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
하얀 눈이 능선을 덮은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생(生)과 사(死)의 극명한 차이를 보았습니다.
이산에서 만나본 주목나무 한 그루는 자연수명인 천년을 다 채우기에 아직은 너무 어려 보이는 생생한 나무였고 그 옆에 자리 한 또 한 그루의 주목나무는 수피가 다 벗겨지고 줄기만 남은 고사목(枯死木)이었습니다. 두 나무가 태어난 시간적 거리는 몇 세기를 가늠할 만큼 까마득하겠지만 공간적 거리는 기껏해야 2-3m를 넘지 않아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대비됨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이 산 능선에 덩그러니 서있는 이 두 나무들이 서로 못 본채 하고 등을 돌리고 살기에는 같이 셈해야 할 세월이 너무 길어 이들이 한 곳에서 살아가려면 미우나 고우나 말을 트고 지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점차 생명이 다해감이 두렵고 죽은 나무는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이들 두 나무들은 삶과 죽음을 화제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질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의 고사목을 볼 때마다 저들은 무슨 한이 남아 있어 등을 땅에 눕히지 못하고 똑바로 곧추 서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두 나무들을 보고 고사목이 눕지 못하는 것은 한이 남아서가 아니고 살아 있는 나무들에 들려줄 이야기가 새로 생겼기 때문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고사목이 살아있는 나무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생명체로 대우받을 수 있지만 죽고 나면 쓰임새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물건 취급을 받는 다는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지고지선하다는 것도 같이 말입니다. 고사목이 눕지 못하는 것은 설사 죽은 목숨이지만 물건 취급을 받기 싫어서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재작년에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찼습니다.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고개를 높이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한 그 능동적인 동작하나만으로도 저 고사목은 스스로가 생명체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리도 처절하게 눕기를 거부한 고사목들이 세월에 허리를 꺾인 채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들 고사목들이 다시 죽은 것입니다. 제가 이 고사목들을 처음 만난 것이 1970년 봄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키가 훤칠했던 고사목들이 40년이 지나 땅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세상에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되새겼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세월에 맞서 생명을 능동적으로 이어가는종주산행을 멈출 뜻은 아예 없기에 내년 겨울에도 고산종주에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위 글은 작년 2010년 2월 지리산을 김주홍, 이규성, 정병기동문들과 함께 종주한 후 작성한 지리산종주기의 일부를 떼어 전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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