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6.경북 북부권 명소 탐방기

시인마뇽 2007. 10. 17. 12:28

                                    

                                            경북 북부 명소탐방기

 

                  *탐방일자:2007. 10. 13-14일

                  *탐방인원:경동고24기 11명 (김남진부부, 김주홍부부, 장광종부부, 서중원,

                                                        이기후, 이달헌, 이명재, 우명길)

                  *탐방명소:  1)청송군: 주왕산, 주산지,

                                     2)안동시: 안동댐, 안동민속박물관, 봉정사, 하회마을, 의성김씨 학봉종택

                                     

 

*시작의 글

 

  아직도 양반들이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곳을 들라면 단연 안동입니다.

구한말 갑오경장 때 양반제도가 격파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양반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 것은 6.25 전쟁 이후의 일입니다. 전례 없이 참혹한 전쟁을 치른 후 양반들도 입에 풀칠하고 살아나가는 것이 초미의 과제였기에 자연 양반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벗어던지고 억척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도 양반제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안동에서만이 그나마 남아 있는 양반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허와 실을 탐색해 볼 수 있었기에 이달헌 동문의 초청으로 고교동문들과 함께 안동권 일원을 둘러본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훌륭한 탐방이었습니다.

 

 

 

1)주왕산

 

  경북의 오지 청송에 자리한 해발721m의 명산으로 주왕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합니다. 13일 12시에 대전사 앞 주차장을 출발해 주왕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약 1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넓은 공터에 세워진 정상석을 배경으로 등정기념 사진을 찍은 후 평평한 곳을 찾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칼등고개를 거쳐 잘 자란 적송 숲을 지나 대전사-제3폭포의 넓은 길로 내려섰습니다. 몇 번을 다녀간 제3폭포는 길 위에서 내려다만 보았고 대신에 대로에서 벗어나 협곡 안에 있는 2단 폭포인 제2폭포를 들러 보았습니다. 주왕산의 명소는 누가 뭐라 해도 학소대가 으뜸입니다. 청학의 슬픈 전설이 깃든 학소대와 이를 둘러싼 협곡, 그리고 그 아래 폭포를 담는 데 특별한 사진기술이 필요한 것은 굽이진 협곡이라서 햇빛이 잘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남진부부와 서중원, 이명재 동문은 서둘러 주왕굴을 들러보고 다른 사람들보다 반시간을 먼저 내려와 주차장에서 후미를 기다렸습니다. 5시간의 주왕산 산 오름은 어느 때보다 등산 시간이 짧았고 볼거리가 많아 모두들 별로 힘이 든 것 같지 않았습니다.

 

 

 

2)주산지

 

  농업용수를 확보하고자 조선조 경종 때에 주왕산의 남동쪽 계곡을 막아 담수한 저수지가 주산지입니다. 규모로는 예당저수지에 한참 못 미치고 역사로는 제천의 의림지를 따라갈 수 없는 작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저수지인 주산지가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 데는 저수지에 뿌리를 내리고 반신욕을 즐기는 왕버드나무 덕분일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에서 이 저수지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한 김기덕감독의 공이 한 몫을 한 것도 분명한 일입니다. 하늘이 흐려 저녁햇살을 기다리는 물고기들의 몸놀림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빗방울이 한 두 방울 흩뿌리며 땅거미를 불러들여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가는 주산지의 정경도 몽환적이었습니다. 물안개가 뽀얗게 이는 아침시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주산지를 떠났습니다.

 

 

 

3)안동댐

 

  1976년 이 댐이 준공되었다 하니 이 댐은 분명 박정희대통령의 노작입니다.

치산치수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된다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망각한 김정일 정권이 북한의 산과 물을 다스리는 데 실패해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입니다. 일찍이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은 산경표를 만들어 산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자료를 집대성했고, 그 후 정조 때 다산 정약용이 대동수경표를 만들어 물을 제대로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안동댐을 보고 신경준과 정약용의 실사구시의 뜻을 잘 받들어 뒤늦게 구현한 분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댐 준공 1년 후 당시 영부인 역을 맡았던 박근혜씨가 방생행사에 왕림한 것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충주시와 더불어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표적인 내륙도시인 안동의 시민들에는 안동호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감 가는 풍경일 것입니다. 소양호나 충주호와는 달리 안동호에 띄워진 배를 보지는 못했지만 잔잔한 물결과 물줄기를 따라 나란히 이어지는 고만고만한 산줄기가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4)안동민속박물관 /야외박물관

 

  안동 댐 바로 아래 수위조절용으로 만든 수중보를 가득 채운 물이 잔잔했습니다.

