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상원사탐방센터-월정사-간평교
*탐방일자: 2022. 5. 30일(월)
*탐방코스: 상원사탐방센터-오대산장-월정사-자연명상마을-글램핑빌리지
-간평교-월정교 인근-간평교-6번도로로터리
*탐방시간: 9시30분-17시25분(7시간55분)
*동행 : 이상훈대장 외 7명
지난 50년간 간간히 찾아 오른 오대산은 참으로 안온한 산입니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설악산과는 달리 성깔 사나운 칼바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온후한 고산(高山)이 바로 오대산입니다. 멀리로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이 산을 찾은 신라의 자장법사에서 가까이는 6.25 전쟁이 발발할 것을 미리알고 도반(桃盤)들을 피신시킨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고승대덕들이 이 산에 머물렀던 것도 문수, 지장, 관음, 대세지보살과 석가여래의 오류성중(五類聖衆)들께서 이 산에 자리하실 만큼 산세가 각박하지 않고 평안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비로자나불이 거하시는 이 산 최고봉인 비로봉에서 석가여래와 오백나한을 모시는 북대미륵암의 주산인 상왕봉까지의 능선 길은 북쪽으로 설악산과 방태산이, 남쪽으로 발왕산과 가리왕산이, 동쪽으로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높낮이도 그리 심하지 않은 편안한 흙길이어서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곤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오대산 최고의 명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입니다. 적멸보궁은 연꽃처럼 피어오르는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과 호령봉의 5대 고봉을 뒤로 하고 이 연꽃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많은 중생들이 적멸보궁을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것은 삼라만상이 다 함께 평화를 누린다는 극락정토에 들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오대산은 신라시대의 고찰인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중대 사자암,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및 북대 미륵암등 5개의 암자들이 들어서 있고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는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선조임금 때 사고를 지어 왕조실록을 보관해온 것도 오대산이 물, 불 및 바람 등 3재가 들지 않는 길지여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제가 오대산을 탐방한 것은 이번이 열 번째입니다. 1972년10월 한 산형과 같이 비로봉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한 오대산탐방은 지난번까지는 계절을 달리하거나 산행코스를 바꿔가며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이 전부였는데, 이번은 달랐습니다. 상원사에서 월정교까지 오대천의 물줄기를 따라 걷는 이번 탐방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등산과 달리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걷는 것이어서 이전의 탐방보다 훨씬 힘이 덜 들고 여유로웠습니다. 상원사와 월정사를 잇는 길은 버스가 다니는 차도와 오대천에 바짝 붙여 산속에 낸 선재로 등 두 길이 있습니다. 버스길은 50년 전에 한 번 걸은 바 있어, 이번에는 걷기 전용의 선재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2016년에 개통된 도보길을 선재길로 명명한 것은 안내판에 소개된 대로 “문수의 지혜를 시작하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분”인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기리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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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가 주관하는 동강팀의 오대천 따라 걷기는 한 구간의 거리가 10Km 내외로 비교적 짧은 편이어서, 저는 논문준비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자 두 구간을 연이어 한 번에 걷기로 했습니다. 상원사-월정사 구간과 월정사-월정교 구간을 한 번에 마치려면 3시간은 먼저 출발해야 동강팀의 친구들을 중간에 따라잡을 수 있어 진부역에서 상원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오전9시30분 상원사탐방센터를 출발했습니다. 간단히 산행을 채비한 후 탐방센터를 출발해 바로 아래 선재길로 들어섰습니다. 다리 건너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오대천 좌안(左岸)의 숲길을 걸으며 제 몸이 실로 오랜만에 감지해 낸 것은 경쾌한 계곡의 물소리와 삽상한 산속의 공기였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국가지정번호판을 따라 걸으며 한 아름은 족히 될 거목들을 보았습니다. 명찰을 달고 반가워하는 다릅나무와 서어나무들과 인사도 나누고, 오가는 사람들이 지려 밟아 낸 낙엽 길도 걸었습니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신성암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데크 다리를 건너 만난 첫 번째 쉼터 바로 옆에 돌담 같은 것이 보였는데, 안내판에는 ‘오대산 화전민터’로 소개되었습니다. 출렁다리를 건너 차도를 건너자 선재로는 오른 쪽 숲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숲속을 빠져나와 상원교를 건너자 선재로는 다시 오대천 좌안의 데크 길로 이어졌습니다. ‘상원사 2.5Km/월정사6.5Km’ 지점을 지난 시각은 10시23분으로, 이런 속도라면 월정사에는 12시40분 쯤 도착할 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조금 더 걸어 조릿대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대산이 숨겨놓은 오대천이 생각보다 조용하다 싶었던 것은 새소리가 요란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조각가 하종우님의 익살스러워 보이는 자그마한 목불(木佛)을 보고 오대산은 역시 불자(佛者)들의 성지이다 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이란 한낱 찰나에 불과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목불을 선재로 숲속에 세워 놓은 것 또한 부처님의 뜻이다 싶었습니다. 