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7.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1( 운주사)

시인마뇽 2008. 4. 28. 12:35

                                                     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1


 

                                              *탐방일자:2008. 4. 24일(목)

                                              *탐방지   :전남 화순소재 운주사

                                              *동행      :나홀로

 

 

   예향의 땅 호남에는 찾아 갈만한 명소가 많습니다.

작년 한해 찾아본 이 지방 명소는 주암 고인돌공원, 낙안읍성 민속마을, 순천만과 소록도 등으로 네 곳 모두  호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들렀습니다.  우정 내려가기에는 시간과 돈이 적지 아니 들기에 이제껏 탐방을 미뤄왔던 명소들을 호남정맥 종주 길에 들른 것은 제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이틀 연속 무거운 짐을 지고 산줄기를 혼자 걷는 데서 오는 긴장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습니다. 해지기 전에 버스가 지나다니는 고개 마루에 당도해야하는 긴장감과 아직도 산식구들과의 묵언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아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 짐이 된다 싶어 종주 길에서 홀연히 벗어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이 지방 명소를 들러보노라면 옛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지고 탐방 길에 만나는 사람들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어 참 잘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습니다.


  이번 호남정맥 종주 길에는 전남 화순의 도암면에 위치한 운주사를 들렀습니다.

지난 번 종주산행을 끝낸 오정재에서 추월산을 넘어 밀재까지 12시간이 걸리는 긴 코스를  하루에 마치기위해서는 하루 전에 광주에 도착해 일박을 하거나 심야에 운행하는 고속버스를 타야했습니다.  이참에 하루 먼저 내려가 화순의 운주사를 들러본 후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종주산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오전 11시20분 강남의 센트랄시티를 출발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수원 권역을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광주에 도착한 시각이 예상보다 많이 늦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광천터미널 앞에서 오후4시20분에 218번 시내버스를 타고 화순을 지나고 능주 벌을 달려 저녁 6시 경에 운주사입구에서 하차했습니다. 오른 쪽으로 난 차도를 따라 10분가량 걸어 다다른 “靈龜山雲住寺”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에서 1시간 남짓한 운주사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운주사는 규모면에서 결코 대찰이 아닙니다.

지리산의 화엄사나 조계산의 송광사에 비하기에는 턱없이 초라한 절입니다. 대웅전과 명부전과 종각 외에는 단 3개(?)의 부속건물이 전부인 운주사는 시골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그저 그런 작은 절입니다. 운주사는 지은 지가 천년을 넘는 고찰도 아닙니다. 백제 때 창건한 모악산의 금산사나 삼국통일 후 개찰한 월출산의 도갑사에 견줄 만큼 오래된 절이 아닙니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일설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여러 사료들은 고려 초 혜명스님이 세웠다는 동국여지지의 기록이 더 타당하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운주사가 명산이나 고산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닙니다. 운주사를 둘러싼 영구산(靈龜山)은 축비1/50,000 지형도에도 그 이름이 실리지 않을 만큼 무명의 산이고 그 높이가 해발고도 200m를 넘지 못해 어느 시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앞산 또는 뒷산에 지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일뿐입니다. 작가 황석영님이 그의 소설 “장길산”의 말미에서 주인공인 장길산이 이 산으로 쫓겨 들어가 머무른 것으로 묘사한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 산의 산세가 전혀 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절을 찾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년 봄 저와 함께 호남정맥의 백운산 구간을 종주한 친구가 운주사탐방을 권해왔습니다. 이 친구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고 있어 이 절에 아마도 우리나라 건축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건축물이 들어섰나보다 하면서 그 때는 그의 이야기를 그냥 흘렸습니다. 얼마 후 작년 언젠가 KBS TV에서 방영한 운주사를 보고나서 탐방결심을 굳혔습니다. 산 중턱에 놓인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의 자리배치를 그대로 닮았으며, 중국 어디에선가 살고 있던 이민족이 배를 타고 능주지방으로 이주해와 이 절을 지었다는 방영내용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해 언제고 호남정맥 종주 길에 한번 들러보자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다음 종주산행부터는 전남 땅의 호남정맥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 광주를 들르는 마지막 기회인 이번이 호기이다 싶어 운주사를 찾은 것입니다.


