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5.파주명소 탐방기3(석불입상, 윤관장군묘, 보광사)

시인마뇽 2009. 7. 3. 11:34

                                     파주명소 탐방기 3


           *탐방일자:2009. 6. 28일(일)

           *탐방지  :경기파주 광탄면소재 용미리석불입상/윤관장군 묘/보광사

           *동행    :나홀로

 

 

   어제는 경기도 파주시의 광탄면을 찾아 명소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이지역의 명산인 박달산을 등산하는 길에 용미리 석불입상과 윤관장군 묘를 먼저 찾았고,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나서 고령산에 자리 잡은 보광사로 자리를 옮겨 천년 고찰을 둘러보았습니다. 세 곳의 명소들이 모두 제 고향 광탄 땅에 자리하고 있기에 그간 몇 번씩은 다 가본 곳이지만, 아쉽게도 사진과 탐방기를 남기지 못해 이번 박달산 산행 길에 짬을 내어 들러본 것입니다.


 제 고향 광탄면(廣灘面)은 파주시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외진 곳입니다.

1사단본부 등의 군부대가 들어섰고, 산과 하천을 빼고는 농지도 그리 넓지 않아 파주시에서도 면세(面勢)가 약한 편이어서 이제껏 국회의원 한 명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문산천이라는 넓은(廣) 여울(灘)이 이 면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어 광탄(廣灘)의 이름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북감악지맥에서 서쪽으로 분기된 팔일봉(?)에서 발원해 제가 태어난 창만(倉滿)4리 앞으로 흐르는 비암천은 문산천의 제 1지류로 큰 비가 오면 시뻘건 탁류가 그 넓은 하천을 꽉 채워 큰 강처럼 보였는데 넘실거리는 하천 물이 종종 마을로 범람해 아찔했던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북정맥의 한강봉에서 발원한 문산천 본류는 이번에 처음 오른 박달산 동쪽 아래로 흘러가다 면내(面內) 방축리(防築里)에서 비암천의 물을 받아 임진강을 향해 서쪽으로 내닫습니다. 1950년대 후반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장마철이면 개울 건너 학교를 자주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대로 된 다리가 없던 그 때 서쪽과 남쪽 길은 문산천에 막혔고, 비암천이 북쪽 길을 가로막았으며,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동쪽으로는 한북감악지맥의 산들이 딱 버티고 있어 움쭉달싹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한북정맥의 한강봉과 챌봉 중간지점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나가며 파주의 명산인 고령산, 박달산과 월롱산을 차례로 지나 통일전망대가 서 있는 오두산 앞 한강/임진강 합수점에서  끝나는 산줄기를 저 같은 산 꾼들은 한북오두지맥이라 부릅니다. 이번에 들른 명소 세 곳을 한 줄로 꿰 준 것은 이 한북오두지맥입니다.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의 작가 유주현 선생은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물이 천년을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고 있는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세월과 맞서 버텨온 것은 바로 산줄기입니다. 이처럼 한 자리에서 버텨오면서 사람들과 만난 곳을 명소로 남긴 것 또한 산입니다. 오두지맥의 가장 높은 산인 고령산은 보광사에 선뜻 자리를 내주어 천년고찰의 명성을 이어가게 했고, 용미리석불입상도 오두지맥의 능선 바로 아래에 있으며, 고려조의 명장 윤관장군 묘도 오두지맥의 박달산에서 갈라진 한 줄기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용미리 석불입상

 

  구파발 버스정류장에서 용미리를 경유하는 광탄 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벽제삼거리에서 통일로를 벗어나 오른 쪽 의정부 길로 따라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 혜음령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개 너머 용미리는 서울시의 공원묘지가 들어서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곳입니다. 왜국의 침략을 받아 몽진 길에 나선 선조임금이 이 고개를 넘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삼 궁금했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불행하게도 수도를 적군에 넘겨주고 몽진 길에 나선 임금을 꽤 여러분 모셨습니다. 고려조의 강화천도가 그러했고 조선조 임금 몇분들도 백성들 몰래 한성을 빠져나가 난을 피하곤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도 수도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 몰래 한강을 건넜습니다. 선조임금께서 평양으로 몽진 갈 때는 이곳 용미리에 공원묘지가 들어서기 몇 백 년 전이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자들의 원혼이 몽진 길을 막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용미리석불입상 앞에서 하차해 오른 쪽으로 꺾어 올라갔습니다.