수중보 옆에 자리한 안동민속박물관과 야외 박물관은 안동의 옛 문화를 재현해 놓은 곳이기에 안내를 맡은 이달헌 동문이 강력하게 추천한 곳입니다. 산위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야외박물관 전체를 KBS드라마세트장으로 잘 못 알고 저는 탐방을 하지 않았는데, 다른 동문들은 야외박물관에 드라마세트장이 일부 끼어든 것으로 제대로 알고 빼놓지 않고 들러보았습니다. 바로 옆 안동민속박물관의 전시물은 두층에 나누어져 전시되었으며 안동 양반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모형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처럼 살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달플 까 생각해보니 양반제도가 무너지기를 정말 잘 했다 싶었습니다. 양반제도의 붕괴는 상민과 여성들의 복권으로 나타났습니다. 화첩놀이를 나선 여인네들을 묘사한 그림을 설명하는 한 안내원이 조선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남자가 아니고 세월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진 세월을 살아온 이 땅의 여성들이 바로 우리 할머니였고 어머니였습니다. 여기 박물관의 전시물이 그 분들을 마지막으로 질곡의 시간을 끝나게 한 것은 봉건제도를 붕괴시킨 세월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안동양반의 겉과 속”이라는 책 한권을 사들고 박물관을 나섰습니다.

 

 

 

5)봉정사

 

  안동 땅에 양반만이 살았고 그들의 학문과 문화만 존재한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봉정사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동쪽의 평안한 땅이라는 의미의 안동(安東)이라는 이름을 손 수 지어 휘하 장수에 여기 땅을 내주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안동 주변에 고려 또는 불교와 관련한 전탑과 사찰이 엄청 많으며 안동은 봉정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불교의 본산이기도 했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때 지어진 고찰로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이틀 내내 잘도 참아준 하늘이 봉정사에 들기 얼마 전부터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를 맞아서인지 높게 쌓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봉정사의 가람이 더욱 고색창연해 보였습니다. 절터가 그리 넓지 않아 대웅전과 극락전, 삼층석탑과 법고 건물이 조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듯 했습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나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손길만 정성스럽다면 저 극락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과 같이 나무들이 죽어서도 천년가까이 제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가 봅니다. 절에서 내려와 뒤돌아보자 이 절에서 촬영을 했다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들른 봉정사도 제게 그 까닭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저는 아직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6)의성김씨 학봉종택

 

  학봉은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왜국을 다녀온 부사 김성일의 호로 이 종택은 바로 학봉선생이 사시던 집이라 합니다. 똬리모양을 한 “ㅁ”자 집의 구조가 독특했습니다. 종택을 관리하는 한 분은 여기 경상도에서는 “ㅁ”자 집이 흔하다는데 제 고향 경기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때마침 내리는 빗줄기가 조금 굵어져 낙수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습니다. 이렇게 비오는 날에는 종갓집 어른들은 무슨 일로 소일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안채에서는 부친 개 부치는 냄새가 진동할 터인데 책인들 제대로 잡혔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상민들처럼 입을 쩍쩍 다시지는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족보를 꺼내들고 뿌리를 찾으며 소일했을 것입니다. 촉촉하게 비를 맞은 뜰 안의 잔디밭과 향나무, 그리고 바위 돌 모두가 이 집의 나이를 더 들어 보이게 했습니다. 뒤 쪽의 사당은 미쳐 들러보지 못했습니다. 십만 양병을 주창한 기호지방의 대표적 유림인 율곡선생은 제 고향분입니다.  학봉 선생의 체취가 어린 종택에 들어서자 오직 백성을 안심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왜국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잘 못 상주한 그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유수한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종택이 보존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학봉 김성일 선생은 임진왜란을 만나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건지려 애쓴 분이기에 국가에서 세금을 들여 종택을 보존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7)하회마을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아온 하회마을을 마지막으로 들렀습니다.

