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구간:백복령-생계령-석병산-삽당령
*산행일자:2006. 2. 19일
*소재지 :강원 정선/평창/강릉
*산 높이 :석병산 1,055미터/두리봉1,033미터
*산행코스:백복령쉼터마을-839봉-생계령-922봉-석병산-두리봉-삽당령
*산행시간:11시7분-17시45분(6시간38분)
*동행 :송백산악회
어제는 백복령카르스트지대를 밟으며 대간 길을 종주했습니다.
2004년 1월 궤방령에서 처음으로 백두대간에 발을 들인 후 총 51회를 출산하여 이제 네 구간만 남겨 놓은 지금 시점에서 아쉬워하는 것은 이제껏 오로지 마루금을 놓치지 않고 밟는데 만 열중하느라 결과적으로 백두대간과 관련된 제반 지리와 역사 그리고 문화를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점입니다. 오는 4월에 대간 종주를 마치고 나서 좀 쉬다가 내 년에 다시 한번 저 혼자서 진부령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의 천왕봉으로 내 달려볼 생각을 하는 것도 그 참에 대간 길로 지리여행을 떠나보고 싶고 또 지금까지의 산행기와 색다른 여행기를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이제껏 제게는 산은 산 그 자체로서 큰 믿음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힘이 드는 것을 참아 내고 나 홀로 종주를 하는 동안에 외롭다거나 두렵다는 느낌을 쉽게 떨어낼 수 있었던 것도 산에 대한 믿음덕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산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 산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아 왔으며 볼 만한 곳은 어디인가 등등은 저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바라보고 오르내리며 산과 일체가 되고 싶었기에 분석적인 눈으로 산을 대한다는 것은 산에 대한 불경이고 모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러저러하게 산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입산이 금지되고 그래서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몇 구간을 뛰고 나자 산을 실체로서 들여다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산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산에 대한 외경만으로 믿음을 계속 가지기도 어렵겠고 이 참에 산에 대한 모든 것을 다시 공부해 산과 보다 가까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어 한번 지리여행을 떠나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의 고향을 찾아 첫 번째 지리여행을 떠난 곳은 50여개의 함몰지가 밀집되어 있어 천연기념물 제 440호로 지정된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북쪽 능선의 백복령카르스트지대였습니다. 지구가 생성된 45억년 전까지 시간의 시원을 찾아 지리여행을 떠나기에는 저희들을 실고 갈 타임머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이번에는 만부득이 그 십분의 일 정도인 고생대까지만 여행했습니다.
약 4억년 전 고생대의 캄브로-오르도스기에 해침의 결과로 조선누층군 석회암지대가 만들어졌고 이렇게 만들어진 석회암지대에 잘 발달된 백복령카르스트지대는 백복령-석병산의 대간 길에 걸쳐있어 산객들의 눈길을 잡고 있는 보기 드문 카르스트지형입니다. 카르스트(karst)지형이란 유고슬라비아 아드리라해 북부의 석회암이 많은 카르스트지방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석회암지대를 뜻합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전역이 화강암 지대입니다만, 충북 제천과 단양, 경북울진, 그리고 강원도의 영월, 삼척과 동해 지역 등은 석회암 지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석회암지대는 지구표면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합니다. 석회암은 오랜 세월 얕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탄산칼슘이라는 석회질 성분이 50%이상 포함된 퇴적암으로 아주 오랫동안 지하로 스며든 빗물에 용해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석회암이 지하수에 녹아 고수동굴, 성류굴, 환선굴등의 아름다운 동굴을 만든 것입니다.
