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白雲山)의 봄
1970년대 초 처음으로 시골 중학교에 부임해 물상을 가르쳤습니다. 대학에서 전공한 과목은 화학이지만 중학교 과학은 물상과 생물로 나누어져 화학만을 따로 가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생물과목에 속하지 않는 모든 내용은 모두 물상으로 들어가 이 과목에는 제가 전공한 화학 외에도 물리와 지구과학이 더 들어있었습니다. 물리는 화학과 인접한 학문이어서 ‘일반물리’외에도 ‘물리화학‘ 등 몇 과목을 들었지만, 지구과학은 그렇지 않아 겨우 ‘일반지구과학’ 3학점만 이수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지구과학의 한 분야인 ‘물의 순환’을 가르치기가 쉽지 않아 애를 많이 먹은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 것은 이번에 오른 백운산에서 예상치 못한 눈을 만나서였습니다.
구름과 눈의 생성은 물의 순환 과정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극히 일부분 땅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이루고 많은 양은 물줄기를 따라 내로 그리고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렇게 흘러든 물은 바다로 흘러갑니다. 물의 일생이 이렇게 끝난다면 온 세상은 물난리로 시끌벅적할 것입니다. 흘러간 물이 우리 곁으로 다시 흘러올 수 없는 것은 물은 그 양과 관계없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리되면 우리의 상공에서 내릴 비가 없어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구름입니다. 물은 항상 그 표면에서 증발이 일어납니다. 수증기로 변화한 물은 하늘 높이 올라가 구름을 만듭니다. 구름을 전후좌우로 이동시키는 것은 바람입니다.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가 구름이 되어 육지 상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바람 덕분입니다. 구름이 제 몸무게를 못 이겨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이 비 또는 눈입니다. 바다의 물을 대륙으로 대량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고맙게도 태풍이 맡습니다. 물이 증발되어 구름이 되고 구름이 응결되어 비나 눈이 되어 내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물은 또다시 증발되어 구름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순환을 통해 지구상의 물은 동적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제(2013. 4. 20일)는 전남광양의 백운산(白雲山)을 올랐습니다. 이 산은 산 높이가 해발1,218m나 되어 결코 낮은 산은 아닙니다. 남해가 멀지않은 한반도 남쪽 끝머리에 자리한 이 산을 이번에 찾아 나선 것은 봄꽃을 완상하기 위해서였지 눈꽃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은 봄의 한 가운데 자리한 4월이 스무날을 맞았는데도 벌써 떠났을 겨울에 아직도 눈을 태워 보내지 않았습니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것을 평화라 칭한다면 이 평화는 위장평화인 것이 틀림없는 것은 겨우 내내 숨죽였다 모처럼 고개를 살짝 들은 새싹들은 이 평화에 속아 목숨을 잃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얀 눈에 덮여 고개만 간신히 내밀고 있는 새싹들이 저 상태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방풍의를 껴입은 저희들도 한 시간 가량 앉아 점심식사를 하면서 점증하는 냉기에 몸이 떨고 있는데 파릇파릇한 새 순이 이 추위를 견뎌낸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로 보였습니다.
이 산에 백설(白雪)을 내리게 한 것이 다름 아닌 백운(白雲)이라는 것은 앞서 살펴본 물의 순환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 산 이름이 백운산(白雲山)인 것이 구름이 많아서라면 이 산에 비 또는 눈이 많이 내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4월 하순에 이 산을 오르면서 비를 맞았다면 그럴 수 있다 싶어 할 텐데 고개를 갸우뚱한 것은 비가 아니고 눈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산이 해발1,200m를 넘는 고산이어서 바닷가보다 7도 이상 기온이 낮다는 것을 고려했다면 이 산을 오르면서 눈을 만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도 저희 모두 놀라워한 것은 산행안내 책임을 맡은 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별명 “시인마뇽”이 “원시인 크로마뇽”의 축어라는 것을 아시는 분은 저를 보고 시인(詩人)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모르는 분들이 제게 시인이냐고 물어올 때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저는 시를 써 본 일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4월의 백운산에서 눈을 맞으며 산행을 한지 한 달가량 지나 방송대국문과의 출석수업에 참석했는데, 그때 교수분이 학생들 모두 한편 씩 시를 지어내야 학점을 준다고 해서 별 수 없이 아래 시 “백운산의 봄”을 지어 제출했습니다. 제가 이 시를 여기에 선보인 것은 결코 잘 지어서가 아닙니다. 이 시가 제가 지은 단 한 편의 시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백운산의 봄
4월이 봄과 함께
산에 오른다
흰 구름 노니는 정상을 향해
백운의 이형태
하얀 백설이
산 중턱에 내려와 봄을 맞는다
새 봄은 새 싹 덮은
백설에 놀라
혼자서 오던 길로 줄행랑 친다
4월은 혼자서
산에 올랐다
백설이 내려앉은 차디찬 정상
어느새 어제가
곡우이려니
이제는 겨울도 자리 물리려
4월에 봄 안부
살짝 묻는다
새봄이 얼마나 뒤쳐졌냐고
4월이 서둘러
하산을 한다
겨울의 자리물림 뜻을 전하려
봄이 숨 가쁘게
산을 오른다
흰 구름 정상의 겨울 만나려
전라도 광양의
백운산 정상
봄은 이렇게 똬리를 튼다
*위 글은 2014년4월20일 전남 광양의 백운산을 눈을 맞으면서 산행한 후 작성한 산행기에서 일부 따와 2018년2월15일 가필 정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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