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 능선교-필리핀군참전기념비-장곡체육공원
*탐방일자 : 2020. 12. 24일(목)
*탐방코스 : 능선교-상산보-신원교-송강보-메타세콰이어길-필리핀군참전기념비
-백제농협심천지점-지영교-장곡체육공원
*탐방시간 : 11시11분-16시54분(5시간43분)
*동행 : 나 홀로
고양지역의 공릉천을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동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고양시는 공릉천의 상산보에서 송강보에 이르는 2.4Km의 천변 길을 삼분하여 ‘만남의 길’, ‘사랑의 길’, 그리고 ‘약속의 길’로 명명하고, “공릉천 이야기”라는 제목의 스토리텔링을 엮어냅니다. 고양시는 각 길에 조응하는 공릉천을 ‘만남의 강’, ‘사랑의 강’, ‘약속의 강’으로 이름 짓고, 연인 강아(江娥)를 등장시켜 ‘강아마당’, ‘달빛마당’과 ‘약속마당’에서 송강과 사랑을 나누는 스토리를 전개합니다. 이는 고양시가 공릉천을 즐겨 걷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를 여기 신원(新院)에서 머물렀던 송강을 기억의 장으로 불러내어 강아와의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송강이 조선시대의 다른 문인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당대 한글문학의 백미인 가사와 시조를 창작한 걸출한 문인라는 것입니다. 정재호 · 장정수 두 공저자가 저서 『송강가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한 한국문집총간633종 15,018권 4,917책 중에서 가사와 시조가 실려 있는 것은 『불우헌집』, 『농암집』, 『고산유고』 등 불과 몇 권뿐입니다. 이런 중에도 송강은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 가사 4작품과 시조107수 등 한글로 된 빼어난 시가(詩歌)를 다수 남겼습니다. 한글소설 『구운몽』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저서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전후 「사미인가」는 곧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다. 하지만 그것을 문자(文字, 즉 漢字)로 베껴낼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악인들이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할 따름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김만중은 또 “이 세편의 별곡은 천기(天機)가 스스로 발한 것을 담고 있되, 이속(夷俗)의 비리함은 없으니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참 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김만중이 송강의 가사 중에서 으뜸으로 친 것은 「속미인곡」입니다.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은 여전히 한자어를 빌려 윤색한 것이어서 「속미인곡」에 못 미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듯 김만중은 자기 나라 말로 가락을 맞추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지은 시문은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우리 한글로 지은 송강의 가사를 상찬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인물은 송강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처첩 강아(江娥)입니다. 전라도 관찰사로 등용된 송강은 전라감영에서 기녀 진옥(眞玉)을 처음 만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옥을 송강의 강(江)자를 따 강아(江娥)라고 불렀습니다.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손 끝 하나 안대고 오로지 머리만 얹어준 송강은 도승지로 임명받아 한양으로 떠나고 강아는 송강을 그리며 수절합니다. 강아가 송강과 함께한 것은 한반도 북단인 강계로 유배된 송강을 찾아가 적거(謫居)생활을 보살피면서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명을 받아 송강은 서울로 올라가고, 강아는 강계에 머무릅니다. 왜군에 붙잡힌 강아는 적장 소서행장을 유혹해 취득한 첩보를 조선군에 제공해 평양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후 강아는 보살이 되어 입산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松江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하였다고 다음(Daum)의 블로그 「친구를 찾는 사람」은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죽어서 신원 땅에 묻힌 강아는 71년 후 송강의 묘소가 진천으로 이묘될 때까지 살아생전 송강과 못 나눈 정을 원 없이 나누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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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11시11분 능선교를 출발했습니다. 지축역에서 052번 버스를 타고가 능선교에서 하차하여 공릉천 2구간의 따라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능선교에서 공릉천의 북쪽 방축로로 들어서야 할 것을 건너편 남쪽 방축로를 따라 걷는 바람에 1시간가량 엉뚱한 길을 걷게 된 것은 지도를 꼼꼼히 보지 않은 데서 비롯된 실수였습니다. 차들이 자주 다니는 남쪽 천변 길을 따라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바로 아래 삼하낚시터에 이르기까지 10분이 조금 더 걸렸는데 길이 좁아 네다섯 번은 멈춰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길 왼쪽 낚시터를 막 지나 공릉천은 오른 쪽으로 확 꺾어 길이 나 있지 않은 절벽 아래로 흘러 더 이상 따라 걷지 못하고 직진해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개 너머 마을로 내려가 공릉천변의 삼송야구장 앞에 이르기까지 길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해 헤매는 제게 풀어놓은 개 두 마리가 덤벼들어 스틱을 휘둘러 쫒아내느라 한참 동안 긴장을 풀지 못했습니다. 야구장 앞 차도에서 제방 길로 올라가 빙 돌아오느라 걷지 못한 공릉천 길을 제대로 걸어보고자 다시 능선교 쪽으로 향했습니다. 긴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 쪽으로 꺾어 공릉천 북쪽 제방길로 들어선지 10분가량 지나 삼하저수지 건너편 지점인 공릉천2교 굴다리에 다다른 시각은 12시24분이었습니다. 애당초 출발할 때 공릉천의 북쪽 길로 들어섰다면 1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을 지도를 잘 못 읽어 남쪽 길을 택해 한참 늦어졌습니다. 공릉천2교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공릉천을 따라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서 건너편 절벽 밑으로 흐르는 이 하천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카카오 맵에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 무명교를 건너 ‘북한산(삼각산)과 공릉천이야기’ 안내판를 보고나서야 이 긴 다리의 이름이 안내문에 나와 있는 신선유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뒤돌아 본 북한산의 위용이 참으로 의젓하다 싶었던 것은 인수봉, 백운대, 숨은 벽, 만경봉과 노적봉 등의 자태가 하늘을 찌를 듯이 늠름해서였습니다.
