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9.금산 보리암에서 경인년을 열다

시인마뇽 2010. 1. 2. 23:10

                                            금산 보리암에서 경인년을 열다

                                                     

                                 *일자:2010년 1월1일 새 아침

                                 *장소: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

                                 *동행:국제산악회 회원 및 경동고24회 동문 6명

                                  ( 이규성 부부, 서중원, 장광종, 이기후, 우명길)

 

 

 

   남해에 자리한 금산의 보리암에 올라 경인년의 새아침을 열었습니다.

보리암에서 지켜본 새해의 첫 해오름은 장엄하고 황홀해 난생 처음으로 해오름의 진수를 본다 싶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산행사고로 기축년의 새아침을 병상에서 맞으면서 경인년의 해오름을 산에 올라 볼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했던 저로서는 이번의 해맞이가 그저 감격스러웠을 뿐입니다.

 

 

 

  아침6시50분 보리암에서 해오름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산악회의 신년 새아침 해맞이”프로그램에 같이한 저희 일행은 경동고24회 동기5명과 한 친구 부인 등 모두 6명으로 전날 밤 서울을 출발해 경남남해의 금산에 자리한 보리암으로 향했습니다. 삼천포에서 떡국을 들어 배를 채운 후 남해의 복곡으로 옮겨 보리암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습니다. 매표소에서 하차해 비포장도로로 들어선 것이 새벽 5시로 하늘에 쟁반 같은 둥근 달이 떠 있지 않았다면 칠흑같이 캄캄한 밤을 뚫고 걸을 뻔 했습니다. 15분 만에 도착한 쉼터에서 보리암으로 내려가 해오름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금산 정상을 먼저 들렀습니다. 달 밝은 하늘을 피해 땅을 찾아 내려선 어둠이 정상을 에워싸고 있어 시내 불빛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내 하산해 0.7Km 떨어진 상사바위와 그 중간 지점의 단군성전을 들러보고 보리암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금산(錦山)의 옛 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고 보리암(菩提庵)은 애초에 보광사(普光寺)로 불렸다 합니다.

신라의 원효대사께서 중생의 고통을 씻어주는 대자대비 빛줄기인 방광(放光)을 받아 보광산(普光山)을 개산(開山)한 것이 문무왕 3년인 서력663년의 일이니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금산으로 개명하기까지 7백년 넘게 보광산으로 불린 셈입니다. 보광산을 올라 소원한대로 대업을 달성한 이성계가 “이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어주겠다”는 산신령께 한 약조를 지킬 수 없자 산 이름을 “비단 산”인 금산으로 바꾸어주었다는 데 산신령님이 이성계의 변형된 약속 지키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조선개국에는 성공했지만 왕자의 난을 겪고 왕위를 물려주어야 하는 등 말년이 그다지 평탄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약속한 비단을 실물로 갚는 대신 산 이름을 “비단 산”으로 개명해주는 것으로 바꿔 갚은 이성계를 산신령께서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남해의 보리암은 영양 낙산사와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해수관음도량의 한 곳입니다. 조선조 현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나라를 열었다 하여 열었다 하여 이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광사에서 보리암으로 개명한 것은 서력1660년의 일입니다.  작가 박태순님이 그의 저서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서 원효대사께서 유토피아로 여기셨던 안양국토(安養國土)의 원초적 정토(凈土)를 곱게 만나고 싶다고 밝힌 곳이 바로 여기 보리암입니다.  

 

  해오름을 맞이하기에 보리암만한 적지(適地)가 달리 없다 싶은 데 언제고 그렇듯이 문제는 날씨입니다.

