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유감(雲霧有感)
어제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길에 강원도 동해와 삼척을 경계 짓는 두타산을 오르내렸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서 있는 정상은 막힘이 없어 전망이 일품이라는 것이 정평입니다만, 이번에는 안개가 시야를 가려 먼발치로는 어느 무엇 하나 조망되지 않았습니다.
정상에서 본 것은 죽은 사람의 주거지인 묘지였습니다. 국유지를 점하고 있는 묘지를 이장하지 않으면 무연고 묘로 간주, 임의로 이장을 하겠다는 삼척 국유림관리사무소장 명의의 안내판이 묘지 옆에 세워져 있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불교에서 두타(頭陀)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일컫는다 합니다. 이 안내판을 보고 이 높은 곳에 묻힌 묘주의 선조 분들은 죽어서도 이 높은 정상에서조차 두타를 행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하산 길에 살아 있는 나무에 붙어사는 버섯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정상에서 20분 가까이 제법 가파른 길을 따라 안부로 내려섰다가 키가 작은 산죽사이로 난 길로 다시 올라서는 중 적송에 기생하는 버섯을 보고 반갑고 신기해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이제껏 저는 버섯은 부식토나 죽은 나무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소나무의 곧게 뻗은 줄기에 붙어 살아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버섯도 분명 여름 철 산을 이루는 한 식구임에 틀림없는데 시골에서 독버섯의 피해를 지켜봤던 저는 버섯의 아름다움을 교태로 간주하고 애써 무시해왔습니다. 제가 이제껏 제대로 버섯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댓재에서 시작된 대간 길을 가득 채웠던 운무가 연칠성령에서 대간 종주를 마치고 칠성폭포로 내려서자 점차 가시는 가 했는데, 문간재를 넘어서부터 어둠이 짙게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기록해야 성이 찼던 제가 안개가 짙게 깔려 겨우 주요 지점을 통과한 시간만을 기록한 이번에는 백두대간 종주기를 남기는 것이 영 부담스럽습니다.
얼굴의 전면에 위치한 눈이 양 측면에 자리한 귀보다 더한 대접을 받는 것은 자리 값이 다르기에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이 귀로 백번 듣는 것과 같다는 동양의 금언이나 같은 뜻의 “To see is to believe"라는 서양 속담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보다”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행위를 확인하고자 할 때 뒤 끝에 ”보다“를 붙여 눈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나봅니다. 들어보다, 느껴보다, 맛보다, 생각해보다 등은 실제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다”라는 단어를 붙여 형상화한 것입니다.
“적과 흑”의 작가 스땅달이 소설을 거리의 거울이라 한 것도 두 눈의 위력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거울에 비쳐진 거리의 풍경은 바로 그 세태의 한 단면도이기에 소설이 재미있다기보다 거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던 것을 스땅달은 그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것입니다. 저도 어제 대간 길을 비춰보고자, 그래서 대간 길을 무대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삶을 그려보고자 거울을 가지고 두타산을 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거리와 사람들이 찾아 나선 산은 달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져 까발려지는 것을 거부한 두 산이 제우스의 도움을 받아 운무로 스스로를 덮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낮 시간을 버티다 밤의 어둠에 자리를 이어주고자 저녁 늦게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산행기는 결코 산의 거울일 수 없음을 제게 확실히 일러 주었습니다. 산속의 뭇 생명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질서와 지혜는 인간들의 한낱 이야기 거리가 아님을 알려주었습니다.
*위 글은 2005년 두타산을 오르내린 후 기록한 종주기 일부를 따와 2018년 1월24일 가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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