  


  운주사를 오늘의 명소로 끌어올린 것은 이 절에 자리한 천불천탑(千佛千塔)입니다.

천불천탑(千佛千塔)이란 천불신앙의 돈독한 불심으로 세운 수많은 석탑과 석불을 이름 하는 것으로 꼭 천개의 불상과 불탑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합니다. 대원사에서 펴낸 “운주사”라는 소책자에는 천불신앙이란 과거 장엄겁(莊嚴劫), 현재 현겁(賢劫), 미래 성숙겁(星宿劫)의 삼세(三世) 삼천불(三千佛)가운데 현재 현겁의 천불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중국이 남북조시대 이래 당대까지 각지에 천불이 조성되고 유지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후기에 전래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경남의령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의 명문에 천불상의 조성사실이 보여 주목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대사의 설화가 운주사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가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운주사 경내에 1백 여분의 돌부처와 30여기의 돌탑들이 산재해 있어 얼마 전에 다녀온 경주 남산에 비해 빠질 것이 전혀 없는 더 할 수 없이 훌륭한 석탑과 석불의 자연전시장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운주사 경내로 들어서자 도랑 건너 왼쪽 잔디밭에 나란히 서있는 석불들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13분의 석불들이 짓고 있는 얼굴모습이 제 각각이었는데 어떤 돌부처는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으며 또 다른 석불은 두 손을 꼭 잡고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를 올리는 듯 했습니다. 이제껏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온후한 부처님만을 보아온 저로서는 앞서 본 두 돌부처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교하지 못한 것은 석불만이 아니었습니다. 운주사 앞뜰에 세워진 석탑들도 여느 명찰의 석탑들에 비해 조금은 투박해보였으며 탑신의 형태도 그 흔한 네모꼴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맷돌 같이 둥그런 것도 있고 공 모양을 한 동그란 돌을 올려놓은 석탑들도 있었습니다. 야외의 석탑 안에 자리 잡은 석조불감을 보자 벌써부터 부처님은 중생들을 만나보고자 대웅전을 뛰쳐나와 야외로 나섰는데 불쌍한 중생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지기 전에 웬만하면 다 들러보자는 욕심에서 후다닥 사진을 찍고 바로바로 자리를 옮겨야 했기에 안내문을 자세히 읽지 못하고 대신에 운주사를 소개하는 소책자 한 권을 사갖고 왔습니다.


 잔디밭에 가지런히 서 있는 돌부처들의 다양한 얼굴처럼 이들이 세워진 장소도 꽤나 다양했습니다. 산기슭이나 산등성은 물론 계곡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돌부처들은 대부분 서있었지만 누워 있는 작은 돌부처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경주 남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애불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영구산의 바위가 곧바로 서있는 화강암이 아니고 가로로 층을 이루고 있는 퇴적암이어서 바위에다 부처님을 새기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다양한 석탑과 석불을 보고나자 대웅전에 안치된 세존께서 참으로 뿌듯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많은 부처들을 보살피시기가 힘은 좀 드시겠지만 저토록 다양한 부처들과 함께한 부처님이 여기 세존 밖에 어느 분이 더 있으랴 싶어서였습니다. 대웅전을 지나 커다란 바위아래 놓인 돌부처들을 만나 본 후 불성암으로 오르는 길에 마애여래좌상에 관한 안내판을 보았습니다만,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운주사에서 유일한 마애불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커다란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역암의 불사암에 올라서자 방금 전에 걸어 들어온 남쪽 아래 계곡과 이 계곡에 서 있는 돌탑들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 분위가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습니다. 산마루로 올라섰다가 대웅전으로 되 내려가는 길에 하부로부터 네모꼴과 원통형및 원구형을 중첩해 쌓은 이형적인 다층석탑을 들러보았습니다.


