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3. 안동명소 탐방기1 (병산서원)

시인마뇽 2009. 6. 3. 08:49

                                          병산서원


 

               *탐방일자:2009. 5. 10일(일)

               *탐방지   :경북 안동시 풍산면 병산리 소재  병산서원

               *동행      :경동고24회 동문28명

 


  재작년 10월 경동고교동문들과 함께 경북안동의 하회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임수(臨水)의 꽃내(花川)가 배산(背山)의 꽃뫼(花山)를 오메가를 그리며 휘돌아 흐른다하여 하회(河回)마을로 불린다는 이 마을이 이제껏 배출한 최고의 인물은 단연 서애 유성룡선생입니다. 조선조 최고의 설득과 통합의 재상으로 평가받는 선생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조를 구하신 분입니다. 도제찰사로 봉직하시면서 왜란 발발 한 해 전에 선조 임금께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을 추천했는데 두 장군 모두 왜군을 격파해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반대파의 비방과 모함으로 선조임금 조차도 왜군과 내통하는 것이 아닌가하며 의혹의 눈길을 보낸 이순신 장군을 선생께서 지켜내지 못했다면 장군께서 왜군에 연전연승을 거두며 조선을 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던 해 57세의 나이로 파직된 선생은 다음 해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힘쓰셨고 임진왜란을 증언하는 징비록 등 많은 저술을 남기신 후 160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선조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각종 시무책을 펴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보살피신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이 마을 가까이에 세워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이 병산서원 말고도 다섯 곳이 더 있다하니 선생을 존경하는 후학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가 능히 짐작됐습니다.

 

  두 해전 경북안동의 명소 몇 곳을 탐방하면서 짬을 내지 못해 병산서원을 들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차에 마침 풍산이 고향인 한 동문의 주선으로 속리산 산행을 마치고 풍산의 한우고기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 서원을 들러 그간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제가 병산서원을 알게 된 것은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서였습니다.  1997년 출간되어 아직도 인문서적 중 최고의 스테디셀러로 부러움을 받고 있는 이 책에 실린 병산서원답사기는 이제는 대형버스가 들어간다는 것을 빼놓고는 새삼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상세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병산서원 탐방기”를 굳이 남기고자 하는 것은 이참에 조선조의 교육기관인 서원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이 서원을 짓고 이 서원에서 공부했을 안동양반들은 어떤 분들인가 알아보고 모 대학교의 건축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인 한 친구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설계도면을 그려냈다는 병산서원의 건축물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향교가 지방의 국립대학이라면 사립대학에 상응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서원보다 먼저 생긴 서당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고 한성에 자리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오늘날의 서울대학교보다 위상이 훨씬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 고려의 유학자 안향이 살던 집터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신 후 강학장소로 삼은 백운동서원입니다. 몇 해후 명종임금이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내려주어 이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선 중기까지 이어온 사찰시대가 마감되고 서원시대가 새롭게 열렸습니다. "유교진흥과 인재양성 및 선현제사를 위해 설립된 서원"은 사족(士族)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지어 서얼과 천민도 들어가 배울 수 있는 서당은 물론 서얼의 입학을 허가한 향교보다도 더 배타적이었습니다. "많은 선비를 배출했고 도덕운동을 주도했으며 상소를 통해 향촌여론을 중앙에 반영"하는 등 순기능을 해온 서원이 당쟁을 거치면서 "파당의 소굴로 전락했고 조세를 포탈하고 평민을 보수 없이 부려먹는 등" 그 적폐가 극심해 이를 보다 못한 대원군이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겨두고 모두 철폐하는 서원개혁의 칼을 빼들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 ”에서 많은 부분을 따왔습니다.)


