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2.남이섬 탐방기

시인마뇽 2009. 5. 1. 18:03

                                                남이섬


                                   *탐방일자:2009. 4. 25일(토)

                                   *탐방지  :강원춘천 남이섬

                                   *동행    :도마산초교 2회졸업생 15명

 


  남이섬을 돌아보고 나자 남이(南怡)장군께서 이 섬을 어떻게 생각할 까 궁금했습니다.

남이나루에서 하선한 후 몇 걸음 옮겨 놓지 않아 길 왼쪽에 자리한 깔끔한 남이장군의 묘역이 보였습니다. 이 섬에 “남이”의 이름을 제공한 남이장군이 이 정도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사꾼 유자광에 의해 반역의 누명을 쓰고 젊은 나이에 처형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죄인의 무덤이 이토록 잘 보존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싶었습니다. 장군의 “북정가(北征歌)”를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해 올려놓은 시비(詩碑)도 묘지 앞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비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참에 장군의 기개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과연 남이섬은 남이장군의 섬으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생각이 바뀐 것은 “나미나라공화국”의 팜플렛을 보고나서였습니다.

국호를 “南怡國”으로 정했으면서도 한글로는 “남이국”이 아닌 “나미나라”라고 표기한 것도 그렇고,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공화국을 선포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남이장군을 선출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대신이나 외교관 자리에 남이 장군의 후손이 단 한사람이라도 등용되었다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쯤 되자 “나미나라공화국”은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호를 “南怡”에서 갖다 썼을 뿐, 실제로는 이 섬에 남아 있는 장군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 가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두 시간 남짓 이 섬을 둘러본 후 남이섬은 그저 남이장군의 브랜드를 활용해 세운 관광소국일 뿐, 이제는 더 이상 남이장군의 섬이 아니고 그저 남의 섬일 뿐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 소재한 호반의 섬 남이섬은 그 둘레가 약 5Km이고 넓이가 14만평가량 되는 아담한 섬입니다. 큰 홍수 때면 물에 잠기곤 했던 모래땅이 청평댐 담수 후 섬나라가 되어 지금의 관광지로 탈바꿈한 데는 1965년 이 불모의 땅에 수천 그루나무를 심은 한 독림가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6년 3월 1일에야 비로소 나미나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것은 여기 남이섬이 관광소국으로 갖추어야할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도 모두 완비했음을 내외에 알린 것입니다. 1987년인가 그 해 가을 회사직원들과 야유회를 왔을 때만 해도 잔디밭이 꽤 넓었고 섬길도 꽤나 고즈넉했습니다. 위락시설이라고는 강변에 접해 지은 방갈로 몇 채였을 뿐 축구도 하고 산책도 즐기는 등 여유 공간이 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남이섬은 한류스타 배용준과 최지우가 열연한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소문이 난 후 몰려드는 외국인 관광객의 취향에 맞추고자 여기저기 손질을 많이 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기는 했지만, 그 옛날의 여유로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미나라공화국이 들어선 이 섬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제게도 엄청 낯이 설어보이는 데 15세기의 남이장군에는 생경하다 못해 아예 남의 나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1960년 경기도 파주의 도마산초등학교를 졸업한 제2회 동창생들이 해마다 봄가을로 떠나는 야유회를 올봄에는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에서 갖기로 하고, 호영진 회장등 총15명이 버스 1대를 대절해 나들이 길에 나섰습니다. 아침 일찍 고향 땅 파주를 출발한 버스는 일산을 들렀다가 아침8시경 강남역에서 서울 일원에 사는 동창들을 마저 태우고 가평으로 내달렸습니다. 기상청에서 예보한대로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청평대교를 지나자 양수리부근으로 먹구름이 모여들어 큰비가 내릴 것 같았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도 가평선착장은 남이섬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입장권을 사갖고  2-3분가량 줄을 섰다가 승선했는데 채 5분도 안되어 남이나루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입장권 8천원에는 도선료 3천원이 포함됐다지만 좀 비싸다 싶었는데 이 입장권이 입국사증을 대신해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받지 않고 곧 바로 “빛줄빛별빛달”의 현판이 걸린 관문을 통과해 나미나라공화국에 입국했습니다.


