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소록도 탐방기

시인마뇽 2007. 8. 12. 00:59
                                                소록도 탐방기


                                   *탐방일자:2007. 8. 10일

                                   *탐방지  :나환자촌 소록도공원

                                   *동행    :저 홀로

 


  1950년대 말쯤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공지사항이라며 말씀하셨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이 어린 애들을 죽여 간을 빼먹는다며 여러분들은 혼자 다니지 말고 꼭 두 세람씩 같이 다니라는 것과 반드시 고춧가루를 준비해갖고 다녀 그들이 공격해오면 얼굴에 뿌리고 도망치라는 내용을 전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의무교육기관인 초등학교에서 공공연히 문둥병환자들의 공격을 막아낼 더 할 수 없이 무지한 지침을 학생들에 교육시킨다는 것은 말이 되느냐고 흥분하겠지만 당시로는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 폐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풍문이 풍미하던 때여서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무지가 빚어낸 슬픈 이야기입니다.

국가도 무지했고 학교도 무지했고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무지했습니다. 물론 문둥병 환자들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지가 판을 치는 세상을 주름잡은 것은 폭력의 공포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분명 문둥병 환자들이 상이군인과 더불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삶이 저주스럽도록 절망적인 상이군인들의 횡포 또한 어린 저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 바쳐 싸우다가 팔다리를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고향으로 돌아온 상이군인들에 우리나라는 참으로 염치없이 대했습니다. 이 나라가 더 이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해 끼니를 이을 수 없었던 그들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기에 사회로부터 냉대 받은 그들은 궁핍한 생활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농가를 찾아 쌀을 내달라고 위협하고 불응 시에는 갈고리 의수를 휘둘러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빼앗다시피 받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상이군인도 문둥병 환자도 모두가 스스로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기에 구걸행각이 불가피했는데 이들의 잦은 구걸이 그렇잖아도 먹을 것이 부족해 춘궁기에는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들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농민들의 시선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국가공무원들이 미국에서 원조해준 분유를 몰래 집으로 빼돌리는 부패사례들이 어린 제 눈에도 띌 정도였으니 그들의 공포상황 연출은 거의 유일한 삶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 군 출신의 박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참전용사 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배려가 제도로서 정착되었고 나환자에 대한 실질적 치료혜택이 확대되어, 70년대에 들어서는 거리를 떠도는 상이군인들과 문둥이들을 찾아볼 없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머릿속에 입력된  그들은 무섭고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잘 못된 인식만은 그 후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커서 이른바 문둥이라 부르는 나환자들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74년으로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된 이청준선생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소록도가 무대인 이 소설의 큰 줄거리는 대략 이러했습니다. 한 현역대령이 소록도의 병원장으로 취임해 이 섬의 나환자들에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주고자 득량만 매립공사를 시작했는데, 이 공사를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환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싸우다가 섬을 떠났고, 그 7년 후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미감아 두 사람의 주례를 맡는 것으로 끝을 맺는 내용입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나환자들을 위해 세우는 천국이 원장 등 세우는 사람들의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고 나환자들의 “우리들의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천국이 자유와 사랑에 기초해 세워져야 하고 이 천국에서 살아갈 사람들과  대립하는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나환자들의 생생한 삶과 생각을 접하고 나서 어렸을 때부터 이들에 가졌던 편견과 오해가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어떻게든 이들에 가까이 가서 사죄하고 싶은 마음에서 벌써부터 소록도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마침 호남정맥 종주 차 이 섬과 멀지 않은 보성 땅을 지나도록 되어 있어 짬을 내어 들렀습니다.