  조선조의 대표적 서원인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 모두 안동에 지어진 것은 바로 안동이 조선조 양반문화의 중심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서원들이 위폐를 모시는 퇴계 이황선생과 서애 유성룡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안동시가 감히 600년 넘게 이어온 수도 서울을 제쳐두고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선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여 중국의 공자나 맹자의 고향에 견준 것도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선생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가 50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끈질긴 생명력은 강-온의 양극을 배제한 가운데 탄력적인 자세로 합리성을 유지한 퇴계선생의 학풍을 현실에 부단하게 접목해온 안동양반의 역동성에 기인"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제시한 서애 유성룡선생이나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학봉 김성일선생이 모두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로 안동에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안동의 양반들이 숙종 이후 조정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강(强)의 입장에 선 남명 조식선생의 후학들에 밀렸기 때문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그로 인해 안동양반의 위세가 많이 약화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한말과 일제치하 때에 안동의 명가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의 위상은 절대적이라 합니다. 십 수 년 전 안동이 고향인 한 직원의 부친이 별세해 문상 차 대전을 떠나 안동으로 향하다가입관 전에는 조문객을 받을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추풍령에서 차를 돌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로는 안동사람들이 참 고루하다 했는데 지금은 전통과 예의를 끝까지 지켜내는 그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동문화를 대표하는 "유교문화는 21세기 미래사회의 화두인 지성사와 정신사의 본질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합니다. 그러기에 안동의 양반문화는 안동시민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양반문화를 재평가해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오늘에 되살릴 것은 적극 살려나가는 것이 안동양반들의 시대적 과업일 것입니다. (이 부분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에서 펴낸 “안동 양반 그 겉과 속”에 실린 내용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서애 유성룡선생과 그의 셋째 아드님을 배향하는 병산서원은 조선조 5대서원의 하나로 하회마을에서 6Km가량 떨어진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회삼거리에서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처음 얼마간 포장도장도로를 지나다 곧바로 비좁은 비포장도로가 나타납니다. 해발328m의 화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비포장도로는 왼쪽 낭떠러지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기사 분은 버스운전에 신경이 많이 쓰였겠지만 저희들에게는 화산을 굽이도는 낙동강이 정겹게만 보였습니다. 병산서원에 다다르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강 건너 자리한 해발336m(?)의 병산이었습니다. 여기 지명을 뒷산인 화산에서 따오지 않고 앞산인 병산에서 따와 병산리로 정한 것은 혹시 병산이 화산보다 8m가 더 높아서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가파름이 완만한 화산에 비해 낙동강에 면해 곧추 선 병산은 첫눈에 성깔이 있어 보였는데 병풍을 두른 것 같다하여 병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합니다. 안산인 병산은 너무 가파르고 강물의 물살이 몹시 세 땅기운이 쌓이지 못하고 밀려나 재물을 쌓아두어야 할 살림터로 적합지 못한 이곳이 빨리 공부를 마치고 관계에 진출해야하는 유생들의 배움터로는 더할 수 없는 길지여서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하니 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용처가 따로 있는 가 봅니다.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 ”에 나오는 서원건물의 일반배치는 이러했습니다.

선현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맨 뒤쪽에, 강의를 하고 집회장소로도 이용하는 강당은 중심에, 강당 양 옆쪽에 원생과 빈객이 숙식하는 동제(東薺)와 서제(西薺)를 배치했는데 이 세 가지는 기본건물이었다 합니다. 이 외에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板庫),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관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사택창고등이 있고 주변에 누각을 세워 시회를 열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이용했으며, 정문과 담장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사당입구에 중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했다 합니다. 


 병산서원의 건물배치도 서원건물의 일반배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병산서원의 배산(背山)은 꽃뫼, 즉 화산(花山)입니다.  임수(臨水)는 낙동강이고 안산(安山)은 강 건너 병산(屛山)입니다. 서애 유성룡선생과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존덕사는 서원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고 담 왼쪽 옆으로 장판각이 있습니다. 내삼문 아래에 위치한 입교당은 중앙의 강학당과 양편으로 명성제와 강의제로 나누어집니다. 제기고인 전시청은 존덕사와 입교당 중간의 오른 쪽에 있고 기숙사인 동제와 서제는 입교당 아래 양 옆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서원의 맨 오른 쪽에 위치한 건물은 주사로 사택창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물론 뒷간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서원의 부속건물입니다. 서원에 들어가기 전에 예의를 지킨다 하여 명명된 외삼문인 복례문이 이 서원의 정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이 서원의 누각역할을 하고 있는 만대루(晩對樓)를 만나게 됩니다.