야외박물관 건너편에서 이 지방 고유의 음식인 헛제사밥을 사들은 후로는 잠시도 쉬지 못했는데 하회마을에 도착한 것은 저녁 5시가 다 되어서였습니다. 낙동강물이 S자를 그리며 휘돌아 간다하여 하회(河回)라는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조선조의 명가인 풍산유씨 집성촌이기도 합니다. 여러 종류의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하회마을은 관광로를 중심으로 음식점이 많이 들어서 있었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 이곳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초가지붕위에 열린 커다란 박 덩이들과 돌담의 골목길이 옛 시골 풍경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을 모시는 충정당을 들러보았지만 우리 고유의 가옥양식에 문외한인 제게는 그 집이 그 집처럼 보였습니다. 우리의 옛 가옥들을 연구해온 이규성 교수가 탐방을 같이 했다면 보다 알찼을 터인데 그리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양반가 중 최고의 명문가인 풍산유씨가 모여 사는 하회마을이 탈바가지로 이름을 날린 것은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회탈의 12얼굴 중 양반탈과 선비탈의 단 2개를 제외하고는 백정탈, 중탈과 부네탈 등  도저히 양반들과 같이 할 수 없는 부류의 얼굴을 한 탈들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이 마을을 에도는 낙동강을 보아야 할 것 같아 강둑길로 나섰습니다. 물이 많지 않아 하상에 모래가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습니다. 강과 둑 사이에 자리한 소나무 밭이 한 여름에는 더 할 수 없는 쉼터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소나무 밭을 지나 모래밭이 널게 펼쳐 있는 강가로 내려섰습니다. 절애의 암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이 낙동강을 가로 질러 강 건너 백사장으로 가는 나룻배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그 옛날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승용차에 오른 시각이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였으니 하회마을을 둘러보는데 겨우 1시간 남짓 걸린 셈입니다. 마을의 규모나 여러 볼거리를 감안할 때 한나절은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데 어둠에 쫓겨 주마간산 격으로 서둘러 하회마을 탐방을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맺는 말

  명소를 탐방하는 것도 명산을 종주하는 만큼 똑 같이 힘들었습니다.

명산종주는 다리품만 팔면 되지만 명소탐방은 머리까지 바쁘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가을 설악산 등정을 시작한지 꼭 한해가 지났습니다. 설악산, 덕유산, 국망봉, 지리산, 방태산과 주왕산 등이 경동고 24기의 건각들이 족적을 남긴 명산입니다. 안동이 고향인 예안 이씨 달헌 동문의 주선으로 양반 마을 안동의 명소를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주왕산 산행을 마치고 처음으로 풍산의 허름한 노래방에 둘러 한껏 목청을 높이며 방금 전에 맛있게 들은 쇠고기 육회와 불고기를 소화시켰습니다. 김남진 동문의 메들리는 스테이지를 압도 했고 그의 부인 김양미님은 선곡서비스에 바빴습니다. 서중원 동문의 달콤한 목소리는 중년의 여인들을 잠 못 이루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부창부수의 노래솜씨를 보여준 김주홍/김경옥 커플도 노래방에다 돈들인 흔적이 역력했고 기후변화처럼 높낮이가 변화무쌍한 이기후동문의 노래솜씨는 통상의 수준을 어떤 의미로든 뛰어넘었다는 평가입니다. 이달헌 동문은 뽕짝에 능한 솜씨였고 이명재 동문의 열창은 지방방송을 중단케 했습니다. 이 시간 최고의 명창은 장광종 동문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목청을 높였는데 침묵이 금임은 노래방에서도 바꿀 수 없는 철칙임을 철저히 고수해 아무도 그가 부른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입으로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불렀기에 어느 누구도 그와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김주홍 부부가 명창으로 부창부수의 전형을 보였다면 장광종 부부는 침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떠나가는 배”를 부르며 흥을 가라앉혔습니다.

 

  귀경길에 예천의 용궁에 들러 순대국을 들었습니다.

값은 저렴하고, 맛은 빼어나다는 것이 중평이니 누구라도 한번 들러 볼만 하다 싶어 소개 글을 올립니다. (순대국 한 그릇에 3,500원입니다.)

 

  다음 산행은 내년 1월 눈이 푹푹 쌓인 오대산을 오르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번 탐방 여행 중 하룻밤을 묵은 곳은 이달헌 동문의 풍산 본가였습니다.

 

모친께서 입원 중이신 데도 하룻밤 집을 내주고 텃밭의 고추와 호박, 그리고 콩도 같이 내준 친구의 우정에 우리 모두 고마움을 표합니다. 입원 중이신 모친께서 빨리 쾌차하시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