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명소 탐방기 2
*탐방일자:2009. 6. 26일(금)
*탐방지 :임진각 평화누리, 도라산 역, 제3땅굴, 도라산전망대,
통일촌 및 도라산평화공원
*동행 :나홀로
어두컴컴한 땅굴이 제게는 낯설거나 음흉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렸을 때 저도 시골에서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놀아본 적이 여러 번 있어서입니다. 개울가 뚝 아래에 땅을 파 들어가 서너 명은 충분히 둘러앉을 만큼 제법 넓은 굴을 만든 후 어른들 몰래 그 속에서 놀곤 했습니다. 이렇듯 제가 아는 땅굴은 그것이 천연의 동굴이든 인공의 땅굴이든 주 용도가 몰래 들어가 몸을 숨기는 은신처였기에 나름대로 스릴과 낭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굴이 은신처로 쓰인다면 그 굴이 땅굴이든 동굴이든 관계없이 양쪽이 다 뚫려 있는 턴널(tunnel)이 아니고 한 쪽 만 뚫려 있는 케이브(cave)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 케이브(cave)의 열려 있는 한 쪽도 마저 막고 캄캄한 속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나이 어린 저희들은 긴 턴널(tunnel)을 낼 수는 없었어도 작은 케이브(cave)는 파들어 갈 수 있었기에 몇 번이고 작은 땅굴(cave)을 만들고 또 헐어버리면서 추억거리를 만들곤 했습니다.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을 케이브(cave)로 번역하지 않고 턴널(tunnel)로 번역한 팜프렛을 보고 이 땅굴의 성격을 한 마디로 참 잘 표현했다 했습니다. 땅굴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당연 “cave"로 표현해야겠지만 이번에 탐방한 제3땅굴은 북한이 남몰래 우리 땅을 침공하고자 비무장지대 지하로 파놓은 것으로 성공만 했다면 임진강 남쪽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땅을 뚫고 나왔을 것이 분명하기에 이 굴은 한 쪽이 꽉 막힌 ”cave“가 아니고 양쪽이 다 뚫린 ”tunnel“이 맞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tunnel“을 땅굴로 번역하는 것도 맞아야 하는데 그리 말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tunnel“은 양쪽을 소통시키기 위해 뚫어 놓은 넓은 길을 의미하지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처럼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공격하기 위해 몰래 뚫고 들어오는 음흉한 길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반도의 북쪽 반을 60년 넘게 지배해온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통치행위들 거의 다가 상식에 닿지 않는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이들을 상대해야하는 우리나라는 한 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습니다.
보훈의 달을 맞아 이번에 제가 탐방한 명소는 제 고향 파주 땅의 안보관광지입니다.
임진각의 평화누리, 비무장지대 안의 제3땅굴, 개성공단으로 가는 관문인 경의선 최북단의 도라산역과 그 인근에 조성한 도라산평화공원, 비무장지대 너머로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해발156m 높이의 도라산전망대, 그리고 장단 콩의 주산지로 알려진 통일촌이 이번에 둘러본 안보관광지입니다. 산본 집을 나와 한 시간 가량 후인 오전9시50분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1969년 파주 금촌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교를 다닐 때 이 열차로 금촌과 서울을 오갔습니다. 오는 7월1일이면 1시간에 한 대 꼴로 다니는 열차운행이 끝나고 차편이 증편돼 보다 편리한 전철이 이 길을 다닐 것입니다. 아직 손 볼 곳이 많아 그 날짜에 정확히 개통될 수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향 가는 길이 보다 편해질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11시10분 넘어 임진강 역에서 하차하여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안보관광티켓을 끊은 후 평화누리공원을 둘러보고자 임진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임진각 평화누리
작년5월 아들-며느리와 함께 임진각을 찾았을 때 그냥 지나친 평화누리를 이번에는 꼼꼼히 둘러보았습니다. 전쟁과 대비되는 평화는 이 세상 누구나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이기에 그 앞에 어떤 말을 갖다 놓아도 훌륭한 글귀가 됩니다. “아름다운 평화/즐기는 평화/함께하는 평화”의 평화누리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임진각 평화누리가 제게 던지는 화두는 단연 전쟁과 평화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장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역저 “전쟁론”에서 전쟁이란 적으로 하여금 이쪽 의지에 굴복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행위를 일컫는다 했으며, “한민족전쟁사”를 쓴 온창일 박사 역시 전쟁을 정치집단간의 조직적이고 유혈적인 무력충돌로 정의했습니다. 이 두 분의 의견을 종합한다면 전쟁이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폭력행위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은 평화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혈적인 무력충돌을 본질로 하는 전쟁은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같은 호전적인 집단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될 것입니다. 이렇듯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쟁과 평화의 관계입니다.