40-50m가량 올라가 다다른 용암사의 대웅전 앞마당에서 모자를 벗고 부처님에 예를 표했습니다. 용암사와 그 뒷자리의 석불입상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천여 년 전에 고려의 열세번째 왕인 선종 임금께서 자식을 얻고자 원신궁주에 세 번째 장가를 갔다 합니다. 오래 아기가 없어 이를 걱정하던 궁주는 어느 날 꿈속에서 장지산 바위틈에서 굶주리는 자기들을 찾아 음식을 달라는 두 도승을 보았다 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즉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내  이 산 밑에 나란히 서있는 두 개의 큰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그 아래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다 합니다. 그 해에 태기가 있어 원신궁주께서 왕자 한산후를 출산했다는 전설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어 수태를 빌고자 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고려의 척신인 이자겸의 손자 이자연은 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헌종을 몰아내고 친누이인 원산궁주가 낳은 한산후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모반을 꾀했으나, 훗날 숙종으로 등극하는 계림공에 의해 진압되고 한산후는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합니다.  득남불공의 효험으로 태어난 한산후가 왕위다툼에서 밀려나 유배를 간 것으로 보아 부처님의  보살핌이 마냥 계속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석탑과 좌우 석등이 앞마당에 자리한 이 절의 대웅전을 작게 지은 것은 그 뒤에 자리한 국내 최대의 석불입상의 위용을 살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왼쪽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17.4m높이의 석불입상이 그 전신을 드러내보였습니다. 천연의 바위에 몸통을 새겨 넣은 후 그 위에 목과 머리 그리고 서로 다른 갓을 만들어 올려놓은 것은 2005년 봄 한북오두지맥을 종주할 때 이 석불입상 뒤로 다가가 직접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석불입상을 한 바퀴 돌아 용암사로 내려갔습니다.

여기 석불입상이 득남불공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소문난 모양입니다. 석불입상을 만들 때 당시로는 여기 용미리가 죽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만, 이제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곳이 이 곳입니다. 앞으로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득남의 기도만 들어주실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구천에서 떠돌지 모르는 공원묘지의 원혼들도 부르시어 그 넋을 달래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2)윤관장군 묘

 

   용암사 앞에서 광탄행버스를 타고 윤관장군 묘로 이동했습니다.

묘역은 크게 왼쪽의 여충사 사당과 오른쪽의 묘지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여충사로 들어가는 여충문은 닫혀 있었으며 오른 쪽으로 돌아가 만난 그 뒤의 진국문도 굳게 잠겨 있어 여충사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진국문 왼쪽에 세워진 충효관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 같은데 이 건물 역시 굳게 닫혀 있어 그 안의 의자들이 을씨년스러워 보였습니다. 여충사가 닫혀 있어 일반 관광객이 들를 수 있는 곳은 묘지뿐이었습니다.


  장군의 묘지는 문하시중의 묘지답게 넓고 시원했습니다.

장군께서 생전에 끝내 고사했던 문하시중의 자리를 사후 추존 받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지 묘비에 문하시중의 시호가 쓰였습니다. 홍살문 아래에서 묘지를 얼핏 보고 조선조 왕릉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규모가 훨씬 작았고 홍살문에서 봉분에 이르기 까지 신도 외에는 왕릉에서의 정자각이나 비각은 물론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봉분에 가까이 다가가자 왕릉에서 없는 묘비가 혼유석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봉분을 에워싼 석양과 석호 등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 밖의 문석인과 무석인, 그리고 장명등의 자리는 왕릉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봉분을 둘러싼 곡장 뒤로 조선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가 자리 잡고 있어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양 명문가의 분쟁이 최근까지 끊이지 않았다 합니다. 다행히 윤씨문중에서 2,500평의 묘지 땅을 심씨문중에 증여하고 심지원 등 19기의 묘를 이장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아 4백년 넘게 지속된 분쟁을 작년에 종식시켰다고 “청송심씨/파평윤씨 화해기념비”에 적어 놓았습니다.


  장군의 여진 정벌이 후세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임에 틀림없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과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 등 3대 대첩에 비할 수 없는 것은 애써 빼앗은 땅에 쌓은 9성을 이내 여진에 되돌려주고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는 등 승전의 효과가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종 임금께서 총사령관 격의 윤관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조정대신들의 빗발친 여론을 억누르고 장군을 비호하지 않았다면 유배를 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장수는 젊은 척준경이었습니다.