  아침5시 순천역에서 고흥반도 남단의 녹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벌교와 과역, 그리고 고흥을 차례로 지난 다음 6시 20분을 조금 넘어 녹동에 도착했습니다. 승선장으로 가는 길에 한 기사식당을 들러 아침을 들었는데 5천 원짜리 밥상에 무려 14가지 반찬이 나와 모처럼 포식했습니다. 소록도행 첫배가 아침 7시에 출발한다하여 새벽부터 서둘러 첫 버스로 왔는데 관광객은 8시 반 배부터 승선이 가능하다며 한 승무원이 저의 승선을 막았습니다. 아침 일찍 소록도를 둘러본 후 팔영산으로 옮겨 여덟 봉을 두루 밟고 하산해 저녁 6시에 순천을 출발하는 천안행 기차를 타는 것으로 일정을 짜 놓았기에 이 항구에서 시간 반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찌할바를 몰라 당혹해 하던 중  마침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조반을 차려 갖다 주느라 승합차를 몰고 승선하는 기사식당 주인 내외분을 만났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당신들 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해 그 차에 올라타 7시 배로 몇 백m의 좁은 바다를 건넜습니다. 녹동 항 오른 쪽 가까이에 소록도로 들어가는 연륙교를 놓고 있어 1970년대에 육영수 여사가 약속했던 연륙교가 올 추석에 비로소 개통될 것이라는 식당주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7시10분 경 식당주인분에 감사인사를 드리고 중앙공원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막상 차에서 내리자 어디를 가볼까 난감했던 것은 너무 일찍 와 외부관광객들이 거니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포장도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중앙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공원은 깨끗했고 나무들은 단정했습니다. 잡초를 깎아내는 예초기의 소리만 요란했고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조용해 공원이 아니고 정원을 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고흥 땅을 뒤덮은 먹구름은 어디론가 사라져 하늘이 쾌청했고 그래서 비옷을 걸치지 않은 것만도 퍽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개의 기념비와 나무들을 사진 찍고 나서 안내판에 적혀있는 성당을 찾았습니다. 지나가는 수녀 한분이 저를 성당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단층의 성당은 지은 지가 꽤 오래되어 보였습니다.

마침 아침미사가 7시 반에 시작되어 4-5분을 기다렸다가 여기 나환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올렸습니다. 밀알이 산채로 그대로이면 한 알로 남지만  죽어 이 땅에 묻히면 수많은 밀알을 만든다는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듣고 부끄러웠고 호남정맥 종주 길에 그저 한번 들러볼 요량으로 이 섬에 들어 온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자리의 한 분이 손가락이 없는 두 손으로 성가집의 책갈피를 넘기는 것을 보고 팔다리가 멀쩡해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저야 말로 무한한 은총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은총을 받고서도 달랑 몸만 왔다 가는 것이 왠지 모르게 이 분들에 죄를 짓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사 시간 중 어렸을 때 편견을 가졌던 저의 못남에 대해 용서를 빌었고 또 이 분들이 항상 주님과 함께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빌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선 후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제게 여기사는 몇 분들이 어떻게 성당을 왔냐고 물어와 죄송했습니다.


  더 이상 원내를 돌아다니기가 민망스러워 바로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중앙공원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왼쪽으로 솔밭이 바다와 면하고 있는데 해안선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깔끔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솔밭 가까이 선도반 건물이 있고 그 건너편 건물에 원생자율반(?) 간판이 붙어있어 소록도가 나환자들의  자치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8시반 에 들어오는 배를 타고 나갈 심산으로 선착장 행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가는 중 승합차 1대가 멈춰섰습니다. 기사식당 주인 내외분들이 조반을 갖다 주고 돌아가는 길에 저를 보고 차를 세운 것입니다. 이분 들 차로 선착장으로 옮겼습니다.


  8시40분 경 소록도를 빠져 나와 녹동 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시간 반 남짓한 탐방시간 중 이들과 함께 아침미사를 드린 것은 제게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이제는 소록도가 더 이상 “당신들의 천국”만이 아니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변화했음을 저는 느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어 몸은 비록 불구이지만 성가집 책갈피를 넘기는 이들에게서 이 섬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어가겠다는 집념을 보았습니다. 작가 이청준 선생이 진정으로 세우고자 했던 천국을 이들이 결실하는 것 같아 온 섬에서 평화로움과 안온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천국을 세우는 데는 국가의 역할이 컸다는 생각입니다. 국가가 나서 이들의 치료를 도맡았기에 어렸을 때 공포를 자아낸 이들의 무지한 행보가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와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또한 이들의 천국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제 소록도에 미흡하나마 "우리들의 천국"이 들어섰기에 이들에 더 이상 저의 편견을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아도 좋을 듯  싶어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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