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탐방기3
*탐방구간:애기봉입구-연화사-전류리포구(평화누리길 3코스)
*탐방일자:2018. 10. 7일(일)
*탐방코스:애기봉입구-마근포리마을회관-연화사-석탄배수펌프장
-전류리포구
*탐방시간:10시40분-16시10분(5시간30분)
*동행 :나홀로
초등학교선생님께서 김포(金浦)는 평택과 더불어 경기도의 2대 곡창지대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1950대 후반은 6.25전쟁이 정전 된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매끼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몇몇 부농을 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도 곡창지대에 사는 김포사람들은 하루 세끼 전부 쌀밥을 해먹을 수 있겠다 싶어 마냥 부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제 고향 파주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 만큼 지근거리인 김포의 논 뜰이 얼마나 넓은 지는 그 몇 해후인 중학교 2학년 때 강화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길에 지나가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김포가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라는 것은 이번 평화누리길 탐방으로 처음 알았습니다. 평화누리길 3코스를 탐방하려고 버스를 타고 김포 시내를 지나는 중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라는 글이 새겨진 표석이 도로변에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쌀 생산지가 바로 김포라는 조사결과가 학술적 검증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김포예총사무국장인 이민수님이 2015년2월12일자 김포신문에 기고한 아래 글이 그간의 조사 및 검증경위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아 여기에 올립니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쌀 생산지는 김포시 통진면 가현리 일대라는 학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런 사실은 한국 선사고고학회와 일본 도호쿠(東北)대 스즈끼 미쓰오 교수팀이 공동으로 지난 97년 4월 김포시 통진면 가현리 450번지 일대의 이탄층을 채취,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을 이용한 3년간의 연구조사 끝에 최근 밝혀졌다. 한국 선사고고학회 임효재 회장(서울대 문학박사)은 “일본의 스즈끼 미쓰오교수팀과 97년 4월 김포 통진면 가현리에서 채취한 이탄층을 조사한 결과 가장 아래쪽은 BC 5440년, 중간층은 BC 4420년, 가장 위쪽은 BC 4720년에 형성된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 선사고고학회는 김포지역이 한국 최초의 벼농사 유적지임을 검증하기 위해 2000년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 일본,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김포 고대 쌀문화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오전 10시40분 3코스의 출발점인 애기봉입구를 출발했습니다. 하성에서 내려야 할 것을 마곡사거리에서 잘 못 내리는 바람에 애기봉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평화누리길 패스포트에 인증스탬프를 찍고 차도를 따라 북쪽으로 몇 십 보 걸어가다가 오른 쪽으로 꺾어 두 그루의 거목 느티나무를 지났습니다. 택시타고 온 길을 되짚어 가는 중 저처럼 3코스를 진행하는 50대의 부부 한 팀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자,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이 곁에 있어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차도를 따라 얼마간 더 걸어 양택천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 하천 왼쪽으로 난 천변 길을 걸으면서 이 좁은 농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을 보고 이 정도면 우리나라 시골도 농사지을만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한강 건너 먼발치로 북한 땅이 보이는 천변 길을 걸으며 평화롭다고 느낀 것은 사방이 너무 조용하고 한가로워 마치 시간이 멈춰선 것 같아서였습니다.
마근포새마을 회관을 지난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입니다. 양택천변 길을 지나서 다다른 마근포삼거리에서 차도를 따라 왼쪽으로 진행했습니다. 마근포는 이 길을 따라 1Km가량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포구였는데 6.25전쟁이후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지금은 포구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안내문이 전했습니다. 직진 길이 아스팔트길에서 시멘트 길로 바뀌는 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해 북한 땅을 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는데 누리길이 오른 쪽으로 꺾이어 아쉬움이 더 했습니다. 사거리에서 금성초등학교 쪽으로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걸어 얼마 후 경로당을 겸하는 마근포리새마을회관을 지났습니다. 요즘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지덕노체’ 의 네 글자를 적어 넣은 “4H 이정표”와 초등학교 다닐 때 형수님이나 작은누님을 따라 산골 밭에 가서 일하며 보았던 수수와 조가 송이송이 실하게 영근 것 보고 시골 길은 그 어디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해 걸을 만 하다 했습니다.