수많은 바람개비가 쌩쌩 돌 수 있는 것은 자유롭기 그지없는 바람의 운동에 힘입어서라면 평화누리에 평화를 실어 나르는 것은 바로 운동이 자유로운 바람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노니는 바람의 언덕은 이 누리 최고의 평화상징물입니다. 바람의 언덕과 멀지 않은 곳에 녹이 잔뜩 슬은 철제구조물이 서 있었습니다. 설치화가가 이 조각물을 이곳에 설치한 참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구조물의 시뻘건 녹이 제게는 전쟁이 토해낸 배설물처럼 보였습니다. 이 두 상징물을 한 터에 설치한 것은 전쟁과 평화 모두 역사가 함께 지고가야 할 것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밖에도 여기 평화누리에는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드넓은 잔디밭의 "음악의 언덕"을 보고 평화란 역시 시공의 여유로움에서 자라남을 느꼈습니다. 기하학적인 배치로 아름다움이 더해진 "통일기원돌무지"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을 보고 통일은 소위 통일꾼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연못 위에 피어난 노랑꽃이 무슨 꽃인지 그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연꽃과 더불어 말없이 이 연못의 평화를 지켜낼 것입니다. 먼 곳에서 보면 돌부처로 보이는 여러 개의 솟대를 음악의 언덕에 설치한 것도 솟대가 평화와 상생,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평화누리로 들어가는 생명 길에 자리한 긴 회랑은 생명촛불파빌리온이라 불리는데 이 건물 또한 녹이 슬은 것 같은 철제건물이어서 생명촛불이 이 건물에도 생명을 불어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누리에서 열리는 각종공연은 평화의 가치가 평화로운 생존과 역동적인 생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관객이라고는 어느 유치원의 원생들 20여명(?)이 전부인데도 이들에 사물놀이(?)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사물놀이패들에서 역동적인 평화를 보았습니다.
임진강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독개다리 아래 경의선 장단역 증기관차를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남도 북도 아닌 비무장지대에서 오랜 세월을 셈하며 녹을 덕지덕지 붙인 이 증기관차를 여기 임진각에서 원형 그대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문화재청의 보존의지와 포스코의 보존처리기술 덕분입니다. 이 기차가 북으로부터 날라오는 수많은 총탄을 맞고도 오늘에 되살아 남았듯이 우리 어르신들 또한 또한 전쟁의 폐허에서 아나라를 다시 세워 오늘날 번영의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전쟁이 겁이나 피해갈려고만 한다면 평화는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음을 저 기차는 일러주는 듯했습니다.
2)도라산 역
경의선 열차로 임진강역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 도라산역에서 하차했습니다.
남방한계선 철책 300m(?) 지점에 세워진 도라산역은 역사의 규모가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컸고 날렵한 지붕선이 현대적 건축미를 더해 남한 땅에서도 이만한 역사를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인근 도라산은 그 높이가 156m밖에 안되어 개성의 진산인 해발 489m의 송악산에 비할 수 없지만 역사만은 개성역이 도라산역을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지만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불과 7년 전에 놓은 철로가 시뻘겋게 녹이 슬었고 역사 안의 “타는 곳 평양방면”의 개찰구도 굳게 닫혀 있어 북으로 205Km 떨어진 평양이 남으로 500Km 거리의 부산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습니다. 역사 밖 넓은 터에 반듯하게 지어진 물류센터 건물들이 꽤 여러 채 보였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개성공단이 제대로 가동이 안 된다면 저 건물들도 쓸모없어질 것이고, 그리된다면 여기 도라산 역이 우리의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로 연결시키는 시발역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그의 부인이자 고려태조 왕건의 따님인 낙랑공주가 도라산(都羅山)중턱에 지어 준 암자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이 산 중턱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으로 불리었다 합니다. 경순왕의 눈물이 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실향민들의 눈물이 된것은 6.25가 가져온 민족의 비극입니다. 제가 보훈의 달인 6월에 기꺼히 안보관광에 나선 것은 튼튼한 안보만이 도라산의 눈물을 멈추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3)제3땅굴
도라산 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개성공단 관문인 톨게이트 옆을 지났습니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로 들어서자 기사분이 이제부터는 지정된 장소 외에는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주의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야외조각물인 “하나 되는 지구”를 사진 찍은 후 제3땅굴 견학에 나섰습니다. 카메라를 사설함에 넣어 두고 헬멧을 쓴 다음 승강장으로 이동해 셔틀엘리베이터 “통일호”를 타고 땅속 깊이 내려갔습니다.