구름이 끼지 않는 청명한 날씨이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고 이에 살을 에는 칼바람이 해오름을 기다리는 몇 십분 만이라도 새해 새아침을 비껴간다면 정말 고마워할 텐데 2006년의 설악산, 2007년의 백암산과 2008년의 태백산에서 맞이한 새아침은 세 번 다 칼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해를 끝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시인 이원규님은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아무나 오려 하지 마시고”로 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보리암은 3대를 적선해야 볼 수 있는 지리산의 천왕봉이 아닐뿐더러 앞서 3년간 산을 오르며 그간 지은 죄를 사해달라고 빌었으니 산신령께서도  용서하시리라 믿고 정 안되면 동행하는 친구들의 적선을 빌릴 요량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제 믿음이 과히 틀리지 않아 구름이 끼겠다는 하늘이 거의 쾌청한데다 칼바람이 숨죽여 난생 처음으로 산에 올라 바다에서 떠오르는 새해를 여는 해오름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7시가 넘자 별을 먹어 삼킨 열이렛날 밤의 휘영청 밝은 달도 교교한 빛을 접고 여명에 자리 물림을 했습니다. 수평선의 윤곽이 잡히는 가 했는데 어느새 그 주위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해바다에 점점이 박혀 있는 크고 작은 섬들도 바다를 차고 올라오는 해오름을 맨 눈으로 지켜보기가 눈이 부셨던지 살짝 구름을 깔아놓고 맞았습니다. 수평선이 그 붉음을 조금씩 더해가는 동안 해오름을 기다리는 수많은 분들이 한 시도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해오름의 예고편이 이리도 황홀한데 잠시 후면 막이 열리는 해오름의 본편은 얼마나 감동스러울까 기대해서였습니다. 기다림 속의 예고편은 지루하도록 길어 이러다가 함께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제우스신이 참지를 못하고 구름을 흩뿌리며 성질을 부리면 어찌하나 걱정됐습니다. 주위에 하얀 물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며 수평선의 붉음이 옅어져 천리 길 멀다 않고 밤을 뚫고 내달려온 것이 모두 헛 일일 수 있겠다 싶어지자 반시간 넘게 냉기를 잘 참아 온 손가락과 발가락이 아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우스신도 해오름을 기다리는 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리기 쉽지 않았던지 수평선은 다시 붉음을 되찾았습니다. 드디어 태양이 바다를 열고 머리통을 들어 내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본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결실하다니 하며 가슴 뿌듯해 했습니다. 50분 가까이 마음 졸인 끝에 드디어 해오름을 본다 싶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쓸어냈습니다. 콩알만한 머리통이 점점 커지고 절구통만한 몸집이 드러나자 수평선 주위의 붉음이 사라지고 해오름을 더디게 한 섬들이 그 모습을 내보였습니다. 바다를 차고 오른 태양이 수평선에서 제 키만큼 멀어지자 장엄하고 황홀한 해오름은 막을 내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온 누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인년의 새 아침이 열렸습니다.

 

 

 

  장엄한 해오름을 지켜보며 두 아들과 며느리가 올 한 해 건강하고 직장생활을 잘해갈 수 있도록 행운이 내내 함께 하기를 빌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10년 전에 제 곁을 떠난 집사람을 늘 주님께서 가까이 하시면서 돌봐주시기를 같이 빌었습니다. 친구들 적선을 빌려서 해오름을 맞이한 이번이 기회다 해 이것저것 모두 빌어볼까 하다가 그만둔 것은 신년 초하루부터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싶어서였습니다. 어쩌면 친구들의 적선을 빌려도 3대가 적선한 분들에 한참 못 미쳤을지 모릅니다. 이번에 산신령께서 제우스신을 설득해 구름을 멀리 딴 곳으로 보내고 삭풍도 같이 막아준 것은 이제부터 적선을 하라는 함의가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해맞이를 마치고 금산 입구 주차장으로 하산했습니다.

산악회의 다음 프로그램인 연화산 산행대신 저 혼자서 보리암을 거쳐 금산을 다시 오른 것은 일주일 전에 연화산을 오르기도 했지만, 해오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원효대사님과 산신령께 감사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보리암은 역시 안양국토의 정토였습니다.

 

                                

                                                    <해오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