오대산국립공원의 멸종위기야생생물에 관한 안내 글은 생물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산작약, 기생꽃, 개병풍, 날개하늘나리, 가시오갈피나무, 복주머니란 등 오대산의 멸종위기종 중 날개하늘나리는 바로 옆에 복원지가 따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10시50분 오대산 산장을 막 지나 차도 건너 선재로로 들어섰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오대천은 오랜 가뭄으로 물 흐름은 변변치 못했지만, 천변 양쪽의 나무들은 한껏 푸르름을 자랑했습니다. 잡초들로 뒤덮인 꽤 넓은 밭은 옛날에 화전으로 일궈진 것 같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아래 넓은 밭은 오대산국립공원에서 복원사업으로 심어 놓은 돌배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이 돌배들을 화전민들이 따먹었을 것입니다. ‘상원사4.3Km/월정사4.7Km’ 지점을 지나 데크 다리 갈골교를 건넜습니다. 다시 조릿대 길을 걸으면서 수더분한 조릿대 꽃을 보았습니다. 50년 넘게 산을 다녔으면서도 조릿대가 꽃을 피운 것은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꽃이 저처럼 수더분해서야 과연 곤충들을 모여들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번째 쉼터를 지나 한참 동안 내려가자 수량(水量)이 많아지고 넓은 암반이 눈에 띄어 심산(深山)의 유곡다웠습니다.
11시51분 섶다리를 지났습니다. 이런 골짜기에 섶다리를 놓았다는 것은 오대천 주변에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싶어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복원한 섶다리이지만, 실물을 직접 본 것은 하도 오래되어 그 때가 언제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섶다리만큼 제 눈길을 끈 것은 돌개구멍(pot hole)입니다. 섬진강의 요강바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린애들은 족히 들어갈 만한 꽤 큰 돌개구멍도 보였습니다. 진달래나 산철쭉 등 키가 작은 나무들이 숲의 옷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안내글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안내판에서 오대산보매기는 보를 막고 계곡물을 모아 물 위에 목재를 쌓아두고 여름철 우기에 보를 터뜨려 계곡물을 이용해 목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글을 읽고서 아우라지뿐만 아니라 여기 오대산에서도 뗏목을 실어 나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초록의 소(沼)가 눈에 띌 만큼 경관이 점점 수려해지는 오대천의 천변에 설치한 데크 길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나라만한 친환경 나라도 흔치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시 밭을 지나 오대천을 건너자 옛날 목재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이 있었던 회사거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데크 길로 이어지는 선재로를 홀로 걷는 스님 한 분은 지장암으로 향했고, 그 뒤를 따라 걸은 저는 지장교를 건너 월정사로 향했습니다. 월정사 경내는 9층석탑 상륜부의 해체보수공사로 어수선했습니다. 월정사는 여러 차례 둘러본 바 있어 바로 사천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바로 앞 금강교를 조금 지나 만난 이상훈교수와 함께 월정사의 명품 길인 전나무 숲길을 걸었습니다. 이 숲에서 수령 6백년의 가장 오래된 전나무는 2006년10월23일 쓰러져,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습니다. 상처가 나면 젖이 나온다 해서 젖나무로 불렸다는 전나무가 제게 추억어린 것은 어렸을 때 꽤 여러 번 고향마을의 전나무에 올라가 놀곤 했기 때문입니다.
13시30분 일주문에 이르렀습니다. 일주문은 상원사입구에서 시작되는 선재길의 끝점입니다. 선재길은 전장이 10km이고 기울기는 2.3%로 경사가 아주 완만해 걷기에 참 좋은 길입니다. 일주문을 통과해 오대천 좌안 길을 15분가량 걸어가자 동림선원으로 들어가는 큰 문이 보였습니다. 굳게 닫힌 이 문을 옆으로 지나 동림선원으로 가는 길에 조정래 작가의 창작실로 지었다는 세심헌(洗心軒)을 지났습니다. 다리 건너 찾아간 동림선원(東林禪院)도 앞서 본 세심헌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커보여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여기 동림선원의 편액들도 월정사일주문의 현판 「月精大伽藍」을 직접 쓴 탄허스님의 작품이라는데, 초서로 쓰여 「東林禪院」 과 「大道無門」은 읽어냈지만 나머지 한 개는 어느 누구도 정확히 그 글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여러 친구들이 인터넷에서 검색해 「向上一路」 라고 올려주어 무슨 글자인지 겨우 알았습니다.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많이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통보다는 예술성을 중시하는 초서를 따로 배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리를 다시 건너 오대천 좌안 길로 진행하면서 오대산자연명상마을 지났습니다. 4년 전에 문을 연 이 마을은 조정래 작가가 명예촌장으로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마을로 입촌해야 명상이 더 잘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상마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에 이런 벽촌에 명상마을을 조성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오대천 좌안의 소나무 숲길을 지나 다리를 새로 놓는 공사장에 이르자 저만치에 우뚝 솟은 캔싱턴호텔이 보였습니다. 이 다리를 그냥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제방 길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가지런히 심은 당근(?)들이 자라고 있는 넓은 밭을 보면서, 이는 오대천에 보를 막아 필요한 농업용수를 제때 공급해주는 덕분이다 했습니다.
