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구간: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산행일자:2005. 12. 18일
*소재지 :강원 평창/강릉
*산높이 :고루포기산1,238미터/능경봉1,123미터
*산행코스:닭목재-고루포기산-전망대-능경봉-대관령
*산행시간:11시16분-16시36분(5시간20분)
*동행 :송백산악회
세밑을 얼마 앞둔 어제 강원도의 강릉시와 평창군을 경계 짓는 닭목재-고루포기산-대관령 구간의 산줄기를 밟으며 올 한해 대간 종주를 마무리했습니다. 작년 1월 우연히 한 산악회를 따라 궤방령-추풍령의 대간 길에 발을 들인 후 지리산, 덕유산과 설악산 구간을 뛰면서 조금씩 뜸을 들이다 작년 10월 속리산종주로 송백산악회와 인연을 맺은 것이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게 된 계기가 되어 올 들어서만 대간 길 종주에 36번을 나섰습니다. 이제 강원도 산줄기 몇 구간만 남겨 놓고 있어 전 구간 종주를 마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남아있는 대간 길을 한 구간 한 구간 끝낼 때마다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더했습니다.
한반도의 겨울눈을 호남지역으로 다 몰고 가 집중적으로 퍼부어서인지 정작 동계올림픽유치를 신청할 강원도 평창에는 두 주전 땅을 살짝 덮을 정도로 내리고 난 후로는 전혀 눈 소식이 없어 예년 같으면 벌서 풀렸을 입산금지조치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대간 길 곳곳이 흙먼지가 펄펄 일 정도로 건조해 산불방지를 위한 입산금지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서울에서 200키로 가까이 달려 온 대관령에서 능경봉으로 오르는 대간 길이 차단되자 답답했습니다. 산악회의 융통으로 결국 시간 반 늦게 닭목재로 들머리를 옮겨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만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은 대간 완주를 위해서는 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가하는 점입니다. 관계당국과 산악회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면 묘책이 나올 법 도 하겠는데 지금처럼 감시하고 감시받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대간 꾼들이 범법자로 전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11시16분 해발680미터의 닭목재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산악회에서 올 한해 산악회발전에 이바지한 여러 분을 선정해 대관령 행 버스 안에서 포상을 했는데 산악회카페에 산행기를 열심히 올렸다하여 제게도 MP3를 상으로 내주어 고맙고 기뻤습니다. 9시51분 대관령 기념탑을 출발하여 이곳 닭목재로 향했으나 산불감시요원의 강력한 제지로 돌아가 강릉을 거쳐 닭목재로 올라서느라 시간 반 가까이 출발이 늦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 들머리로 잽싸게 들어서 산행을 시작하는 대원들은 이러한 일정변화에 익숙해진 듯 누구하나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산을 올랐습니다. 푸르른 대나무 밭과 조림한 듯한 낙엽송림을 지나 목축장으로 이어지는 임도에 합류하기 까지 반시간 가까이 오랜 가뭄으로 흙먼지가 날리는 산길을 걸었습니다.
11시56분 956봉에 올라서자 정북 쪽 먼발치로 이번 산행의 도착점인 대관령에 세워진 풍차 2기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앞에 약간 오른쪽으로 빗겨서 능경봉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산 밑의 맹덕한우목장에는 파란 지붕의 집 몇 채가 들어서 있어 마냥 한가해 보였지만, 모자를 날려버릴 정도로 바람이 드세게 불어대 한 곳에서 쉬면서 제대로 조망하지는 못했습니다. 왕산 제1쉼터에 오르는 중 남한 땅에서는 좀처럼 자생하지 않는다는 자작나무가 길 왼쪽의 서 사면에 잘 조림되어 있었고 대간 길 곳곳에 주위의 활엽수들을 거느린 듯이 하늘로 치솟은 적송들이 말끔하고 훤칠해 보였습니다.
12시51분 해발 952미터의 왕산2쉼터에 도착했습니다.
36분전에 지나온 제1쉼터에서 키가 작은 대나무와 갈참나무 그리고 철쭉나무 숲을 차례로 지난 다음 돌길을 올라 다다른 2쉼터에서 먼저 온 몇 분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떡을 꺼내 드느라 장갑을 벗은 손가락이 금세 아려올 정도로 냉랭한 겨울공기로 등의 땀이 식어버려 온몸이 오드들 떨려왔기에 식사가 끝난 후 더 이상 머뭇대지 않고 바로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십 여분 간 된비알의 오름길을 치고 올라 CBA No. 35호 송전탑을 지나자 다시 임도가 나타났습니다.