1978년6월10일에 발견된 이 땅굴은 북한이 파내려온 4개의 남침용 땅굴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폭2m, 높이2m, 총길이1,635m이며 시간당 완전무장한 병력이 3만명 가량이 이동할 수 있다 합니다. 이 큰 땅굴이 군사분계선을 지나 남방한계선 전방 435m지점까지 파고 내려왔다 하니 귀순자의 제보가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호에서 내려 북한군이 파놓은 땅굴을 따라 300m(?)가량 걸어 들어갔습니다. 굴을 막아놓은 지점에서 승강장으로 되돌아 왔는데 반환점이 아마도 군사분계선에서 가까운 것 같았습니다. 들키면 남침용 땅굴이 아니라고 발뺌하고자 단단한 화강암에 시꺼먼 타르를 칠한다 해서 석탄채광으로 속아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들은 우리의 실력을 몰라도 너무 모른 것입니다.
땅굴 안에 설치된 계기는 섭씨14도와 습도94%를 가리켰습니다.
이 정도면 등어리가 서늘해질 만한 것이어서 이 땅굴은 안보관광지뿐만 아니라 피서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어보였습니다. 파주시에서 도보관람로를 따로 설치할 만큼 이 땅굴을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하니 이 땅굴이 파주시의 관광수입증대에 한 몫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보면, 결과적으로 재주는 북한군이 부리고 돈은 파주시가 걷어가는 격이 된 셈입니다. 땅굴견학을 마치고 DMZ영상관으로 옮겨 전시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비무장지대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에 최고로 평화로운 삶터이듯이 한반도 또한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가 평화를 일구는데 중심지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안고 도라전망대로 향했습니다.
4)도라전망대
북한 땅을 바라보고자 이제껏 제가 찾아본 전망대는 오두산, 강화도와 고성의 세 곳으로 모두들 남방한계선 아래에 자리한 전망대였습니다. 이번에 찾은 도라전망대는 남방한계선 너머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남한 땅 최북단의 전망대로 개성공단을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망원경으로 보면 개성시가지와 김일성동상도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진정 도라전망대에서 살펴보고 싶은 것은 평화의 조짐과 통일의 기색이었습니다.
앞서 세 곳의 전망대에서 평화와 통일을 보지 못한 것이 세 곳 모두 남방한계선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면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있는 도라전망대야 말로 거리가 훨씬 가까워 평화와 통일이 더 잘 보일 것 같았습니다. 전망대 건물 상단에 “분단의 끝-통일의 시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제 기대는 더 컸습니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찾아보지 못한 평화와 오두산통일전망대 및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만나보지 못한 통일을 여기 도라전망대에서 그 조짐과 기색만이라도 살필 수 있기를 저는 간구했습니다.
도라전망대에서도 평화와 통일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앞의 개성공단만 흐릿하게 보였을 뿐 개성시가지와 김일성동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 차라리 잘 됐다 싶은 것은 북한이 막무가내로 핵실험과 미사일을 발사해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데 망원경으로 김일성동상이나 보려고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망원경으로 평화와 통일의 기색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 땅이 통일되어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 때는 통일전망대나 평화전망대가 필요 없어질 것인데 이러한 전망대에서 이것들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소행입니다. 그래도 저는 다음 방문 때에도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5)통일촌
도라전망대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빠져나와 통일촌으로 향했습니다.
