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명소 탐방기 5
*탐방일자:2009. 7. 11일(토)
*탐방지 :경기도파주시법원읍 소재 자운서원
*동행 :나홀로
파주가 낳은 최고의 인물 중의 한분이 율곡 이이선생입니다.
물론 파평윤씨 가문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려조 인종 때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윤관장군의 묘가 파주 광탄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본다면 덕수이씨 가문이 파평윤씨 가문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율곡 이이선생만은 파평윤씨 가문의 어느 분에도 못하지 않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문산 반구정에서 말년을 보내신 방촌 황희선생도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으로 숭앙받고 있어 어디 가서 파주가 제 고향이라고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이 선생이 태어나신 곳은 파주가 아니고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입니다. 조선조 중종31년인 1536년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조선조 최고의 여류예술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이 탄생한 곳은 파주가 아니나, 자란 곳은 여기 율곡리이며 1584년에 돌아가신 후 묻히신 곳도 율곡리이니 율곡 이이 선생을 파주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로 칭한다 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자운서원을 다녀온 후 탐방기를 남기고자 마음먹은 것은 이 기회에 율곡 이이 선생의 생애와 이런 저런 업적들을 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선생의 저서를 문제없이 읽어내려갈 만큼 한문을 알지못해 저의 탐방기는 안내팜플렛과 이책 저책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따와 짜깁기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고향의 최고 선현이신 선생을 다시 만나뵙고 싶어, 부끄러운 졸고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율곡 이이선생께서 당대에 명성을 떨친 것은 무엇보다도 선생의 총명함 덕분입니다.
3세에 글을 읽고 8세 때 오언시(五言詩)인 “화석정시”를 지었으며 13세에 진사초시에 장원급제 하셨으니 가히 신동이라 불릴 만한 분이었습니다. 1564년인 29세에는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선생께서는 모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으니 선생의 총명함은 단순히 신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진강 변 화석정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화석정시(花石亭 詩) 원문과 함께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을 번역한 임동석님이 우리 글로 풀이해 놓아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놓습니다.
花石亭 詩
(八歲賻詩)
林亭秋巳晩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도다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寒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율곡 이이선생이 후학들로부터 숭앙받는 데는 선생이 쌓아온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서 입니다.
선생은 기호학파를 주도적으로 형성하여 영남학파의 거두이신 퇴계 이황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한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35년 연배이신 퇴계 이황선생의 이(理)가 기(氣)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리론(主理論)에 맞서 선생은 이(理)와 기(氣)가 함께 중요하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와 기로 되어 있다며 이기론(理氣論)을 펼치셨습니다. 49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기 까지 선생은 “성학집요”, “격몽요결”과 “소학집주” 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등의 저서를 후학들에 남기셨습니다. (이 부분 율곡기념관의 안내책자를 참고했습니다.)
16세 때 모친을 잃고 방황 끝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경을 공부하다 1년 만에 하산한 특이한 경험을 갖고 있는 선생은 이 경험을 통해 성리학의 깊이를 더 했고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게 됐습니다만, 하산 후 내내 선생과 학파를 달리한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입산했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주자학은 본시 불교와의 대결의식에서 태어난 학문이라 합니다. 불교를 모르면 주자학을 이해할 수 없는데 안타깝게도 율곡 이이선생 이후로는 불교의 땅을 디뎌본 유학자가 없다 합니다. 선생은 입산해 불교를 거쳤기에 주자학의 문제와 해결, 그리고 독특한 이론체계를 더 깊고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개그 프로에 나오는 달인의 “직접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라”는 코믹한 멘트가 이 경우 참으로 적절하다 싶었습니다.(이 부분 일부내용은 한형조님의 “조선유학의 거장들”에서 따왔습니다.)
선생께서 유달리 총명하고 학문만 깊었다면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은 단순히 학식이 깊은 성리학자에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은 관직에 나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정치개혁가로 일하셨으며 이점이 바로 평생을 거의 다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쓰신 퇴계 이황선생과 대별된다 하겠습니다.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으며 십만양병설을 주창해 조선조 최고의 경세가로 자리 매김한 선생의 선견이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후기 실학자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생의 정치사상은 무실론(務實論)과 경장론(更張論)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합니다. 정치란 인간의 도덕성에 토대를 둔 인륜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신 선생은 인륜의 질서완성이 단순히 정신적인 수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안정과 튼튼한 국방력 등 경제 사회 전체적인 기반이 조성된 위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선생의 유가적인 경세설의 특징인 것입니다. 민본위민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선생께서 제시하신 것이 바로 무실론과 경장론이었습니다. (이 부분 내용의 일부는 자운서원 안내 팜플렛과 한국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와 해설 한국철학의 사상”에서 따왔습니다.)