  병산서원이 다른 서원보다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일곱 칸의 단순한 건물인 만대루(晩對樓) 덕분입니다. 건축에 문외한인 제가 이 건물을 처음 보고 느낀 것은 벽은 한 면도 없고 기둥과 마루, 그리고 지붕만 달랑 있어 누가 건물 한 번 시원하게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더할 데 없이 싱거워 보이는 이 건물이 미학을 전공한 유홍준님에는 참으로 의미 깊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기는 그 분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그분의 심미안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그 분의 눈을 빌려 만대루를 찬해보고자 합니다. 병산서원이 마주하고 있는 임수(臨水)의 낙동강과 안산(安山)인 병산을 건축적으로 끌어들여 자연공간을 건축공간으로 전환시킨 건축적장치가 바로 만대루라 합니다. “병산서원 건축의 핵심은 만대루이다. 200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 시원한 누마루는 병산의 풍광을 건축적으로 끌어안는 구실을 한다”고 갈파한 유홍준 님은 “만대루의 성공은 병산서원의 중정(中庭)이 갖는 마당의 기능을 이 누마루가 차출함으로써 건물 전체에서 핵심적 위치로 부각된 점에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만대루로 올라가는 두 개의 통나무계단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옛날 같으면 서원에의 출입이 금지됐을 한 여성이 만대루에 올라  탐방객들에 병산서원의 역사는 물론 만대루의 건축미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안내원의 진지한 모습에서도 만대루의 미적가치가 보통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 부분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참고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의 병산서원을 돌아보며 어느 정도 긴장을 푼 것은 배롱나무와 참새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서원 안에는 수피가 백일홍 꽃처럼 붉다하여 나무백일홍으로 불리는 배롱나무가 꽤 여러 그루 있었습니다. 밑동이 울퉁불퉁해 언뜻 보아도 백 년은 훨신 넘어 보이는 배롱나무 한 그루를 보고 저 나무는 계속 낙제를 해 이 서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들보에 앉아 있는 참새 두 마리가 중인환시 속에 벌이는 사랑행위는 유생들이 이 서원에서 공부했을 때도 똑같았을 텐데 공부에 시달린 학동에 좋은 눈요기 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병산서원의 탐방시간은 반시간 조금 넘는 정도로 매우 짧았습니다.

1572년에 이곳으로 옮겨진 이 서원이 철종임금으로부터 ‘병산“의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된 것은 1863년의 일입니다. 만약 이 때 사액서원이 되지 못했다면 그 8년 후에 내려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이 모두 사액서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했던 병산서원이 오늘날까지 안전하게 보존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여기 병산 서원이 정신문화의 수도로 일컫는 안동의 양반문화를 지켜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풍산읍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저 아래 흐르는 낙동강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내년에는 이 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인 낙동강산울타리 환주를 시작할 뜻입니다. 1,000Km는 족히 될 산울타리 환주가 끝나면 황지에서 시작하여 부산앞바다에서 끝나는 낙동강의 강줄기를 따라 걸어볼 생각입니다. 그 때는 이 길을 버스를 타지 않고 두 발로 직접 걸을 것입니다. 3-4년 후 이 길을 걸을 때 병산서원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이번의 탐방이 그 때 가서는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추억도 오래 쌓여 세월을 이겨내면 역사가 될 것이기에 힘들게 쓴 병산서원탐방기가 제게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탐방사진>

 

  

 

 

 

 

 

 

 

 

 

 

 

 

 

 

 

 

 

 

 

 

 

 

 

 

 

 

 

 

 

 

 

 

 

 

 

 

 

 

 

      * 松琳 통나무

  • 2009.05.12 10:40
  • 다음날 바로 정리하셨네요..내가 못본것을 형님덕분에   볼수 있어   좋습니다...

 

  • 시인마뇽
  • 2009.05.13 14:31
  • 탐방기로 매듭짓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