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2008. 5. 10일(토)
*탐방코스:화석정-임진각-반구정-헤이리마을
*동행 :큰아들과 며느리
어제는 제 고향 파주 땅의 명소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큰 아들 및 며늘아기와 함께 찾은 곳은 화석정, 반구정, 임진각과 헤이리마을로 이 모두가 임진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파주의 명소들입니다. 반구정과 화석정이 파주가 낳은 조선조 두 거목의 지혜를 되새기는 역사적 장소라면, 임진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흔들이 갈등의 현대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증언해주는 곳이고, 헤이리마을은 파주의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예술의 마을입니다.
그동안 파주는 휴전선과 접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군사도시에서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군부대는 물론 외국군부대도 파주 땅에 오래 주둔했었기에 외국군과 관련한 생생한 기억들을 저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보았던 빨간 군복을 입은 영국 군인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 겨울이면 집근처 야산으로 훈련 나와 동네 애들에 시꺼먼 보리빵(?)을 나눠주던 터키 장병도, 파주 적성에 주둔했다가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반에 철수한 태국 군인들 역시 지금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유엔군의 주력부대인 미군들이 용주골 등 파주의 기지촌에 뿌린 외화가 1970년대 초반까지 파주의 경기를 좌우할 정도였음도 아울러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파주에는 오랫동안 여기저기에 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지역발전이 상당히 더뎠고 따라서 문화도시로서 면모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제 고향 파주에 출판단지가 들어서고 예술인들이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재작년만 해도 예술인 마을인 헤이리에 텅 빈 공터가 많이 있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어딘가 모르게 썰렁해보였는데 1년 반 만에 다시 찾은 헤이리 마을은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진작 영어마을이 들어선 파주에 머지않아 이화여대 등 서울의 유수대학캠퍼스 몇 개도 같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파주가 교육문화도시로 탈바꿈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군부대의 고도제한으로 아파트도 5층 이상 짓지 못해 우울했던 10여 년 전과는 달리 전국 최고의 혁신도시로 평가받는 제 고향 파주가 이제 군사도시에서 문화도시로 자리바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제 들러본 네 곳의 명소를 한 줄로 꿰어준 것은 바로 임진강입니다.
해발 1,323m의 두류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북한 땅의 법동군, 판교군과 이천군을 차례로 지나 남한 땅 철원군으로 들어섰다가 연천군을 거쳐 파주 땅에 이르러 해발 119m의 오두산 앞 교하에서 한강에 합류해 장장 272Km의 긴 흐름을 마감하는 한강 제1지류입니다. 서울사람들이 한강에 친근함을 느끼듯이 제 1지류인 문산천이 제 고향 집 앞을 흐르고 있어 제게는 애틋하면서도 안온하게 느껴지는 강이 바로 임진강입니다. 대하소설 “조선총독부”로 필명을 날린 유주현 선생은 그의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에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조의 방촌 황희선생과 율곡 이이선생의 지혜를 혜량해 세월에 실어온 것이 임진강이고,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에 슬픔을 달래주는 망향의 장소 임진각을 더 북쪽에 세우지 못하고 자유의 다리 앞에 세울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 또한 임진강입니다. 비극적인 민족의 현대사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셈하면서 이 비극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한강과 만나는 교하유역에 예술의 마을을 자리 잡게 한 것도 임진강이기에 저는 네 곳의 명소들을 세월의 끈을 갖고 한 줄로 꿰어놓은 것이 바로 임진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1.화석정(花石亭)
언제 지나도 가슴이 탁 트이는 넓은 길 자유로를 달리며 산줄기가 뚜렷한 북한 땅의 송악산을 바라보았습니다. 북한산이 조선조 한성을 지켜준 산이라면 송악산은 고려조 개경을 지켜낸 산입니다. 송악산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되새기다가 두문동에서 나와 북한산의 품에 안긴 황희정승이 말년에 기러기와 벗했던 반구정(伴鳩亭)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자유로를 빠져나와 문산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이내 만난 사거리에서 직진해 10분가량 달려 첫 번째 탐방지인 화석정(花石亭)에 다다랐습니다.