어제는 율곡 이이선생을 기리고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을 탐방했습니다.
파평의 진산인 파평산을 오른 후 금곡리로 하산해 버스로 법원리4거리까지 이동했습니다. 때 맞춰 온 버스가 자운서원을 들러 가는 문산행 버스여서 이 차에 올랐는데 10분도 채 안되어 자운서원 앞에 다다랐습니다. 1980년대 후반 어느 해 여름 경기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집사람이 길 건너경기도율곡교육연수원에서 윤리과목 연수를 받았습니다. 연수기간 중 남편의 고향인 파주에서 몇 주를 보낸 집사람은 자주 이 서원 안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9년 전 저 혼자서 여기를 찾아와 율곡선생 묘역을 둘러본 것도 생전에 집사람이 산책했던 이곳을 찾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지난 5월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을 다녀온 후 서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부쩍 자운서원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얼마간 별러오다가 파평산 산행과 두지나루 임진강의 황포돛배 승선을 같이 엮어 이번에 다시 찾았습니다.
자운서원은 조선조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율곡 이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이 지방 유림들이 창건했습니다. 1650년 효종으로부터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은 이 서원은 숙종39년인 1713년에 율곡선생의 후학들인 사계 김장생과 현석 박세채 두 분을 추가로 배향했습니다. 고종5년인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묘정비만 남은 것을 1970년에 복원하였고 그 3년 후 경내주변을 정화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 부분 파주문화원에서 발행한 팜플렛을 참고했습니다.)
1)율곡기념관
자운문을 들어서 왼쪽 관리사무소에서 1,000원하는 입장권을 끊었습니다.
경내 한가운데 넓게 자리한 잔디광장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 모습이 선현을 기리는 이 서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보다 자유롭게 만드는 듯했습니다. 잔디 광장 오른 쪽의 팔각정 모양을 한 율곡기념관을 찾아갔습니다. 1층에서 안내소책자를 받은 후 2층 전시실로 올라가 한 바퀴 빙 돌며 전시물들을 보았습니다. 영정으로 본 선생은 자애롭고 온후했지만 조금은 우수도 깃든 듯했습니다. 여기 자운서원을 들러본 후 적성의 두지나루로 자리를 옮겨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을 둘러볼 계획이어서 전시물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지는 못했습니다. “율곡의 일대기”, “벼루의 말씀”과 “소현서원”등 선생의 체취를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선생이 어떠한 분이었나를 이해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선생뿐만 아니라 모친이신 신사임당님에 관한 것들도 같이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영상실로 옮겨 8분짜리 영화를 본 후 기념관을 나왔습니다.
2)율곡선생 묘소
율곡기념관에서 나와 묘소로 향했습니다.
잔디광장이 끝나는 곳에 자리한 연못은 물이 많이 흐려있었습니다. 산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묘역이 시작되는 여현문(如見門)을 통과했습니다. 묘소까지는 계단으로 이어졌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 신사임당묘소 앞에 다다르자 그 위로 “신사임당 5만원권 발행기념” 경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묘소에만 들어서면 그것이 어느 누구의 것이냐 관계없이 엄숙해지는 오랜 버릇 때문에 목소리도 크게 못내는 제가 이번에는 상석에 걸터앉기도 하고 묘소주위를 맴돌며 뛰어 놀기도 하는 자유분방한 어린애들을 보고도 버릇없다고 나무랄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은 저 애들이 즐거운 추억을 갖고 돌아가야 이다음 어른이 되어서 자식들을 데리고 이 묘역을 다시 찾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묘역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앞이 탁 트여 보였으며 노송들이 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어 안온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단의 신사임당 묘소와 상단의 선생의 묘소 모두 경기도 문화재로 문인석이 이 묘들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묘역 맨 꼭대기에 자리한 선생의 묘소는 노씨부인과 합장한 것으로 위 봉분은 노씨부인 것이고 아래 봉분이 선생의 것이었습니다. 봉분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으로 묘비가 있으며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모친인 신사임당은 부친과 합장되어 한 묘에 모셔졌습니다. 봉분 앞 가운데로 묘비와 상석 및 향로석이 한 줄로 놓여 있었으며 좌우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선생과 가족들의 묘 13기가 들어선 여기 묘역이 장군 한 분만 모신 윤관장군묘역보다 많이 협소해 답답했습니다. 이 답답함은 자운서원을 본 후에도 계속되어 선생에 대한 대접이 좀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3)자운서원
묘소에서 여현문(如見門)을 지나 자운서원으로 옮겼습니다.