  2시간20분에 걸친 남이섬관광은 이 나라의 현충원(?)인 남이장군 묘지참배로 시작됐습니다.

남이장군의 일생을 약술한 안내문을 보고 웅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역 죄인으로 몰려 참형을 당한 남이장군에 시대를 잘못 잡아 태어났으니 어쩌랴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잣나무(?) 숲길을 지나 다다른 간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젊은 남녀를 카메라에 담고 보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오른 쪽으로 보이는 잔디밭은 수용한계를 넘은 듯 잔디가 여기저기 파져 있고 크기도 많이 줄어든 듯해 옛날 같지 않았습니다. 야외공연장도 옛날에는 보지 못한 건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섬이 공화국이 되었으니 아무리 땅이 좁기로 공연장 하나 못 세워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숲속의 큰 그림책” 전시회가 열리지 않았다면 나미나라공화국이 동화나라라는 광고문구가 조금은 무색했을 것입니다. 동화 나라를 찾는 관광객이 거의 다 어른이고 외국인들이 많기에 나미나라공화국을 동화의 나라로 꾸미기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비가 멈춘 메타쎄콰이어 길이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느라 많이 부산했습니다. 나미나라 전속 사진사로 일해도 모자람이 전혀 없는 호영진 회장이 겨울연가를 촬영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으니 덕분에 동창생 특히 여학생들은 상연될 리 절대 없는 영화 “4월의 연인”에 출연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메타쎄콰이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보트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인 허정숙총무가 텅 빈 보트장에 적힌 전화로 주인을 불러내 끝내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핸들로 요리 비뚤 조리 비뚤 잔 묘기를 부리며 섬을 한 바퀴 돌아주는데 5-6분이면 충분해 손님만 많다면 이만한 사업도 없을 것 같은데 이리 손님이 없어서야 어찌 꾸려갈까 싶기도 했습니다. 쏜살같이 물살을 가르며 갈지자로 내달리는 보트를 타고 강 한 가운데로 들어가자 이 섬을 에워싼 강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가평선착장의 공사장타워는 고즈넉한 강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 섬을 둘러싼 강물과 이 강에 물을 대는 산줄기들이 이 섬을 지켜줄 것 같아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강물에 바로 붙여 설치한 나무계단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남이섬의 참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 길이 입장권 뒤에 나와 있는 별장길인 것 같습니다만, 별장은 눈길을 주지 않아 보지 못하고 이 길만 사진 찍었습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통나무 길, 그리고 이 길을 가리는 나뭇잎들 모두에서 자연의 정취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큰 길로 나가 다시 남이장군 묘지를 둘러본 후 나미나라공화국에 출국신고를 했습니다.


  가평선착장에서 대기한 버스에 올라 현리 계곡 가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술과 노래로 여흥을 즐긴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헤어지기까지 1950년대의 초등학생 시절을 반추했습니다. 지지리도 못살던 어린 시절을 6년이나 함께 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형제애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기에 34명 졸업에 15명이나 참가한 것입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모두 훌륭히 키운 동창들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남이섬이 오래 기억된다면 남이섬 그 자체보다 이들 동창들과 함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그런데 별밤은 더 좋다. 하지만 새벽을 걷어 올리는 물안개를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미나라 국기의 상징을 설명하는 문구입니다. 과연 그럴 것입니다. 호반의 섬이 갖고 있는 특장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는 남이섬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기가 정말 아쉬운 것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기자기하고 올망졸망하게 꾸며놓은 인공의  것들로 꽉 채워진 남이섬을 밤은 모두 가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남이섬은 15세기의 남이장군에는 남의 섬일 것입니다.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다 싶어 얼마간 흥분도 됐던 남이섬이 한 바퀴 둘러보니 제게도 남의 섬이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습니다. 예술이 길다 하면 자연은 영원합니다. 나미나라공화국이 보여줘야 할 것은 남이섬을 어설프게 만드는 소위 예술품들이 아니고 남이섬만이 갖고 있는 자연의 정취여야 한다는 생각을 제가 버리지 않는 한 나미나라공화국이 지배하는 남이섬은 남이 장군은 물론 제게도 영원히 남의 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남이장군의 묘는 경기도 화성 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남이섬의 묘는 남이장군의 묘로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라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