14시31분 진고개 쪽에서 내려오는 월정천(?)이 오대천 합류되는 합수점에 이르렀습니다. 시멘트 제방길이 끝나는 곳에서 월정천을 건너 오대천 좌안의 제방 길을 이어갔습니다. 연두색 철망으로 펜스를 쳐 놓은 숲길을 걸으며 이토록 좋은 길을 내준 지자체에 속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청소년수련원을 지나 글램핑빌리지에 이르자 그 왼쪽에 자리한 백색의 캔싱턴 호텔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오대천 좌안에 제방을 쌓지 않았다면 쾌적한 공간의 글램핑빌리지가 조성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자, 제방은 지자체에서 쌓고 그 덕은 사기업이 다 보는 것은 아닌지 새삼 궁금했습니다.
제방 아래 오대천의 징검다리를 건넌 것은 건너편 정자에서 쉬어가고 싶어서였습니다. 말이 좋아 징검다리이지 널찍한 큰 돌을 촘촘하게 놓아 그냥 다리라 불러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건넌 징검다리는 대개는 놓인 돌들이 작고 밟으면 뒤뚱거려 종종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건너편 정자에서 ‘사철가’를 들려주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 오종실 명창에 감사인사 올립니다.
오대천 우안 길의 폐가를 지나 공사장을 피해 가느라 하천으로 다가갔다가 다시 제 길로 올라섰습니다. 이내 만난 도랑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데다 건너편에 암벽이 면하고 있어 잠시 쉬어갔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 직진하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꺾어 오대천 우안의 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제방의 오른 쪽으로 보이는 농지는 평창군에서 보기 드물게 넓은 평야로 알려졌습니다. 강 건너 제방 왼쪽에도 넓은 평야가 있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이 일대가 평창군 제1의 곡창지대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16시14분 간평교에 다다라 두 번째 오대천 탐방을 마쳤습니다. 간평교에 이르러 다리를 건너지 않고 앞에 보이는 월정교 쪽으로 직진했습니다. 스필링 쿨러가 뱅뱅 돌며 물을 뿌리는 당근 밭을 끝으로 농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당근 밭을 막 지나 바로 앞에 보이는 월정교로 다가갔으나 길이 나 있지 않아 건평교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6번 도로가 지나는 로터리에서 이상훈 교수 차를 타는 것으로써 하루 걷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상훈교수가 면온 집으로 초대해주어 저녁을 함께 든 후, 평창역으로 옮겨 20시9분 발 KTX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산본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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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껏 오대산은 불교의 성지로 인식해왔습니다. 월정사의 일주문을 경계로 성지와 속세가 양분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이번에 선재로를 걷고 나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오대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오대천이 세속의 공간이었다는 것은 이번에 선재길을 걸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상원사-월정사 구간의 오대천이 성지가 아니고 세속의 공간이라고 말씀드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 화전민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대천 좌안에 지금은 버려진 밭이 옛날에는 화전이었습니다. 오대산국립공원의 안내 글에 따르면 오대산 월정지구의 화전민은 한 때 150여 가구였다고 하나 현재는 40여 가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러 흔적들이 오대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발견된 것은 더 먼 곳에는 경사가 급한 산비탈만 있어 밭으로 일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을 대기도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둘째, 기차 레일 같은 철편이 일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철편은 벌목장에서 아래까지 목재운반을 위해 설치한 목차 레일로 추정된다고 안내 글에 적혀 있습니다.
셋째, 섶다리가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져 복원한 다리 밖에 볼 수 없지만, 오대천에 다리가 놓였다는 것은 이 다리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넷째, 보매기가 설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안내 글에 의하면 오대천에 보를 막아 물 위에 목재를 쌓아두었다가 우기에 보를 터뜨려 목재를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다섯째, 회사거리가 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장들이 들어서 거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대천 변에 목재를 가공하는 공장이 그 만큼 많이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1972년 가을 처음 오대산을 찾았을 때 월정사를 완전히 벗어나 한 민가에서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집 길 건너로 작은 논배미가 있었고, 그 논으로 내려가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밤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논 너머로 흐르는 하천이 오대천이었습니다. 민가의 주인 역시 그 위에서 화전민으로 살다가 내려와 산 것이 아니었나 싶었던 것은 1970년 소백산을 올랐을 때 석륜암에서 만난 한 분이 그 당시의 소백산 화전민들은 농사철에만 산에 올라와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풍기 집으로 돌아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나서였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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