카르스트지형에서 지하의 석회암이 물에 녹아들어 지반이 함몰된 곳이 바로 함몰지로 돌리네(doline)가 대표적인 함몰지입니다. 남부 슬라브어로서 계곡이나 구멍을 의미해 싱크홀(sink hole)이라고도 불리는 돌리네(doline)는 카르스트 지형의 산이나 밭 한가운데가 둥그렇게 푹 꺼져 둥그런 접시 모양을 한 와지지형으로 석회암이 물에 녹아 깎여 생긴 용식돌리네(solution doline)와 석회암 지반이 꺼져 생긴 함몰돌리네(collapse doline)가 있습니다. 또 함몰지는 그 규모에 따라 지름이 수 미터에서 수 백미터에 이르는 돌리네(doline), 지름이 수키로가 되고 깊이와 폭의 비율이 1:10이 되는 우발라(uvala)와 이 보다 훨씬 규모가 커 그 길이가 10-40키로가 되는 포리에(Polije, 맹곡)로 나누는데 이 백복령카르스트지대에 수많은 돌리네는 물론하고 우발라와 맹곡도 생성되어 있다고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이상의 내용 중 상당부분은 박종관 교수가 지은 “ Let's Go 지리여행”에서 따왔습니다.)
아침 11시7분 백복령 고개 너머 임계면의 쉼터마을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자병산의 석회석 채광으로 95년 이후 종주길이 바뀌어 44번 철탑까지 가야 자병산 길과 만나게 됩니다만 어제는 경방 기간 중 입산을 금지해 백복령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임계 쪽으로 조금 내려와 쉼터마을에서 시작하느라 43번과 44번의 송전탑을 건너뛰고 산행을 해 796봉에 올라서기까지 백복령에서 마루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고 산행을 했습니다. 쉼터마을 출발 15분 후 쯤 소나무 밭에 들어서기까지 밭 가운데 가라앉은 작은 돌리네 한곳을 지났습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한 동안 보이지 않던 자병산이 11시40분 경 796봉에 올라서서야 눈에 들어와 헐리고 깎인 대간 길의 뼈아픈 현장인 자병산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2시 10분 762봉에서 얼마고 내려서 십자안부에 다다르자 아주 작은 글씨로 생계령이라 써 놓은 표지판이 서 있었습니다. 생계령에 이르는 동안 지도상에는 여러 개의 함몰지를 지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눈길에 미끄러져 허리를 다칠까보아 발끝만 쳐다보며 조심해서 산행을 하느라 겨우 한 두곳의 함몰지만 기억났습니다. 선답자 몇 분들은 생계령이 지반 함몰로 인해 새로 생긴 길로 원래 대간 길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그렇게 단정할 만한 자료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여 이 고개도 대간 길이려니 생각하며 지났습니다.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아 질펀한 길을 밟아 올라선 829봉에서 평평한 능선 길을 따라 걸어 노송지대를 지나며 몇 그루의 노송의 고고한 자태를 보고 감탄하는 산행대장 한분을 그 소나무 옆에 불러 세워 사진을 찍었습니다.
13시 18분 922봉에 올라섰습니다.
25분가량 계속된 오름길은 이번 산행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깔딱 길이었습니다. 백복령에서 서쪽을 향해 계속된 산행은 922봉에서 끝나고 여기서부터 마루금은 북으로 내닫아 석병산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달 전에 올랐던 소황병산의 넓은 초원지역이 북서쪽 먼발치로 희미하게 보여 산도 아는 것만큼 보임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10분을 더 걸어 다다른 넓은 안부에서 일행들과 함께 오랜만에 따뜻하게 점심을 들었습니다. 불과 2주전에 조침령-단목령 구간을 종주하는 동안 살을 에는 맹추위로 엄청 시달렸는데 그새 이렇게 따뜻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기가 느껴져 그 때의 혹한이 바로 영국의 서정시인 셀리가 읊은 대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예언의 나팔소리였음을 어제서야 확실히 알았습니다.
점심 식사 후 가시잡목들이 길 양옆에 들어찬 능선 길을 지나자 길 왼편으로 가운데가 움푹 꺼진 전형적인 함몰지인 함몰돌리네가 나타났습니다. 이 돌리네 주위를 물푸레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어 한 여름이라면 그 안에다 자리를 펴고 쉬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해 보였습니다. 이곳의 돌리네는 물을 머금고 있지 못해 돌리네로 모여든 빗물은 바로 지하로 스며들었다 인근 옥계면 산계리 지역으로 흘러나와 계곡수 또는 용천수와 같은 샘물을 만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14시17분 석화동굴로 갈리는 고뱅이재를 지났습니다.