지금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을 세운 것은 유교를 진흥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설립목적에 맞게 건물들을 배치하였으니 그 일반배치는 이러했습니다. 선현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맨 뒤쪽에, 강의를 하고 집회장소로도 이용하는 강당은 중심에, 강당 양 옆쪽에 원생과 빈객이 숙식하는 동제(東薺)와 서제(西薺)를 배치했는데 이 세 가지는 기본건물이었다 합니다. 이 외에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板庫),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관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사택창고등이 있고 주변에 누각을 세워 시회를 열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이용했으며, 정문과 담장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사당입구에 중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했다 합니다. (이이화님의 “이야기 한국사”에서 따왔습니다.)
“紫雲書院”의 현판을 단 솟을대문의 외삼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좌우에 자리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제(東齊)인 입사제와 서제(西齊)인 수양제의 두 건물은 저 정도의 크기로 지방대학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갈 정도로 규모가 작아보였습니다.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인당 건물은 1997년에 신축된 정면5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청의 색상이 선명했습니다. 강인당 앞 양 옆으로 오래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이 서있지 않았다면 자운서원의 오랜 역사가 세월의 때가 끼지 않은 이 건물로 숨겨질질 뻔 했습니다. 강인당 뒤 내삼문인 자운문을 지나자 조금 높은 곳에 율곡 이이선생과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 및 현석 박세채 두 분도 함께 배향하는 사당인 문성사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내삼문 밖 오른 쪽에 자운서원의 내력을 써넣은 묘정비가 서있는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비문을 맡았고, 영의정을 지낸 문곡 김수항선생이 머리글을 썼으며, 글씨는 그의 형인 곡운 김수증 선생이 썼다 합니다. 세분 모두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하기 전에는 힘 있는 명망가였으니 당시 율곡 이이 선생에 대한 존경의 정도가 어떠했는가가 짐작되었습니다. 문성사 사당 앞 좌우로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는 망료위(望燎位)와 제관이 손을 씻는 관세위(盥洗位)가 놓여 있었습니다.
문성사 사당에서 내려다 본 자운서원은 서애 유성룡선생을 모시는 병산서원에 많이 못 미쳐 보였습니다. 우선 기본 건물인 강당, 동제와 서제, 그리고 사당의 규모가 병산서원에 비해 작았고 이들 기본 건물 외에 병산서원에 있는 장판고, 서고, 제기고 등이 이 서원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병산서원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은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비할만한 누각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만대루에 오르면 바로 앞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그 뒤로 병풍을 두른 것 같은 병산이 한눈에 들어와 공부에 지친 유생들이 이 누각에 올라 머리를 식히곤 했다는데 여기 자운서원에는 누각은 물론 병산과 낙동강에 비할만한 자연풍광도 없었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이 즐겨 찾던 정자인 임진강 변의 화석정을 이 서원의 누각으로 삼는다 해도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미치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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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 번의 서원탐방으로 조선조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선생을 제대로 만나 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선생의 저서를 한권도 읽은 것이 없어 관리사무소 옆의 매점을 찾아가 “격몽요결“과 “율곡선생 글모음” 두 권을 사갖고 왔습니다. 이 두 권을 다 읽고 난후 이 탐방기를 읽으면 고쳐야 할 곳이 꽤 있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서둘러 탐방기를 쓴 것은 저 나름대로의 서원탐방시의 느낌이 지워질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자운서원을 나와 두지나루로 옮겼습니다.
임진강을 둘러보고자 오른 황포돛배에서 기둥에 붙여놓은 출전불명의 “이이(율곡)의 논리”라는 시를 접했습니다. 출전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음미할 만한 시(詩)였습니다.
이이(율곡)의 논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하는 것은
우뚝 솟아 있는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젓하고 고요한 “도”를 취해서
본받는 것이다
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흘러가는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이는 ‘도’를 취해서
본받는 것이다
고로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기를 기르는데 있어
산, 수를 제외하고 어디에서 찾겠는가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산을 오르는 제게 경구가 될 만한 시여서 옮겨보았습니다.
제대로만 도를 취해 본받는다면 지난 가을 사고로 잃은 기를 되찾는데 산(山)과 수(水)를 함께 안고 있는 우리의 산하(山河)만한 곳이 더 있겠나 싶어 계속해 산을 오를 뜻입니다.
선생의 저서를 몇 권 읽은 후 자운서원을 다시 찾고자 합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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