13시38분 해발1,238미터의 고루포기산에 올라서자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드셌습니다. 2003년 1월초 이 산에 올랐을 때 맞았던 바람이 이번에도 여전히 거칠게 불었지만 그 세가 많이 약해졌고 눈도 전혀 쌓이지 않았으며 그 때보다 훨씬 따뜻해 이번에는 얼굴에 동상이 걸려 병원을 다녀야 했던 지난번의 수고를 아니 해도 될 것 같아 큰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고루포기잔혹사로 불러도 좋을 만큼 3년 전 대관령에서 고루포기산에 오르는 4시간이 제게는 이제껏 가장 견디기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영하 28도의 대관령을 출발해 쉼 없이 불어대는 칼바람을 안고 무릎을 넘는 눈길을 헤쳐 나가느라 진이 빠지고 얼굴이 얼어붙는 등 정말 혼났습니다. 이번에는 그 때보다 기상조건이 양호해 별일 없겠다 했는데 엉뚱하게도 길을 잘 못 들어 잠시 서쪽 횡계 쪽으로 내려가다 첫 번째 송전탑에서 되돌아 와 바람돌이님의 현명한 판단이 없었다면 고루포기잔혹사가 또 다시 되풀이될 뻔 했습니다.
14시7분 고루포기산으로 되돌아 가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대간 길로 들어서자 5.4키로 떨어져 있는 능경봉이 날씨가 맑아서인지 생각보다 가깝게 보였습니다. 능경봉 전방 3.7키로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이제껏 걸어온 마루금을 뒤돌아보자 한낮에 남중했던 태양이 고루포기산 정상 가까이로 내려앉기 시작했고 바로 눈앞에 참나무 몇 그루의 높은 가지에 초록색의 겨우살이가 자리를 틀고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겨우살이 밑에서 입을 맞추면 반드시 결혼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는데 초혼만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재혼에도 유효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4시48분 능경봉을 3.1키로 남겨 둔 지점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진행했습니다.
한 시간 후 행운의 돌탑에 이르기 까지 몇 개의 봉을 오르내리며 제 고향을 지키고 있는 파주 광탄의 수선화님과 고향얘기를 나누다가 제 막내조카딸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임을 듣고서 말 그대로 세상이 참 좁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능경봉을 관통하는 영동고속도로가 훤하게 뚫려있었고, 길 왼쪽 사면에는 자작나무 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나무를 제외한 잡목들을 모두 간벌해 자작나무를 제대로 한번 키워보겠다는 산림청의 의지를 읽었으며, 안부마다 세워진 안내판에 산수국, 구절초등의 사진이 실려 있어 지루함이 덜했습니다.
15시57분 해발1,123미터의 능경봉에 올라섰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분들의 안녕과 행운을 빌고자 세운 “행운의 돌탑”을 지나자 널찍한 돌을 깔아놓은 얼마간의 산길이 이어져 이제껏 걸어왔던 단조로운 산길보다 변화가 있어 능경봉에 오르는 마지막 고바위 길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른 쪽 산 밑으로 강릉시와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 왔고, 왼쪽 횡계리에서 불어올라오는 골바람이 냉랭하기 이를 데 없어 커피로속을 데운 후 이내 대관령으로 하산했습니다.
16시32분 해발 850미터의 대관령에 내려서 5시간 남짓한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대관령에 세워진 풍차는 칼바람에도 꿈쩍 않고 쉬고 있어 이 풍차가 발전용이 아니고 관광용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대관령에서 버스에 올라 몸을 녹이고 있는 중 벌써 서울로 떠났어야 할 하이맛 친구가 나타나 그 연유를 알아보니 고루포기산에서 알바 한 번 제대로 하여 마을까지 거의 다 내려갔다가 돌아오느라 저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것으로 이 추위에 혼자 뒤쳐져 시간 반을 헤맸을 것을 생각하니 이번에는 이 친구에게서 고루포기잔혹사가 재현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5년 송년행사로 마련된 저녁메뉴가 다른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맛있었습니다.
알바만 아니었다면 벌써 귀경 길에 올랐을 독일어로 고향을 뜻하는 “하이맛”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배를 불리자 얼었던 몸이 풀렸고 마음도 같이 따뜻해져 마치 수선화님이 지키고 있는 파주 광탄의 고향을 찾은 듯 안온했습니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이나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을 일컫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파주의 광탄 땅이 4대조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기에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파주 광탄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서울과 수원의 병원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어린 시절을 용인에서 자랐기에 굳이 고향을 대라면 한참을 고심하다 조상들이 살았던 파주 광탄이라 답하겠지만 아들들이 이 곳을 찾을 때 과연 저처럼 평온함과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제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 급속한 산업발전과 도시화로 일반화된 것이기에 이제 고향의 개념이 그리 간단하지 않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고향을 흙으로 빚어낸 모든 산으로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태어난 고향을 따져 대립하는 지역갈등문제도 자연 사라질 터이고 고향 찾아 산에 오르는 분들이 많아지고 고향 대하듯 산을 위하면 자연보존도 절로 이루어지겠다고 상상해보면서 이글을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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