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2008. 5. 22일(목)
*탐방지 :전북 정읍시 정읍사(井邑詞) 공원
*동행 :나홀로
집 떠난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 망부상(望夫像)이라면 망부상은 이러해야한다는 정형화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정형화된 답도 없고 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여인네들의 그리움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처자식 남겨두고 종적을 감춘 남편이라고 해서 여인네들의 그리움이 없으란 법은 없는 것입니다. 신라의 재상 박제상처럼 나라일로 목숨 걸고 떠난다하여 마냥 남편이 자랑스럽기만 하고 전혀 밉살스럽지 않다면 그녀는 여장부일지는 몰라도 범부(凡婦)는 아닙니다. 집 떠난 남편의 사연과 여인네의 마음 씀에 따라 망부(望夫)의 정도 수없이 많은 조합이 만들어지는 데 이 많은 조합을 한 두 개의 정형화된 이미지로 통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 호남정맥 종주 길에 정읍사공원(井邑詞公園)을 둘러보았습니다.
정읍사공원은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를 기리기 위해 정읍시내에 조성된 공원으로 우리나라에서 선조들의 문학작품을 테마로 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공원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읍시내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터미널로 가는 길에 시내 한 끝자락에 위치한 정읍사공원을 들렀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아양산 산자락에 자리한 정읍사공원은 그 넓이가가 6만7천평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산이고 정작 정읍사 시비와 망부상이 서있는 공원은 조금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좁아 보였습니다. 높다란 계단에 의해 3단으로 나누어진 공원의 맨 아래 하단은 약수터가 있었고, 첫 번째 계단을 걸어 올라선 가운데 중단에는 자그마한 정읍사시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 계단 위의 평지에 올라서자 망부상과 정읍사기념조형물이 서 있어 비로소 정읍사를 기리는 공원으로 면모를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듯 계단 길로 상, 중, 하단이 나누어지고 각각의 자리 터가 그리 넓지 않아 맨 하단의 약수터에는 지하수를 길러온 주민들이 몇 분 보였지만, 상단과 중단에는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기는 해도 이곳 주민들이 즐겨 찾을만한 산책로로는 계단이 많은 이 곳 정읍사공원이 아니고 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정읍천변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공원을 둘러보고 나서 망부상이 이러해야한다는 정형화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망부(望夫)의 정을 형상화하는 조각가가 아니고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단 자리 터 한 가운데 세워진 망부상(望夫像)에서 집 떠나 외지 길을 걷고 있을 남편을 그리는 애절함을 본 것이 아니고 19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너그러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향 땅에 어머니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동상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최상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 망부상은 우리나라 어머니들을 그린 상이지 바위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정한 옷매무새며 엄하고 인자함을 잃지 않은 얼굴이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서있는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우리들 어머니 상이었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느라 지쳐있는 모습도 아니고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집나간 남편을 원망하는 모습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혹시 정읍사(井邑詞)에 이 망부상이 딱 맞다 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해 그 가사를 한 번 훑어보았습니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 이 노래의 제작경위가 실려 있고 악학궤범에 가사와 연행절차가 기록되어 있다는 정읍사(井邑詞)는 현존하는 노래 중 유일한 백제의 노래입니다. 정읍사는 백제의 민요로 구전되어 오다가 속악의 가사로 편입되었고 고려시대에 궁중음악으로 불렸으며 조선조에서도 처용무(處容무), 봉황음(鳳凰吟), 삼진작(三眞勺)과 함께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가창되었다 합니다. 조선조 중종 때는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가악에서 제외되기도 했던 정읍사의 노랫말은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한국고전시가선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오른 편의 ( )안은 주해를 보고 제가 적어 본 것입니다.
정읍사(井邑詞)
달하, 높이곰 돋으샤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솟아
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기야 멀리 멀리 비취오시라
어기야 어강됴리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저재 녀러신고요? 저자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 어기야
진 데를 디디올세라 진 데를 디디올세라
어기야 어강됴리 어기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나 놓으십시오
어기야 내 가는데 점그랄세라 어기야 내 가는데 저물어질까 걱정스럽네
어기야 어강됴리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공원의 정읍사비에 새겨진 개사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정읍사
달아 - 그 모습을 높이 높이 돋아
멀리 있는 내님에게 비추어다오
그대 계신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 곳까지 그대 빛을 비추어다오
어긔야 어긔야 어-어-강도리
야그-다롱드리
달아 - 재 넘어를 다녀오마 했나요
궂은 곳을 디디실까 마음 조여요
무거운 짐일랑은 모두다 버리시고
나를 찾아 오시는 길 저물까 두려워요
어긔야 어긔야 어-어-강도리
야그-다롱드리
얘기가 빗나갑니다만 부실한 번역을 보고 번역은 반역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듯이 개사내용이 이 정도이면 정읍사로 이름 붙이기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부상 뒤에 세워진 조각품은 한 술 더 떠 정읍사의 스토리를 꾸며내 조각으로 이는 완전 소설을 썼다는 생각입니다. 이 조각 작품을 만든 분은 그 출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 이야기를 꾸며낸 어떤 작가의 소설에 근거한 것만이 아니고 역사적 문헌이 따로 있다면 추가로 밝혀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은 완전 픽션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문학을 기리는 공원이 역사와 픽션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놓는 데서야 굳이 이 공원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 가해서입니다. 상상은 탐방객에 맡겨야 하지 작가가 권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읍사가 소설이나 영화 또는 연극으로 발전해 많은 사람들에 다가서는 것은 백번 잘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읍사를 기리는 공원의 조각물에 원전에도 없는 이름을 들먹이며 꾸며낸 스토리를 형상화해 보여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노랫말을 읽고 보니 망부상의 여인이 조금 높은 곳을 쳐다보는 것으로 다시 보였습니다.
두 손을 앞가슴에 모으고 있는 것도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염원해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도 혼자 있다고 해서 마구 눈물을 흘리면 며느리로는 또 어머니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일진데 그 옛날 백제 때에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부인이라 해도 어머니나 며느리의 위치를 한 시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자 그리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인네들이 남정네들보다 더 파워풀(powerful)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기에 조각품에 여린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 보니 여기 정읍사공원의 망부상이야말로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작품처럼 다시 보였습니다.
저는 정읍사공원의 망부상에서 우리나라 옛 여인들의 전형을 보았습니다.
집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여인상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애들을 키우고 어르신들을 모시겠다는 강인한 모습도 같이 보았습니다. 요즈음 남편들과 자식들이 망부상의 엄하고 인자한 얼굴 뒤에 숨겨진 여인네들의 눈물을 읽어낼 수 있다면 세계 제1이라는 우리나라 이혼율도 급격히 감소할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가신 어머니와 그 뒤를 저보다 먼저 따른 집사람을 그리는 저 같은 남자들도 옛날에도 분명 많았을 진데 어찌하여 망부석(望夫石)만 보이고 망부석(望婦石)은 보이지 않는지 이유도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 정읍사 공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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