장군의 목숨을 구한 부하장수 척준경을 “지금 내가 너를 아들처럼 보니 너도 나를 아비처럼 보라”고 하시며 아끼고 키워주셨다 합니다. 이 척준경이 훗날 이자겸과 한 통속이 되어 인종임금을 핍박했으니 이때는 이미 장군이 돌아가신 후의 일이기는 하나 장군의 명성에 분명 누가 되었을 것입니다.

 

 

3)보광사

 

  윤관장군 묘를 둘러본 후 해발369m의 박달산을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오두지맥을 따라 걸어 됫박고개로 하산한 후 왼쪽 아래 고령산에 자리 잡은 보광사로 내려갔습니다. 날이 흐려 일주문에 도착한 시각이 저녁6시가 채 안되었는데도 보광사로 들어가는 길에 깔리기 시작한 어둠이 어렴풋이 감지되었습니다.


  도솔천 오른쪽의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올라 쪽문을 통과해 왼쪽으로 범종이 그리고 오른 쪽으로 만세루가 자리한 마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이 두 곳을 후다닥 일별한 후 이 절의 중심인 대웅보전 앞에 섰습니다. 지난 5월24일부터 “참회와 수행으로 생전 미리 복을 쌓는 49일 지극정성기도”를 올리는 “생전예수(生前預修) 수륙무차 평등대제”가 봉행되고 있어서인지 앞마당에 여러 색의 연등 같은 것이 만국기처럼 걸려있었습니다. 영조16년인 1740년에 새롭게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보전은 팔각지붕에 정면3칸, 측면 3칸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외벽의 빛바랜 벽화가 눈을 끌었습니다.


  여기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8년인 864년에 왕명을 받고 도선대사가 창건했다 합니다.

어언 천백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 절의 이름에 접두어처럼 따라붙는 천년고찰이란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쇠해진 땅의 기운을 북돋우고자 비보사찰로 지어진 이절은 남양주 진접에 있는 봉선사의 말사라 하는데, 말사치고는 절의 규모가 작지 않고 이런 저런 전각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광탄이 고향인 제게 이 절이 각별한 것은  보광사가 영조임금의 친모 숙빈 최씨를 모시는 저 건너 소령원의 기복사라는 점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단골로 소풍을 갔던 소령원과 보광사가 숙빈 최씨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음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대웅전에 인접해 있는 지장전, 원통전 및 응진전등을 차례로 사진 찍은 후 산신각으로 올라섰습니다.

어렸을 때는 대웅전 주변이 이리 답답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1990년대에 빽빽하게 들어선 각종 전각이 여기 땅의 기운을 쇠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낮은 담장과 가까이의 장독들이 빚어내는 정경이 다감하게 느껴져 이 역시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왼쪽의 영진각으로 옮겨 한번 휘 둘러본 후 이내 석불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석불전은 1981년에 봉안된 대불로 규모도 웬만하고 자리도 넓게 잘 잡은 듯 했습니다.


 불교가 많은 국민들로부터 아낌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옛날부터 호국종교로 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광사 경내에 비전향장기수의 묘역이 들어선 것은 파주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끝까지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을 추종하다 죽은 사람들에 묘역을 제공한 보광사에 많이 서운했는데 결국에는 북파공작원들이 나서서 철거했다 합니다. 보수 세력이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10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대웅전과 멀리 떨어진 도솔암은 들르지 못한 채 보광사 탐방을 마쳤습니다.

일주문 길 건너서 구파발역까지 가는  333번 버스에 올라 산본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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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명소는 강가에 면해 있습니다.

강가에는 농지가 있고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산보다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문화란 사람들이 모여 살며 남겨놓은 흔적이라면 문화유적지인 명소들이 강가에 몰려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들른 세 곳의 명소는 강가가 아니고 모두 한북오두지맥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변의 명소보다 풍광이 못하여 볼거리는 신통치 않았으나 대신에 생각거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과 산신령을 모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워했습니다.  

 

 

 

                                          <파주명소 탐방사진 3>

 

  1)용미리석불입상

 

 

 

 

 

 

 

 

 

 

 

 

 

 

2)윤관장군 묘지 

 

 

 

 

 

 

 

 

 

 

 

 

 

 

 

 

 

 

 

 

 3)보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