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게 맹경 외에밋들
김제에서 부안 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들판이 참으로 광활했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 했는데 들판이 넓다고 산봉우리가 우람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호남평야라 불리는 저 드넓은 논 뜰에 충분히 물을 대기 위해서도 물탱크 역할을 하는 높은 산이 몇 개 있어주면 좋으련만 이렇다 할 산 봉우리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에다 옮겨놓으면 북한산에 치여 한 쪽으로 밀려났을 해발509m의 변산을 여기 부안에서 군계일학의 산으로 대접하는 것이나, 산림청에서 이 산을 명산100산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산을 일군 호남평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젖줄이 한강이라면 대표적인 목줄은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 한 구석에 변산을 일으켜 세운 호남평야는 한반도 최대의 너른 논 뜰로 연간 쌀 생산량도 90만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15%를 상회한다 합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광활한 벌판의 호남평야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라 묘사된 것은 호남평야가 김제(징게)평야와 만경(맹경)평야를 모두 어우르는데서 연유된 것으로 막힘없이 너른 들판을 이곳 사람들은 “외에맷들”로 부른다 합니다. 이 너른 들판의 젖줄인 강줄기가 겨우 동진강과 만경강 두 강 밖에 없는데다 이 강들에 물을 대는 산들이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의 연봉들뿐이어서 백두대간에서도 물을 받는 섬진강으로부터 물을 얻어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림 같은 옥정호 댐을 만들어 담아둔 물의 일부를 호남정맥을 뚫고 낸 수로를 따라 동진강으로 흘려보낸다 하니 섬진강 물이 산을 넘은 것과 똑 같은 효과를 보는 셈입니다. 이리도 힘들게 물을 얻어 쓰는 호남평야가 기왕에 저수고인 산을 만들 것이라면 아예 천m를 훌쩍 넘는 고산을 만들거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빗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암봉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해발고도가 500m를 겨우 넘은 변산 여기저기에 수많은 암봉을 배치해 놓은 것은 혹시라도 집중호우에 힘들게 세운 이 산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저 나름대로 호남평야의 깊은 뜻을 혜량해 보았습니다.
이번에 오른 산은 호남평야에서 우뚝 솟아 있는 전북 부안의 변산입니다. 남녀치를 출발해 변산의 최고봉인 해발459m의 쌍선봉을 올랐다가 내려가 직소폭포를 완상한 후 관음봉에 올랐다가 내소사로 하산해 절 밖의 버스정류장에 이르기까지 6시간 반 가까이 걸었습니다.
군내버스로 부안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귀가하고자 정읍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부안 땅 지평선도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햇빛도 해내지 못하는 색상의 통일을 어둠은 단숨에 흑색으로 단일화시켜 해냈습니다. 햇빛이 들어내 척결하지 못한 음습함을 어둠은 검은 베일로 싸 다시는 활개 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징게 맹경 외에밋들의 지평선과 서해 바다의 수평선도 모두 삼켜버린 어둠이 강력하게 진을 치고 있는 동안은 낮 동안의 모든 현실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둠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일입니다. 호남평야가 다시 변산을 일군다면 선운산을 불러들여 높이를 배가하도록 권해볼 생각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라 한 것도 기실 산은 높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태산이 낮다하되 땅위에 뫼라고 읊었어야 했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듯이 벌이 넓으면 뫼가 높은 것이 이 자연의 로고스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해보는 말입니다.
징게 맹경 외에밋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과 통성명을 한 곳은 이번에 오른 변산의 숲에서였습니다. 삼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쇠물푸레나무, 철쭉, 진달래, 정금나무, 팥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잣나무, 전나무,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병꽃나무, 대팻집나무, 산딸나무, 윤노리나무, 개서어나무, 감태나무, 개벚나무, 당단풍나무, 사람주나무, 서어나무, 회나무, 고로쇠나무, 나도밤나무, 소태나무, 팽나무, 곰의말채, 비목, 쪽동백, 느티나무, 단풍나무, 개옻나무, 까치박달, 복자기, 고광나무, 다릅나무, 합다리나무, 자귀나무, 참회나무, 굴피나무, 팽나무, 층층나무, 고추나무, 신갈나무와 노린재나무 등 총 48종이었습니다. 때죽나무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가 인사를 받고도 이름을 빼먹은 나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통성명한 이 나무들이 징게 맹경 외에밋들에 얼마나마 물을 대는 변산의 대표적인 산식구들입니다. 제가 나무들을 대표적인 산식구라고 표현한 것은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그의 시 “나무”에서 읊은 것처럼 나무는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산식구들은 나무처럼 통성명을 하고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야생화는 너무 작아서, 야생조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날아다녀서, 야생동물은 사람들에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아서 명찰을 달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나무들과 통성명을 할 수 있도록 패찰을 달아준 변산국립공원과 신한은행에 감사말씀 드립니다.
(윗글을 쓰는데 이우형님의 “한국지형산책”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저자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08년5월29일 전북 부안의 변산을 다녀오고 쓴 산행기의 일부를 따와 2018년1월30일 가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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