파평면 율곡리의 나지막한 구릉위의 세워진 화석정은 조선조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다 합니다. 바로 아래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풍치가 빼어난 이 정자가 역사적 유적지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왜군에 쫓겨 북으로 몽진 중인 선조임금 일행이 칠흑 같은 한 밤중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등을 밝힐 수가 없어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에서 수행중인 신하들이 이를 예상한 이이선생께서 미리 기름칠을 해둔 이 정자를 불태워 길을 밝혔기에 임금께서 강을 건너 몽진 길을 이어가셨고 그 덕분에 조선조의 명맥도 함께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이선생의 5대조께서 야은 길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세우셨고 증조부께서 이름을 지으신, 그래서 조상의 얼이 깃든 이 정자에 빗속에서도 쉽게 불이 붙어 몽진 길을 밝힐 수 있도록 미리 기름칠을 해두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무리 충성심이 깊은 이이선생이라 해도 효와 충의 심각한 갈등을 겪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갈등을 애국이라는 대의로 이겨내고 조선의 명맥을 잇게 한 선생은 과연 대인이었습니다.
임진(壬辰)년에 임진강(臨津江)을 밝혀 나라를 건진 화석정은 안보관광지의 한 곳으로 삼을 만한데 땅굴탐방프로그램에 이곳이 들어있지 않는 것은 주변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그냥 명승지로 남겨두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몇 해 전 황포돛대를 띄워 저 아래 임진강을 한 바퀴 돌게 한 관광프로그램이 새로 개발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황포돛대 대신 고깃배가 보였습니다. 저 아래 강위에 띄워진 작은 배가 제 철 만난 황복을 낚는 고깃배일 것 같아 줌인으로 끌어당겨 사진을 찍었습니다. 절벽아래 강 건너에 펼쳐진 너른 모래사장을 마음 놓고 밟을 수 있어야 여기 화석정이 풍광에 걸 맞는 관광명소로 알려질 수 있는데도 부대장이 군작전 시설물이어서 출입을 금한다며 정자 바로 옆에 경고판을 세워놓은 것은 임진강이 이 나라 최전방의 안보 보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만나본 화석정의 정자건물은 6.25 때 소실된 것을 40여 년 전에 복원한 것이어서 역사의 때가 전혀 끼지 않았지만 이 정자를 둘러싼 느티나무는 이 정자의 오랜 역사를 증언해주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된 거목이어서 이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이 더 없이 푸근하고 아늑했습니다.
2.임진각(臨津閣)
화석정에서 서울 쪽으로 5-6분가량 되돌아가다가 오른 쪽으로 빠져나와 임진각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려서자 두 해전 1월에 들렀을 때의 썰렁함은 온데 간 데 없고 사람들과 마이크소리로 시끌벅적해 영락없는 관광지라는 생각이 짙게 들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건널 수 없는 임진강 자유의 다리 앞에 임진각을 세운 것은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이후 실향민들의 망향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이곳은 6.25 때 이북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망향단 앞에 모여 합동제례를 지내는 망향의 장소였으며 탱크 등을 배치해 놓는 등 안보의 산 교육장소로 커왔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안보는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나고 평화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그동안 보아왔던 탱크도 치워져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오랜 동안 대한민국을 지키는 안보의 산 교육장이었던 임진각에 평화의 분위기가 넘쳐난 것은 6.25전쟁으로 끊긴 경의선을 다시 잇고자 하는 지난 정부의 끈질긴 노력 때문일 것입니다. 이 나라에 남북이 화해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지 않는 국민들이 누가 있겠느냐 만서도 그럼에도 안보를 중시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북에 의해 강요되는 침묵의 평화가 아니고 남이 주도하는 활기찬 평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군정치가 판을 치고 수백 만 명의 인민들이 아사하도록 방치한 북이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안보이기에 저는 임진각이 안보의 교육장소로 남아있기를 원해왔습니다. 임진각에 평화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과 공간 확보가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망향단에서 제를 올리며 안보의식을 다져온 본래의 건립취지가 사라진 듯해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전에 보지 못한 넓은 운동장은 평화의 축제장인 것 같았습니다만 몇 십리만 더 가면 동토의 왕국인 조선인민공화국과 접하게 되는 여기 자유의 다리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다리입니다. 임진각에 올라 자유의 다리 건너 송악산을 찾아보는 중 임진강위를 나는 한 떼의 새들을 보았고 임진각에서 내려와 바로 옆 철망 넘어 나있는 경의선 철로를 보았습니다. 소통의 길을 하늘에 놓은 새들은 임진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땅에다 길을 낸 사람들은 자유의 다리 앞에서 멈춰서야 하다니 끝없는 이념의 전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길을 내야지 금강산 등 극히 제한된 땅위에 길을 터봤자 자유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아니기에 진정 화해가 이루어진다고는 볼 수 없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젊었을 때 집사람은 물론하고 집사람을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을 이 곳 임진각과 반구정으로 안내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긴장된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임진각에 올라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강변에 철조망을 두르고도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이름과는 달리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없는 자유의 다리, 긴장된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리 앞 탱크와 초병들을 내려다보노라면 그녀들은 자연 이 땅이 평화의 땅이 아니고 긴장의 땅임을 실감했던 것입니다. 제가 자라온 파주 땅과 이 땅에서 자라온 저를 알려주고 싶어 임진각으로 안내한 제 프로그램으로 이 땅이 긴장의 땅임을 알려줄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유용했다는 생각입니다.
