 안개를 만들기에 안개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은 전적으로 공기의 온도변화에 달려 있습니다. 이 공기를 데우는 것 또한 햇빛이어서 햇빛과 장기전에 들어가면 안개가 절대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태양이 어느새 하늘 높이 떴습니다. 태양이 능선 길에 햇살을 뿌리자 안개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능선을 내준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라진 안개가 다시 등장한 것은 골바람 덕분이었습니다. 산골짜기를 꽉 채운 안개가 골바람을 타고 올라와 다시 능선을 먹어 삼켰습니다. 능선 길은 가시거리가 20m도 안될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능선 길을 놓고 벌이는 햇빛과 안개의 공방전은 한국전쟁 때 숱하게 치러낸 고지탈환전을 방불케 했습니다. 3시간 넘게 계속된 공방전은 정오가 다되어 태양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혼전의 현장인 능선 길을 둘러보고 나서야 저는 이 싸움이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알았습니다. 겨울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산에 봄을 불러들이기 위해 안개와 태양이 서로 손잡고 연극을 한 것입니다. 안개의 시체가 즐비하리라는 제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것은 공방전에서 패한 안개가 물방울로 변신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나서였습니다. 남중한 정오의 태양은 나무에 햇볕을 쪼여주고 있었고 가지 끝의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아도 안개의 시신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태양과 안개가 산 능선에서 벌인 공방전은 이 산에 봄을 끌어들이기 위한 자연의 위대한 몸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 선 2월 초순은 아직 땅속의 물이 녹지 않아 어떤 나무든 뿌리로 물을 빨아올릴 수는 없습니다. 나무에 봄기운을 심어주는 방법으로 안개를 만들어 나뭇가지가 직접 물기를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과 이 물기가 얼지 않도록 햇볕을 쪼여주는 것 만한 것이 따로 있겠나 싶었습니다. 안개의 변신을 보고도 속았다며 화를 낼 수 없었던 것은 저도 능선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나마 봄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산속의 생명체가 안전하게 자라도록 서로 힘을 모으는 태양과 안개의 만남을 보고 태양이라는 창과 안개라는 방패의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숙명적 일전이라 생각한 저의 단견이 부끄러웠습니다.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는 나무를 하느님이 만들었다며 예찬했습니다. 나무를 만드신 하느님께 태양과 안개가 손잡고 당신이 만든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거들고 있음을 말씀드려달라고 조이스 킬머에 청해볼 뜻입니다. 이렇게하지 않고서는 산길을 자주 걷는 제가 봄을 불러들이고자 변신을 마다 않은 안개의 노고에 감사할 방법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2012. 9. 17일 산본에서

 

 

 

*위 글은 2007년2월7일자 졸고 “금남정맥종주기2”에서 따와 일부 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