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09.파주명소 탐방기7(허준 선생 묘)

시인마뇽 2019. 11. 11. 13:52

                                                      파주명소 탐방기7

 

                                        *탐방일자:2019. 11. 2()

                                       *탐방지   :경기 파주소재 허준선생 묘

                                       *동행      :도마산초교 허정숙 동문, 문산중 이영호,

                                                   황규직, 황홍기 동문

 

 

 

 

 

 

 

   임진강을 건너 민통선 안을 다녀온 것은 허준선생 묘를 탐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임진강 북안의 강안평지성(?)인 덕진산성을 탐방하기 위해서였기에, 다섯 해나 묵혀두었다 작성한 칠중성 탐방기와 이번에 다녀온 덕진산성의 탐방기를 묶어 파주명소탐방기6(칠중성/덕진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탐방지의 성격이 전혀 다른 묘지와 고성을 같은 날 탐방했다는 이유로 한데 묶어 글을 쓰기가 난망해 허준선생 묘 탐방기는 이렇게 따로 써  올립니다.

 

   임진강 위에 놓인 통일대교를 건너 민통선 안으로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긴장됐습니다. 허정숙 초교동문의 안내로 이 친구의 농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대개가 낮은 언덕인 민통선 안 통일촌은 밭농사를 짓기에 적지여서 개성인삼이 전국 최고의 명성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통일촌의 특산물이 장단콩과 인삼인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서울보다 4도 가량 기온이 낮은 파주의 통일촌에서 사과가 재배되어 파주사과라는 브랜드로 전국적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친구가 깎아준 파주 사과를 먹고 나서 이만하면 다른 브랜드의 사과에 밀릴 것이 전혀 없겠다고 생각한 것은 달콤새콤한 맛에 수분이 충분하다 싶어서였습니다. 사과 밭으로 자리를 옮겨 주인에 5만원을 주고 한 박스를 사서 넷이서 나눴습니다한 그루에 열린 사과 전부를 몽땅 따서 가져가는 것은  8만원으로, 박스로 사는 것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는 것은 설명을 들어 이해되었지만, 손으로 들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박스로 샀습니다. 내년 이 맘 때 두 아들 가족들과 함께 놀러와 이번에 못 따간 파주사과를 따  갈 뜻입니다.

 

   사과 밭을 출발해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자리한 허준 선생 묘를 찾아 갔습니다. 바깥공기가 아직은 냉랭하지 않아 차문을 열어놓고 청정지역의 삽상한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면서도 하늘이 희끄무레한 것이 중국발 미세먼지 때문이 아닌가 싶어 걱정도 됐습니다. 해마루촌을 지나 허준선생 묘지에 다다른 시각은 128분이었습니다.

 

   허준(許浚, 1537-1615) 선생은 본관이 양천(陽川)이고, 자는 청원(淸源)이며, 호는 구암(龜巖)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의로 선조와 광해군 등 두 임금의 치료를 책임진 어의(御醫)였기에 임진왜란 때는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모셨습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3등에,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고, 사후에 승록대부에 올라 의인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올린 허준 선생도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로서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복직되었기에 16년에 걸친 각고의 연구 노력이 그 이듬해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결실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진동면 하포리에서 허준 선생의 묘가 발견된 것은 1991년의 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재미 고문서 연구가인 이양재씨가양천허씨족보에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문구를 보고,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선생의 묘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묘역 입구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키고 안내판으로 다가가서 안내문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허준의 일생’, ‘동의보감다시 찾은 허준 묘3편의 안내문중 제 눈을 끈 것은 다시 찾은 허준 묘였습니다. 그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여기에 전문을 옮겨 놓습니다.

 

   “의성(醫聖) 허준 묘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재미 고문서 연구가인 이양재씨는 한통의 간찰을 입수했다. ‘717일 허준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허씨 종친회를 찾아가 종친회족보를 뒤적여 준()자를 썼던 사람을 찾던 중 한국전쟁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그는 허준선생의 묘를 찾기 위해 일제시대 토지대장을 확인하던 중 하포리에서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 ?)의 이름을 찾았고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허씨들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땅을 찾았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무덤은 모두 도굴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무덤이 유독 눈길을 끌었고 무덤 주변을 파던 중 두 쪽으로 동강난 비석이 나왔다. 비석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내용은 陽平 聖功臣 이었는데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다. 이렇게 허준 묘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한 명문 6자는 허준이 후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한 바램이 아니었을까.”

 

   묘지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자 허준 선생의 묘역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50평 크기의 묘역의 맨 아래에 자리한 구암재(龜巖齋)는 묘당으로는 작지 않은 한옥건물이나 아주 깔끔해 보였습니다. 묘당 바로 위 허준 선생의 묘비에 贈 輔國崇祿大夫 領議政/醫聖 陽平君 許浚 重建이라는 비문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께서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묘비 위 두 기의 묘 중 왼쪽이 선생의 묘이고오른 쪽 묘는 부인 안동김씨의 묘로 추정됩니다. 선생의 묘위에 자리한 한 기의 묘는 허준 선생의 생모 묘로 추정되는데,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역은 북향으로 되어 있지만, 이 묘역을 보듬은 산이 높지 않고 능선이 부드러운데다 단풍이 곱게 들어 지하의 선생께서도 편안히 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선생께 예를 드리고 동행한 친구들과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묘역입구로 돌아갔습니다.

 

   허준선생은 선조임금이나 광해군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해 의주로 몽진한 선조임금을 따라 의주까지 따라간 자들은 시종까지 합쳐 40명 남짓이라면서 그나마 허준이 끝까지 따라온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이에 선조임금은 선생에게 호성공신 3등급에 책봉하고 양천군(陽川君)이라는 봉호를 내립니다. 선조가 기도가 막혀 죽자 어의 허준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귀양 보내지만 의학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1년 만에 풀어줍니다. 선생은 14년 만에 의서(醫書) 동의보감(東醫寶鑑)25권을 완성해 광해군에 바치고, 광해군은 서둘러 이 책을 출간합니다. 1613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중요한 의학교과서로 자리 잡습니다. 광해군은 뭇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자 출신의 일개 의원인 선생에게 영의정급이나 임금의 장인에게 주는 부원군, 즉 양평부원군이라는 봉호를 내립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나 중국의 편작과 화타 등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의성(醫聖)들입니다. 허준 선생이 타국에서도 널리 의성으로 받들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보다 신장되어야겠지만, 동의보감이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기록유산인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할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