3.반구정(伴鳩亭)
임진각에서 자유로를 따라 서울 쪽으로 5-6분을 달리다가 문산 쪽으로 빠져나가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1-2분을 더 가 반구정에 이르렀습니다. 반구정은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황희선생영당 내에 자리한 정자로, 영당 내에는 반구정(伴鳩亭) 외에도 방촌영당(尨村影堂), 경모재(景慕齎)와 앙지대(仰止臺)가 더 있습니다. 방촌 황희정승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머무셨던 반구정은 임진강에 면한 절벽위에 세워진데다 강폭이 훨씬 넓고 서해바다가 가까워 갈매기들이 즐겨 찾는다 합니다. 한 시간 전에 들른 화석정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바로 아래 임진강의 물이 역류하는 현상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임진강을 지키는 초병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밀물 때는 만조가 되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만하면 여기까지 갈매기가 날아온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법한데 황희정승이 머물던 평화로운 그때와는 달리 최전방의 살벌한 분위기에 겁먹어서인지 어제는 갈매기가 한 마리도 날아들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반구정의 풍광에 매료된 듯 했습니다.
제게서 카메라를 건네받은 아들이 며느리를 모델로 세워 반구정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반구정 옆에 세운 앙지대가 본래 반구정의 자리라고 합니다. 앙지대에 걸터 앉아 있노라면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한 여름에도 더운 줄 모릅니다. 은퇴 후 이 정자에 올라 기러기와 벗했을 황희 정승이 서해로 흘러드는 임진강 줄기를 바라보며 무엇을 되새겼을까 궁금했습니다. 세종임금이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황희정승이 영의정 자리를 맡아 잘 보필한 덕도 컸다는 생각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두문동에 몸을 숨겼던 청년황희가 조선조에 출사하여 영의정 자리에 오르기까지 번민도 컸을 것입니다. 옛 임금에 대한 충(忠)만 쫓았다면 세종이라는 성군을 모시지 못했을 것이고 임금께서 백성들에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제도와 문물을 바꾸지도 못했을 것이고 보면 청년 황희의 조선조 출사는 정말 잘한 일이지만 당사자인 황희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반구정에서 북으로 얼마 안가면 개경으로 큰 길로 비껴서면 송악산이 보입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개경과 가까운 이곳에 정자를 지워놓고 소일한 것은 고려조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이곳 반구정에서 맞는 낙조는 정말 일품입니다.
동해안에서 지켜보는 해돋이가 더할 수 없이 장대하다면 여기 반구정에서 맞는 해넘이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루가 끝나는 의전이 이리도 화려한가 싶다가 서서히 태양이 서해로 넘어가며 황홀한 낙조도 같이 끝나가는 것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장엄한 장례식에 참여한 것처럼 엄숙해지곤 합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 비로소 지내온 하루를 어둠 속에 묻고 이제껏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최고의 낙조 관망지인 여기 반구정에서 매일 저녁 일몰을 맞는다면 누구라도 그는 시인이 될 것입니다. 황희정승이 명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어느 시인보다 황희 정승의 가슴이 더 가슴이 따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은 두 노비가 가려달라는 사건의 시시비비를 정확히 알면서도 어느 편도 손들어주지 않은 정승의 마음 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당내의 반듯한 한옥건물은 경모재와 방촌영당입니다.
