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石佛)의 메시지
대구로 내려가 비슬산을 오른 다음, 내친 김에 경주로 이동해 불교문화의 보고인 남산을 올랐습니다. 신라시대의 석불이 꽤 여럿 자리하고 있는 남산은 가히 석불박물관이라 불릴만한 곳으로, 이 산을 오르는 길에 몇 곳의 석불을 만나보았습니다.
석불을 찾아보기 전에 궁금했던 것은 이 산의 석불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석불이 새겨진 바위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마 유치환님이 그의 시 “바위”에서 노래한 대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는 메시지의 생산자가 아니고 오로지 부처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단단한 그릇이어서 바위만의 독자적인 메시지가 따로 있을 턱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년 세월을 길다 않고 부처님의 메시지를 간직해온 것이 바로 바위이기에 바위가 담아오다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습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은 옷 주름이 섬세하고 유려해 복식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된다 합니다. 이 좌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된 채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1964년 8월에 발굴한 것이라는데 목이 떨어져나간 사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80년 LA올림픽 때 목이 없는 기념물을 세웠던 것은 인종차별을 없앤다는 올림픽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여기 석조여래좌상은 있던 목이 잘려나간 것이기에 그 경우와는 다릅니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 磨崖觀音菩薩像)은 냉골을 따라 상선암으로 올라가다 왼쪽으로 비껴서 있었습니다. 높다란 암벽에 양각한 관음보살상의 투박하면서도 온후한 얼굴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곧추선 두 개의 넓적한 바위에 선으로 새긴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이 여기 삼릉계곡에 자리한 석불의 압권으로 느껴진 것은 마치 스케취북에 그린 듯 선이 섬세한데다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의 여섯 분의 부처님을 한 곳에서 모두 만나 뵐 수 있어서였습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 磨崖石加如來坐像)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 불상이 삼릉계곡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또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크기도 가장 큰데다 자비로운 얼굴과 선의 섬세함이 이제껏 보아온 불상들의 퓨전(Fusion)을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조금만 돌아앉으셨다면 서쪽 멀리 비슬산을 벗 삼을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磨崖菩薩半跏像)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반가상은 칠불암 곧바로 위 절벽 면에 새겨졌는데 독특한 유희좌(遊戲坐)와 볼륨감이 느껴지는 얼굴과 몸매가 이제껏 보아온 석불들보다 훨씬 여유롭게 보였습니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서 여러 기의 석불들을 만나보고 석불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비(慈悲)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에 자비를 베푸시는 희열이 바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것이 바로 미소를 머금은 존안입니다. 남산 삼릉계곡의 여러 석불들이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도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짓는 자비의 미소인 것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께서 오랜 세월 자비로움을 잃지 않은 것은 바로 바위의 견고함 덕분일 것입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가긍히 여겨 이들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사랑을 주시는 것이 자비라면 자비는 부처님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오늘 날 동양의 지혜가 석가모니와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면 서양의 정신문화는 예수의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자비를 베푸셨고, 카톨릭신자인 저도 매주 주말 미사를 올리며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빌어 왔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 분들의 가장 큰 덕목은 자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래서 들었습니다.
*이 글은 2008년 경주남산을 오르고 쓴 산행기 중 석불에 관한 글만을 뽑아 2018년1월13일에 가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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