연화사를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9번도로와 만나는 마조리의 삼거리에서 직진해 차도를 따라 동진했습니다. 얼마 후 후평리에 이르러 차도는 북쪽으로 이어졌습니다. 후평리 교회쪽으로 눈을 돌리자 한강이 보였고 그 건너로 고향 땅 파주의 운정일대가 보여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더 걸어 다다른 연화사 경내로 들어가 절 구경을 했는데 대웅전을 보수공사 하는 중이어서 어수선했습니다. 연화사에서 나와 차도를 따라 조금 걷다가 잠시 산길로 들어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걷기 시작한 시각이 13시20분이었습니다. 얼마만큼 북진하자 누리 길은 오른 쪽으로 꺾여 이번 탐방 처음으로 흙길로 이어졌습니다. 애기봉입구에서 시작해 8.6Km나 포장도로만을 걸어온 터라 그렇게 반가울 수 없는 흙길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한강의 철책선에 이르러 시멘트 길로 바뀌었습니다.
한강의 철책선을 따라 걷던 중 후평리 논 뜰에서 먹이를 주워 먹느라 떼를 지어 내려 앉은 기러기를 탐조했습니다. 약8Km를 걸어야 3코스의 종점인 전류리포구에 이를 수 있는 철책선 길은 해를 가릴 데가 없는 직선 길이어서 한 여름에 걸었다면 고생깨나 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햇볕이 전혀 뜨겁지 않고 바람도 감미롭게 부는 10월에 한강변의 이 길을 걸어 힘 드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에 더하여 막 추수가 끝난 후평리 들판을 찾아온 수 백 마리의 철새들이 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연출하는 군무를 보고나자 이 코스 안내책자에 ‘석탄리철새조망지’를 표기해 넣은 충분한 이유를 알만 했습니다. 철책선을 경계로 왼쪽은 한강이 흐르고 오른쪽은 넓은 논 뜰이 자리하고 있어 환경이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만, 논 뜰의 철새들이 철책선 너머 한강 포구의 갯벌에서 떼 지어 앉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둥오리로 보이는 이 새들은 두 곳을 왔다 갔다하며 지낼 것 같습니다.
16시10분 전류리 포구에 도착해 3코스 탐방을 모두 끝냈습니다. 앞서 한 시간 남짓 걸은 한강변 철책선 길은 석탄리배수펌프장에 이르기까지 차들이 다니지 않아 걸을 만 했지만, 이 배수펌프장을 지나자 많은 차량들이 이 길을 오가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야외에서 먼 거리를 걸을 때에는 바테리 사용시간을 늘리고자 항상 비행기탑승모드로 바꿔놓고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깜박 잊고 제때 바꿔놓지 않아 탐방 종료 몇 분 전에 바테리가 나가버렸습니다. 이번 탐방의 종점인 전류리 포구를 사진 찍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난 부부팀과 함께 하성 가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20분가량 후에 도착한 23번 농촌버스를 타고 하성으로 가서 서울로 가는 2번 버스로 갈아타는 것으로 이번 평화누리길3코스 탐방을 마무리 했습니다.
김포지역의 평화누리길 탐방을 이번으로 마치고 다음에는 행주산성으로 건너가 일산호수까지 이어지는 4코스 탐방에 나서고자 합니다. 3번의 탐방으로 김포지역 누리 길을 모두 마치면서 느낀 것은 김포가 경기도 제2의 곡창지대라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울과 붙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곳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빨리 벼를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김포가 6.25전쟁으로 포구 몇 곳이 없어진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겪은 것은 급격한 도시화일 것입니다. 주거단지가 새로 조성되고 사통발달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김포의 곡창지대는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150여년 전의 대동여지도와 오늘의 지도를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김포가 낳은 역사적 인물로 제가 알고 있는 분은 양성지(梁誠之,1415-1482) 선생입니다. 조선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이조판서, 홍문관과 대제학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463년에 정척과 함께 제작한 『동국지도』가 상당히 정확한 지도였다는 것을 책에서 읽어서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구사로 일하고 있는 이기봉님은 그의 책 『조선의 지도 천재들』에서 “『동국지도』계통에는 북쪽 지방이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만 중남부지방은 상당하게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면서 “정척과 양성지가 모든 지역의 거리 정보를 동일하게 줄여서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중남부지방을 그렇게 잘 그릴 수 없다”고 격찬했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출간된 것이 약 4백년이 지나서인 1861년임을 감안하면 양성지선생 등이 제작한 『동국지도』가 갖는 정확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생은 또 “농사의 근본은 지력을 잘 이용하는데 있으므로 개간산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 및 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을 만들자고 주장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강 변에 직선으로 축조한 철책선 아래 방축 길을 보셨다면 비록 그 목적이 국방에 있다 해도 당신이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하실 것 같아 탐방기에 덧붙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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