  대웅전 뒷산에 올라서자 불에 타다 남은 시꺼먼 나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망연자실했습니다. 바로 아래 대웅전과 수많은 돌탑과 돌부처를 온 몸으로 지켜낸 나무들에 정말 미안한 것은 저번 산불이 실화가 아니고 방화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몹쓸 사람의 광기가 나무들의 희생을 가져온 것이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산을 찾는 제가 앞으로 무슨 낯으로 나무들을 대할까 싶어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가 읊은 대로 시는 시인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는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불사암에서 더 올라가 산마루에 올라서자 묘지 한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머리 위에 조상을 모시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방화를 불러일으켰을 수 도 있겠다 싶어지자 깊은 산속에서 만난 묘지처럼 반갑지 않았습니다. 나무들도 땅바닥도 모두가 시꺼먼 죽음의 땅을 뚫고 힘들게 돋아난 가녀린 새 잎을 보고 이 자연의 끈질긴 생명에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이 경외감은 제게는 생명에의 신뢰와 찬미요 희망이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겠기에 저 작은 풀잎이 머지않아 이 산을 다시 푸르게 만드는 풀숲의 시작이다 싶어 쉽게 눈을 뗄 수 가 없었습니다. 


  대웅전 경내에서 빠져 나와 이번에는 왼쪽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서서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후레쉬가 터지곤 했습니다. 어둠도 화기도 모두 이겨내고 몇 백 년 간 자리를 지켜온 돌부처를 보다 밝게 보고자 후레쉬를 터뜨리는 것이 옳은 짓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넓적한 거북바위에 세워진 석탑과 그 바위 아래 놓인 돌부처들보다 더 높은 산마루에 두 분의 돌부처가 나란히 누워있었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와우정사에서 만나 뵌 와불은 비 가림을 할 수 있는 건물 안에 모셔졌지만 여기 와불은 바깥에 그대로 눕혀 있어 그저 세월을 낚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제 사진솜씨로는 한 커트에 다 담기 어려울 만큼 누운 키가 하도 커 부처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예상대로 섬세하지는 못하다는 세인들의 평가를 나중에 읽었습니다. 다음에 들러본 칠성바위는 북두칠성의 배열을 그대로 빼닮았다 합니다. 두 뺨이 조금 넘는 두꺼운 원형 암반이 엄청 커보였는데 어떻게 7곳에 옮겨놓았는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여기 칠성바위가 당대의 천문학수준을 반영한 것이 아니고 그저 무탈하게 잘살아보자는 중생들의 염원을 담아놓은 것이라면 중생들의 소박한 염원이 모아져 저 묵직한 원형 암반을 옮겨놓을 수 있는 괴력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칠성암에서 계곡으로 내려서자 종각에서 종을 울리는 스님 한 분이 보여 카메라에 옮겨 담아 왔습니다. 33번의 타종을 끝낸 스님께서 왜 종을 치셨냐는 저의 무식한 질문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들면서 유식한 답변을 주셔서 무슨 뜻인지 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허겁지겁 들어오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석탑들을 나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석조불감과 원형 다층석탑 등은 투박하기는 해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발걸음을 옮겨놓기가 아쉬웠습니다. 석탑보다 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돌부처들에는 그새 정이 들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다시보아도 저 석불들은 예술품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진흙으로 토우를 빚는 그 솜씨로 우리 중생들의 다양한 얼굴을 그대로 그려낸 선조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당신들의 못난 얼굴을 영원토록 그대로 내보이는 용기와 진솔함 때문입니다.


  저녁 7시20분에 일주문을 빠져나와 운주사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천탑을 세우겠다는 천불신앙이 여기 운주사의 미완의 신화를 만들었다면 이 신화의 주인공은 어느 특정인이 아닌 민중들이 분명합니다. 돌부처의 일그러진 모습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생생한 얼굴 모습입니다. 고개를 외로 꼰 석불의 모습도 고뇌하는 선조들의 모습이고 두 손모아 하늘을 향해 합장하는 돌부처도 먼저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보다 더 높은 분이 하늘에 계시지는 않을까 회의하는 조상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황해도에서 발흥한 장길산 일당들이 이곳 능주 땅 운주사로 도망 온 것도 산세가 깊어 은신하기 좋아서가 아니고 돌부처를 만들고 돌탑을 쌓은 민중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열흘 전에 오른 경주 남산의 마애불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운주사의 돌부처들에서 에너지 넘치는 민중들의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을 읽었습니다. 자비와 영생에의 염원 모두 생명에의 외경심이 없다면 실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리석은 한 인간이 저지른 방화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운주사 뒷산이 하루 빨리 생명을 되찾을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면서 운주사 탐방기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