12시58분 상산보 쉼터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신선유교(?)를 건너 공릉천이야기공원이 시작되는데 이 공원길은 남쪽 제방 길 왼쪽 아래 차도를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다가 고양아쿠아스튜디오 앞에서 앞에서 제방 길과 합해집니다. 만남의 길이 시작되는 쉼터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면서 상산보를 덮은 파란 빙판을 내려다보자 어렸을 때 고향의 비암천에서 작은형이 만들어준 썰매를 타고 놀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여기 상산보에서 송강보에 이르는 2.4Km의 길을 만남의 길, 사랑의 길, 약속의 길로 나누어 ‘공릉천이야기’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조선 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이곳 신원(新院)에서 다년 간 거주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송강이 고양 땅 신원에 거주한 내력은 이러한 것 같습니다. 1536년 서울의 장의에서 출생한 송강은 28세로 별시에 장원급제합니다. 송강이; 역참(驛站) 신원(新元)의 원주(院主)로 재직하면서 지은 시조 3수가 『송강가사』에 실려 있습니다. 송강이 하위직인 신원의 원주(院主)로 재직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추정컨대 그 시기는 35세에 시묘살이를 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모친이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이조좌랑에 오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송강이 신원에 별서(別墅)를 설치하고자 땅을 보아둔 것은 이때가 아닌가 합니다. 조선시대의 명문세도가들은 중앙의 관직에서 물러나면 낙향하지 않고 서울근기에 별서를 두어 거주하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실제의 근거지가 전남 담양의 창평인 송강이 젊어서 역참의 원주(院主)로 근무하던 동안에 고양 땅 신원에 별서를 마련하고자 땅을 사두었을 것 같습니다. 50세가 되어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척(論斥)으로 사직한 송강은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에서 별서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동인들의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정치적으로 숱하게 우여곡절을 겪은 송강은 58세인 1593년 12월에 강화에서 불운하게 병사합니다. 이듬해인 1594년 봄 송강의 유해는 여기 고양으로 옮겨져 묻혔다가 70여년이 지난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됩니다. 송강이 신원에서 지은 시조는 모두 3수로, 아래 시조는 그 중 한 수입니다.
신원(新院) 원주(院主)가 되어 사립문 다시 닫고
유수청산(流水靑山)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辟除)의 손이라커든 날 나갔다 하여라
상산보를 출발해 제방 길을 따라 계속 서진하면서, 고향 집을 오갈 때 버스를 타고 내다본 냇가의 지구레코드 공장이 여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장소가 어딘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통일로에 놓인 벽제교를 밑으로 지나 징검다리를 건넌 것은 공릉천의 북쪽 천변길이 햇볕이 들어 따뜻해서였습니다. 건너편의 신원마을 아파트를 사진 찍은 후 북쪽 천변길로 탐방길을 이어가다가 오른 쪽을 올려다보자 유진 레미콘 공장이 가깝게 보였습니다. 10분가량 더 걸어 다다른 신원교를 건너 오른 쪽 제방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교외선 철교를 막 지나 송강보에 도착한 시각은 14시8분이었습니다.