6.25전쟁 때 전소되어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복원해서인지 고색창연한 맛은 없어도 반듯하고 깨끗해 이 가옥에도 황희정승의 반듯한 관직생활이 배어든 듯 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황희정승은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어느 혁명가 못지않게 주군을 모시며 전해 내려온 문물과 제도를 뜯어고치고 정비한 분입니다. 개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빈 수레 소리를 너무 요란하게 냈던 몇 년을 보내고 나자 소리 없는 혁명가 황희정승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4.헤이리 마을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交河)의 오두산 뒤쪽에 자리한 헤이리마을을 마지막으로 탐방했습니다. 이번 나들이의 본래 목적은 이 마을의 북카페에 들러 헌책들을 사는데 있었는데, 아들이 차를 갖고 나선 김에 임진강 변 파주의 명소들 몇 곳을 먼저 들른 것은 파주에 본적지만 두었을 뿐 이렇다 할 인연을 갖고 있지 않는 아들 며느리에 아버지가 낳고 자란 고향 땅의 명소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오두산을 처음 찾은 것은 1963년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경기여고 누나들과 함께 고무풍선에 꽃씨를 매달아 이곳에서 북한 땅으로 띄우는 행사에 참여했는데 바람이 반대로 불어 휴전선을 넘지 못한 안타까운 기억이 생생하게 났습니다. 헤이리마을은 1997년 조성되기 시작한 문화예술인의 마을로 파주의 농요에서 “헤이리”라는 이름을 따왔다 합니다. 예술인들의 거주공간이자 문화공간인 헤이리 마을은 “자연이 예술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커 나가고 있는 중으로 이번에는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조용했던 마을이 모처럼 활기차 보였습니다.
아들 며느리가 이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해 마음 놓고 느긋하게 책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1년 반 넘어 반디카페를 찾은 저를 주인께서 반겨 맞으며 공짜로 커피를 내주어 고마웠습니다. 괴테의 명저 “빌헤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2권과 다른 책을 더해 모두 5권을 2만3천원에 사갖고 카페 문을 나서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책을 사들 때 마다 느끼는 이 기쁨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이 어려운 책들을 꾹꾹 참아가며 읽어내는 것은 기쁨이 아니고 진통입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이렇다하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독후감 정리에 애를 먹고 나면 저의 무식함을 자조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맛이 떨어진다고 그 음식을 내내 안 먹을 수는 없는 것이고 입에 쓰다 해서 약을 안 먹을 수 없듯이 내용이 난해하다해서 애써 외면한다면 저는 영원히 한글로 된 소설이나 신문 밖에 읽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리와 돼지구이가 아들 며느리가 차려준 점심 메뉴였습니다.
광우병에 걸린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광우병보다 더 무섭다는 조류독감 AI의 확산을 막자고 캠페인을 벌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75도 이상 고온에서 조리하면 안심해도 된다고 해 오리고기도 시켜먹었습니다. 진정 축산농가를 위하고 국민건강을 돌 볼 뜻이라면 발병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광우병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한우 농가의 지원책 강구를 논해야 할 것이고 그보다 더 시급한 조류독감의 확산을 막고 고온에서 조리된 오리고기와 닭고기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음을 널리 알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옳다는 생각입니다.
* * * * * *
오래 전에 한번 이상 다 둘러본 명소들을 다시 찾아 사진을 찍고 탐방기를 남길 수 있어 기뻤습니다. 더 기뻤던 것은 아들며느리와 함께 들렀다는 것입니다. 천년을 한 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했을 임진강과 이 임진강이 하나로 엮은 명소들을 꼭 나이 차가 30년이 나는 아들 며느리와 같이 탐방하면서 보고 느낀 점은 서로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각을 보는 시각도 진보적인 젊은 애들과 보수적인 제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와 역사적 유적지를 보는 시각은 다르더라도 그 유적지에서 바라다 본 우리의 산하가 정겹고 아름답다는 것은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또 정겹고 아름다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지내기를 염원하는 뜻은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번 명소탐방에서 다름을 존중하고 같음을 추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같이 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탐방기를 맺습니다.
<파주 명소 탐방기 사진 >
1)화석정에서
2)임진각에서
3)반구정에서
4)헤이리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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