파주시에서 배포한 안내책자에 임진강 건너 민통선 북방지역에 있는 통일촌에는 언제 기준인지는 몰라도 모두 104가구에 438명이 살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전체경작면적이 2.44제곱키로라니 가구당 경작면적이 2ha(6천평)가 조금 더 되는 셈입니다. 여기 농산물이 청정지역에서 재배한 무공해 식품으로 소문나 이곳 주민들의 연소득은 5천만원이 다 되어 자식교육을 위해 외지에 따로 집을 사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이 먼저 번 기사분의 전언이었습니다.
임진강을 건넌 후로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통일촌휴게소 밖에 없습니다.
이 마을 특산물인 장단콩을 써서 만든 두부와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 내놓은 음식상이 맛깔스럽고 푸짐해 맛있게 들었습니다. 장단콩 말고 이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산물은 개성인삼입니다. 다른 지역 인삼재배지에서 구하기 힘든 6년 근이 이 지역에서 흔한 것은 민통선 안에서 재배해 도둑맞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라니 조금은 부끄럽고 씁쓰레했습니다.
1973년 민통선 안의 파주시 군자면에 조성된 통일촌의 많은 땅이 지금은 외지인 소유라 합니다.
민통선안의 특수지역이라서 매매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제 생각과는 달리 공인중개소가 몇 곳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주민들이 이곳에 사는 데는 분명 제약과 혜택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만, 청정지역인 통일촌 만은 외지의 부동산 열기가 비켜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6)도라산평화공원
통일촌에서 식사를 마치고 도라산역으로 돌아온 시각이 오후 2시반 경이어서 서울 가는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약 2시간이 남아 인근 도라산평화공원을 들렀습니다. 물류센타 옆을 지나 안내판의 화살표를 따라 이동해 정문 앞에 다다르자 아담한 평화공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제 눈을 끈 것은 끝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높이 솟은 원추형 철탑이었습니다.
“개벽”으로 명명된 이탑은 김연수님의 작품으로 남과 북이 서로 화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힘을 전 세계에 떨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제작되었다 합니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철로를 가운데 두고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마주 보고 있는 녹이 슨 철 조각물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 “유리된 극점”은 영국의 작가 Anthony Gormly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출품했다 합니다.
전시관과 연못도 이 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입니다.
두 곳의 생태연못과 DMZ의 생태를 주제로 한 전시관을 둘러보며 전쟁과 평화를 같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설사 여기 전시관에서 “DMZ, 다시 생명의 땅으로”라는 주제의 2분짜리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 해도, DMZ은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에 의지하지 않고 반드시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확연한 의지가 있고, 어떠한 무력도발로도 우리를 넘어트릴 수 없음을 북한정권에 확실히 보여주는 것만이 계속 DMZ을 생명의 땅으로 지켜나가는 길일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는 것이 민통선 안에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것보다 수백 배 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평화공원을 찾아 평화의 진정한 의미와 이를 얻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것도 충분히 뜻 있는 일입니다. 통일동산과 평화동산으로 명명된 두 곳의 통일의 숲이 완성되기 전에 평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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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만에 파주의 명소를 다시 찾았습니다.
작년에는 아들-며느리와 함께 임진강이 한 줄로 엮은 강변 명소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천년을 한 가지로 흐르며 세월을 셈했을 임진강이 인근 파주 땅의 기를 빌려 배출한 인물이 방촌 황희 선생과 율곡 이이선생이신데 작년에는 반구정과 화석정을 찾아가 이분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이번에 찾은 파주명소는 임진강 너머 민통선과 비무장지대안에 있는 안보관광지였습니다.
남북분단으로 안보가 관광의 자원으로 쓰이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 관광을 통해 안보의지를 다시 다졌습니다. 안보를 뛰어넘는 국가적 가치가 달리 무엇이 있으랴 싶어 이번 파주의 안보관광지 탐방은 나름대로 가치 있었다고 평가하고자 합니다.
피어린 6백리의 휴전선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는 이번에 시작한 안보관광을 앞으로도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할 뜻입니다.
<파주명소 탐방사진 2>
1)임진각 평화누리
2)도라산역
3)제3땅굴
4)도라산전망대
5)통일촌
6)도라산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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