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0.논개생가지 탐방기

시인마뇽 2008. 10. 12. 17:42

                                   논개 생가지

 

             *탐방일자:2008. 10. 8일(수)

             *탐방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소재 논개생가지

             *동행      :나홀로

 

 

 

   섬진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환주하는 길에 전북 장수의 논개 생가지를 들렀습니다.

작년 5월 광양의 망덕산에서 시작한 섬진강의 울타리산줄기 따라 걷기는 지난 8월 약 500Km에 달하는 이 강의 서쪽과 북쪽 울타리 산줄기들을 차례로 밟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 이르렀습니다. 총 39일이 소요된 환주 길의 마지막 사흘 동안 장수의 산줄기를 지나면서 이곳에서 태어난 의로운 여인 논개를 몇 번이고 떠올렸습니다. 어제는 전북장수와 경남함양을 어우르는 영취산에서 남쪽 하동의 두우산으로 이어지는 섬진강의 동쪽 울타리 산줄기를 마저 끝내고자 무령고개로 오르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아랫마을 대곡리 주촌마을의 논개생가지를 탐방했습니다.


  지난 8월 바쁘게 일별한 논개의 생가지를 이번에 다시 찾은 것은 저는 이미 마음속으로 논개를 백두대간의 여인으로 점 찍어두었기 때문입니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서쪽 아래 장수의 장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곡절 많은 사연을 안고 동쪽 아래 함양의 서상에 묻힌 논개만큼 대간과 물리적거리가 가까운데서 태어나고 묻혔으며 또 대간의 기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의롭고 용맹한 여인이 달리 있다는 이야기를 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안내산악회를 따라갈 때는 논개생가지가 대간 길 바로 아래에 있어도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어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논개생가지를 지나 무령고개로 오르는 길이어서 어렵지 않게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장계에서 대곡리 주촌마을의 논개생가지까지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택시요금이 만오천원인 무령고개로 가는 길에 논개생가지에서 반시간을 머무르며 저를 기다려주는 조건으로 추가로 오천원을 지급하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가을이 농익어가는 누런 들판과 수상스키장으로 애용되는 대곡호를 차례로 지나 논개생가지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10시36분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에 들러 안내소책자를 받은 후 생가지인 관문인 의랑루(義娘樓)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논개를 기리는 높다란 석상을 한 가운데로 하여 바로 위쪽 높은 곳에 부모들을 모시는 묘지가 있습니다.  석상에서 약간 오른 쪽 위 방향으로 논개의 생가가, 오른 쪽 바로 옆으로 기념관이 들어서있으며 오른 쪽 아래 연못 바로 옆에 정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왼쪽 옆과 아래로  쉼터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장수읍 두산리의 사당만 이곳으로 옮겨놓는다면 추모공원으로 삼아도 빠질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의 서상에서 대간을 넘어 정착했다는 이곳에 조성된 생가지는 그 크기가 약 2만평 정도여서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합니다만,  1997년에 시작해 4년 만에 조성공사를 마무리한 이곳 생가지는 아직은 세월의 때가 끼지 않아 유적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주어야 세월 속에 깊이 묻혀있는 논개가 되살아날 수 있기에 관리사무소의 직원들이 친절하게 내방객을 맞는 것은 참 잘하는 일이다 싶었습니다.


  여성들에 무지했던 조선조에서 간난의 세월을 살아온 여인이 논개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논개가 조선의 여인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꽃다운 나이인 스무 살에 죽기까지 그녀의 삶이 극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달리 의로워서였다는 생각입니다. 1574년 여기 주촌마을에서 신안주씨인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난 논개는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 몸을 의탁하게 됨으로써 간난의 길로 들어섭니다. 노름에 미친 숙부가 논개 모녀를 이웃마을 졸부에 팔아버리고 도주한 것을 안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피신했으나 졸부의 제소로 장수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몇 년 후 왜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주 남강에 투신자살하는 최경회장군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운명적 장소가 바로 이 재판정으로, 당시 장수 현감인 장군께서 도망간 숙부에 죄가 있음을 밝히고 두 모녀를 무죄 방면합니다. 논개가 17세가 되던 1590년에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의 예를 올리고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키는 장군을 돕고자 동네부인들을 모아 의병들의 수발을 들기도 합니다. 그간의 의병활동을 평가받은 최경회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에 입성하나 10여만명에 달하는 왜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진주성을 빼앗긴 것을 분해하며 목숨을 끊습니다.  방년 20세의 논개는 왜군들이 남강의 촉석루에서 전승축하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관기로 변장해 왜군의 맹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바위가로 유인한 다음 두 팔로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순절함으로써 사연 많은 짧은 일생을 마무리합니다. (이 단락은 (사)의암 주논개 정신선양회에서 펴낸 리프렛인 “의암주논개”에서 따왔습니다.)