표지목에 엘리지 밭이라는 흘린 글씨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나 이 주위가 얼리지 꽃의 군락지가 아닌 가 했습니다. 922봉에서 이곳까지 능선 길은 고도차가 별로 없어 걷기에 마냥 편했으며 이 편한 길은 석병산 바로 밑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고병이재를 출발하여 908봉 헬기장과 상황지미골로 갈리는 분기점을 지나 석병산과 지척거리의 또 하나의 헬기장에 이르기까지 꼬박 한 시간이 걸렸는데 이 능선 길 오른쪽의 동사면은 거의다가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면이어서 마치 댓재-이기령구간을 다시 걷는 듯 했습니다.
“백두대간 운수대길”이라는 표지리봉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이와 같이 개인적인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리봉을 처음 보았습니다. 사실 그 많은 리본 중에 산신령께 올 한해도 무사하고 운수대길하기를 비는 기복적인 리봉도 눈에 뜨일 만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종교 중 거의다가 기복신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대간 길을 종주하는 산객들이 표지리봉을 통해 개인적인 소원을 빈다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15시27분 삼거리 갈림길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비껴있는 해발 1,055미터의 석병산에 올라섰습니다. 세 개의 암봉 중 마지막 암봉인 일월봉에 세워진 정상석 옆에 서서 일행 몇 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제 1봉으로 옮겨 주위의 산줄기들을 조망하며 편히 쉬었습니다. 제 1봉에서 바라다보는 일월봉의 암벽이 수직으로 곧추 서있어 아슬아슬해 보였고 제2봉과 정상봉사이로 넘어다 본 급경사의 골짜기가 절경이었으며 두리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산줄기도 장대했습니다. 십 수분을 편하게 쉬자 두리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16시15분 해발 1033미터의 두리봉에 도착했습니다.
석병산과는 달리 두리봉 정상은 평지였고 표지석을 대신한 초라한 표지판이 나뭇가지에 걸려있었습니다. 석병산에서 쉴 만큼 쉬었고 한 시간도 채 못 걸었는데 피로감이 느껴져 눈밭에 누워 최고로 편한 자세로 쉬었습니다. 등을 눕히고 올려다 본 겨울 하늘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해 카메라에 담아와 집에서 다시 보자 파란 하늘이 내뿜는 도도한 아름다움을 숨겨둘 수 없어 감히 카페의 풍경사진 방에 올렸습니다.
두리봉에서 삽당령으로 하산 하는 길의 안내를 맡은 산죽들이 겨울 내내 머리에 이고 있던 하얀 눈을 털어 내고 길 양편으로 빽빽이 들어서있어 푸르름이 한결 돋보였습니다. 두리봉에서 삽당령으로 하산하는 길도 짧지 않았습니다. 두리봉 출발 45분 후 다다른 866봉에서 GPS수신을 돕고자 베어낸 소나무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며 마지막 남은 물을 마저 마셨습니다. 지난 주 만해도 날씨가 추워 별반 물이 먹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한 낮에 장갑을 벗고 산행을 할 정도로 날씨가 풀려 1리터의 물이 동이 났습니다. 마지막 헬기장을 지나 얼마 후 이번 산행 중 가장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내려서는 중 이제껏 용케도 면한 엉덩방아를 크게 찧어 대간 길을 찜해 놓았습니다.
17시45분 해발 680미터의 삽당령으로 내려서 대간 종주를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누가 하늘이 무너질까 또 땅이 꺼질까 걱정하고 있다면 옛날 같으면 쓸데없는 기우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산행으로 땅이 꺼진 현장을 보았습니다. 뱃속에 든 것이 없으면 배가 꺼지듯이 땅 속에 든 것이 없어지면 땅이 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땅이 꺼질까 걱정을 하는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닙니다. 지하의 석회암이 지하수에 녹아 함몰되는 것은 자연현상으로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지만 땅이 꺼지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과다하게 지하수를 빼내느라 속이 빈 땅이 꺼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채광이 끝난 폐광지의 산이 가라앉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나마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그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겠습니까?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이 서로 부딪혀 별똥들이 이 지구에 쏟아진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을 터이니 말입니다. 이래서 걱정도 병이라는 속담이 전해지는 가 봅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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