14시45분 필리핀군참전기념비를 들렀습니다. 공릉천의 범람을 막고자 물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어도(魚道, fish way)를 설치한 것은 여기에 만든 송강보가 소하어류(溯河魚類)들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溯河)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안내판은 적고 있습니다. 벽제천이 흘러들어오는 합수점을 막 지나자 제방에 면해 넓게 터 잡은 시티칼리지의 공원 같은 뜰 안이 나뭇잎이 다 떨어져 훤히 보였습니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자 먼발치로 우뚝 솟은 북한산의 삼각봉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제가 본 북한산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를 대표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전후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가면서 비분강개한 심정을 쏟아 부었던 ‘가노라 삼각산’으로 시작되는 시조의 삼각산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점은 이 산을 바라보며 불러낸 기억일진데, 저는 1970년대 겁 없이 이 산에서 암벽을 등반했던 도전의 순간을 기억해냈습니다. 공릉천 서쪽의 메타세쾨어길을 따라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 통일로변에 자리한 필리핀참전비를 참배해 전사한 필리핀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참전국이란 1,000명 이상 참전했거나 100명 이상 전사한 나라에 한한다고 합니다. 필리핀은 1950년 9월19일 한국전쟁에 1,496명의 장병을 파병해 왜관, 김천, 대구와 임진강변 및 철원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한국전에서 희생된 필리핀군의 전상자는 92명의 사망자와 57명의 실종자, 그리고 299명의 부상자 등 총 446명에 이른다는 것을 이번에 기념비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토록 고마운 참전국 필리핀이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여전히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1960년대 후반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종학자 허문회(許文會, 1927-2010)는 1964년 필리핀으로 건너가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초청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통일벼의 모종이 되는 IR667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 벼는 3년간의 시험 재배 끝에 통일벼라는 이름으로 전국농가에 보급되었습니다. 비록 밥맛은 떨어졌지만,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였던 한국에서 다수확품종인 통일벼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1975년에 식량을 자급하는 쾌거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흔히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위해 필리핀과 자주 비교하곤 합니다. 1970년대만 해도 훨씬 잘 살았던 필리핀보다 몇 배를 더 잘 산다고 자랑하려면 필리핀처럼 우리나라도 풍전등화의 나라를 돕고자 참전할 뜻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공릉천문화체육공원으로 내려가 파주 쪽으로 흐르는 공릉천의 북쪽 천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삼송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창릉천, 한우물천, 가시골천과 솔개천의 의 갈대와 부들, 그리고 돌다리를 옮겨 놓아 조성했다는 전장 1.5Km의 공릉천갈대밭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저녁나절의 천변길이 더욱 다감하게 느껴진 것은 바람에 맞춰 춤을 추는 갈대들의 몸놀림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공릉천도 강바람의 통로여서 냉랭한 바람을 피해 걸을 수 없었습니다. 넓은 잔디밭의 축구장을 거쳐 원당교를 밑으로 지나자 꽤 넓은 보가 보였습니다. 보를 가득 채운 수면에 석양이 조사되어 빚어내는 저녁나절 천변 풍광이 일품이어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습니다. 몇 분을 더 걸어가 오른 쪽 통일로 삼거리에 자리한 벽제농협심천지점 옆에 다다른 시각은 15시31분이었습니다.
16시54분 장곡체육공원에 도착해 공릉천의 2구간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심천지점 옆 벽제교에서 천변 길로 내려가 북진하면서 제 고향 파주 땅에 접어들었는가를 계속 점검했습니다. 반시간을 훨씬 더 걸었는데도 고양 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고양한우영농조합건물의 간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지영교에 이르자 그 아래 보에 떼 지어 점검을 받고 있는 듯한 청둥오리(?) 들이 보였습니다. 공릉천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전차 이동을 막고자 설치한 겹겹의 대전차장애물을 보고서 최전방지역인 파주에 거의 다 왔다 했는데 10분여 더 걸어 파주 땅의 장곡리체육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체육공원 위에 조성된 새마을기념비와 학도의용군파주지대 6.25동란 참전기념비를 둘러본 후 바로 옆 농협하나로클럽 정류장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799번 버스에 올라 하루 나들이를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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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과 강아가 주고받았다는 아래 시조는 매우 육감적입니다. 이 시조들은 저자 미상으로, 1779년 또는 1839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집 『근화악부(槿花樂府)』에 실려 있습니다.
옥(玉)이 옥이라 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 일시 적실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송강 정철)
철(鐵)이 철(鐵)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 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진옥 강아)
조선초기의 시조들이 이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숭유억불의 건국이념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중기에 접어들면서 호남시단과 영남시단의 주도로 강호한정을 노래한 시조작품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들 작가 거의다가 사대부들이어서 연정을 노래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며 시조를 짓는 일은 황진이, 홍랑, 매창, 한우 등의 명기(名妓)들이 해냈습니다. 조선의 기녀시인 명단에 이들 외에 진옥이 들어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시조는 대개 사대부들이 연락(宴樂)의 자리에서 즐기는 것이어서 조선의 부녀자가 참여해 같이 즐길 만한 것은 애당초 아니었습니다. 예외적인 존재는 기녀였으니, 이들은 사대부들과 자유롭게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분상으로도 유교적 이념에서 얼마간 벗어나 생활할 수 있어 누구보다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는 시조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기녀가 지은 시조 중에 진옥의 위 시조가 애정 표현이 가장 노골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옥의 시조가 오늘의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것도 애정표현이 너무 심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다음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기녀시인들의 시조작품입니다. 기녀들의 애정표현이 서로 같지 않으나, 공히 고절하면서도 애틋한 그들의 사랑을 함축적으로 잘 담아냈다 싶어 이렇게 올립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블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시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
어이 얼어 잘이 므스워 얼어 잘이
원앙침 비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 까 하노라 (한우)
이화우 흣뿌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홍랑)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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