  의랑루를 지나 논개의 단충(丹忠)과 효행(孝行)을 기리고자 어렸을 때 노닐었던 곳에 세워놓은 단아정(丹娥亭)을 들렀습니다. 전면에는 장방형의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 쪽 뒤편 산 숲의 바위(인공암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쇄락하게 들리는 자그마한 정자 앞에 멈춰 서서 부친이 별세하기 전에 유족하게 살면서 이곳에서 뛰노는 어리지만 단아(端雅)했을 논개의 얼굴을 그려보았습니다. 생가지 공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논개의 석상은 그 얼굴모습이 옆자리 기념관의 초상화보다 훨씬 의지에 차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는 논개의 일생을 그린 4편의 조각이 빙 둘러서 석상을 받쳐주고 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입니다. 지난 8월에 둘러본 부모들의 묘지는 이번에는 생략하고 곧바로 생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생가 안으로 들어가 열려있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유품(?)으로 전시된 방안의 소품들은 논개의 어린 시절 유품이 아니고 부모들의 살림도구들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쫓겨 한번 획 둘러본 기념관을 다시 들렀습니다. 입구 영정의 모습은 참으로 단아해 보여 의지에 차 보이는 석상의 모습과 대비됐습니다. 제 눈을 확 끈 것은 논개생향장수비를 탁본 뜬 비문의 “義妓論介”라는 문구였습니다.  비가 세워진 1846년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저 역시 일개 비천한 기생 신분인데도 나라를 위해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자살한 논개의 죽음이 참으로 장하다는  식으로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장군의 후처로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로 주씨 성을 되찾은 것도 얼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시목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자료들이 거의다고 기념이 될 만한 유품이나 사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다시 공원중앙으로 돌아와 족두리를 하고 있는 논개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세운 목 없는 동상이 생각난 것은 족두리를 한 뒷모습을 보고 앞모습이 어떠할 까는 각자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지만 앞모습을 보고는 과연 논개의 이미지를 제대로 형상화 한 것인지 시비가 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수박겉을 핥듯이 후다닥 생가지를 둘러본 후 의랑문을 빠져 나와 택시를 타고 무령고개로 향했습니다.


  논개 생가지를 둘러보며 하나 궁금했던 것은 부모들의 묘지는 이 생가지에 모시면서 정작 논개의 묘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논개와 지아비 최경회장군의 부부 묘는 백두대간의 육십령에서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논개의 시신이 고향 장수에 묻히지 못하고 대간 너머 함양에 묻힌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진주성이 함락 당하자 장수지역의병들이 나서서 시신을 찾아 낸 곳이 창원의 지수목이라 합니다. 논개와 최경회장군의 시신을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옮겨 주씨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서상으로 옮겨 양지바른 곳에 묻어두었다 합니다. 거절 사유가 왜군의 보복이 두렵고 논개가 기생출신이기 때문이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수분들은 함양분들에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묘지가 발견된 해가 논개 순절 382년이 지난 1975년이고, 장수현감이 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고 장수태생임을 기리고자 논개생장향수비를 세운 해가 1846년이라 하니 당시에는 논개가 어디에 묻혔는지 정확히 몰랐을 때라서 비를 세우면서도 논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단락은 조선일보사에서 간행한 “실전 백두대간 종주산행”에서 상당부분 따 왔습니다.)


  논개의 충절선양은 시인들의 몫이었습니다.

만해 한용운님은 그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논개여,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수주 변영로선생도 그의 시 "논개"를 통해 그녀의 충절을 아낌없이 찬양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람보다도 강하다.

 

        .......중략.....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 어찌 시인들만의 일이겠습니까?

그녀의 생가와 묘지를 모두 어우르는 백두대간도 그녀의 충절을 기릴 것입니다.  또  이 대간을 밟고 지나가는 산객들 모두 그리할 것입니다.  한 때 논개를 백두대간의 여인으로 삼자는 논의가 대간을 종주하는 분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두산의 장군봉에서 지리산의 천왕봉을 잇는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국토를 지탱시켜주는 등뼈입니다. 논개를 비롯한 선현들의  충절로 말미암아 대간이 버텨주는 이 국토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면 대간에서 태어나고 묻힌 논개를 대간의 여인으로 가슴에 점찍어 둔다하여 욕들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1)1차탐방(2008. 8. 21일)

 

 

 

 

 

 

 

 

 

 

2)2차탐방(2008. 10.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