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탐방기
*탐방지 :경기광주/성남 소재 남한산성
*탐방일자:2010. 2. 13일(토)
*동행 :서울사대 화학과 안승열/이상훈 동문
대학 동문 셋이서 남한산성 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한남검단지맥 종주 때 저 혼자 산성을 따라 한 바퀴 빙 돈 것이 2008년 2월이었으니 꼭 두 해만에 남한산성 환주 길에 다시 나선 것입니다. 전날 내린 눈이 소북이 쌓여 설국을 연출한 이 성에 또 다시 눈이 내려 산성의 설경이 두 주전에 종주한 지리산보다 훨씬 더 고혹적이었습니다.
이번에 둘러본 남한산성은 그 역사가 기원전 6년부터 시작됩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후세에 광주로 개칭되는 한산 아래 도읍지를 정하고 이곳에 하남위례성을 축조한 것이 즉위13년인 기원전 6년의 일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서력672년에 문무왕이 이곳에 토성인 주장성을 쌓았고 조선조 16대 인조가 즉위 4년인 1626년에 석성으로 개축했습니다. 그 후 숙종 임금이 병자호란 때 청군이 점령해 공격기지로 삼았던 벌봉까지 외성을 쌓아 동대지에 이어붙인 것이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오늘 날의 남한산성입니다.
산성종로의 주차장에다 차를 세워놓고 남문으로 옮겨갔습니다. 지화문(至和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남문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산성을 빙 돌아 다시 남문으로 돌아오기로 하고 산성 길로 올라섰습니다. 전날 내린 눈이 온 산을 하얗게 뒤덮어 눈 위를 걷는 저희들의 마음도 순백의 눈처럼 하야말쑥해졌습니다. 남문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암문 위를 지났습니다. 약8Km 가량 되는 이 성의 성곽에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의 4대문과 비밀리에 드나드는 16개의 암문을 냈는데 그 중 방금 지난 암문을 통해 몰래 성안에서 성남의 검단산 쪽으로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암문을 지나 봉우리로 올라서자 동쪽 멀리로 용문산이 희미하게 보였고 남쪽으로 제법 큰 옹성이 원성 오른쪽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옹성이란 성문을 보호하기위해 문 밖에다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이릅니다. 총5개의 옹성 중 동쪽과 북쪽에는 각 1개씩만 축조했고 여기 남쪽에 3개의 옹성을 집중 배치한 것은 남사면이 다른 쪽보다 경사가 완만해 적으로부터 공격받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옹성으로 나가 사진 몇 방을 찍은 후 좌익문으로 불리는 동문으로 내려섰습니다. 두해전만해도 성곽이 거의 다 무너져 잔해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남쪽의 성곽을 깔끔하게 복원해 옛 성곽을 새로 볼 수 있었습니다. 내림 길의 경사는 급했지만 새로 내린 눈이 많이 쌓여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산성종로에서 광주로 내려가는 차도에 내려서자 길 건너 동문까지 성곽이 끊겨 있었습니다. 길 건너 아스팔트길로 계속 오르면 망월사에 이르는데 저희들은 오른 쪽의 동문을 지나 다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올랐습니다. 누군가가 성곽위에 앉혀 놓은 귀여운 눈사람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것은 눈사람이 수명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보다 더 짧아 금세 녹아 사라지기 때문으로 바위에 부처님의 모습을 그려놓은 옛 분들의 마음도 사진을 찍는 저와 같았을 것입니다.
송암정(松岩亭) 비문에서 황진이에 얽힌 전설을 읽었습니다. 기생 두 명과 술을 마시는 남자 수명 중 술에 취한 한 남자가 지나가는 황진이에 희롱하려들자 개성 명기 황진이가 심오한 불도를 설법했고 이에 감명 받은 기생 한 명이 이 바위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며 그 후로 달 밝은 밤에는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전설의 주 내용입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조선 명기 황진이가 살아 활동한 때가 불과 5백년도 안 지났고 그 때라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승정원일기에 남길 정도로 최고의 기록문화를 자랑하던 때인데 이런 사적인 이야기들은 왜 사실이 아니고 전설로 전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개인사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이 없었다면 조일전쟁의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승정원일기를 남겨온 조선왕조 치하에서 두 분처럼 일기를 남긴 분들이 거의 밝혀지지 않는 것은 개인이 일기를 남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분명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한학에 능통한 사대부들도 거의 일기를 남기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나중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그리한 것이 아닌 가 싶습니다. 사실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전설로 떠넘기기만 해서야 역사가 발붙일 공간이 어디 있겠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에서 해본 말입니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장경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할 때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군막으로 지었다는 장경사는 당시 성안에 있었던 9개의 사찰 중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사찰입니다. 펑펑 쏟아지는 눈들이 착지한 후 수명을 늘리는 유일한 길은 얼고 녹기를 반복해 고드름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퍼붓는 함박눈이 동행한 친구 무심거사(無心居士)를 꼬드겨 이 절의 무심당(無心堂)에 주저앉힐까 걱정되어 서둘러 처마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을 사진 찍은 후 다시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아이젠도 차지 않고 두 아들 딸들을 손 붙잡고 오르며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는 30대 후반의 젊은이를 뒤따라 오르며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은 안전한 집안에서 애들과 놀아주는 것이 모성애라면 조금 위험하고 힘들더라도 산으로 데리고 나가 자연과 벗하게 하는 것이 부성애다 싶었습니다. 암문을 통해 장경사신지옹성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며 설날을 하루 앞두고 내리는 저 눈이 묵은해의 찌꺼기들을 깨끗하게 닦아내주기를 빌었습니다.
군포지 안내판이 세워진 동장대지에 올랐습니다. 군포란 성을 지키기 위해 지은 초소건물로 모두 125개를 지었다는데 현존하는 군포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장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들이 참으로 소담스러워 보이는 성곽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남한산성의 원성과 외성인 봉암성을 연결해주는 동장대암문이 나타났습니다. 봉암성이란 숙종임금이 원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에워싸서 축조한 남한산성의 외성을 이릅니다. 봉암성으로 들어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선점해 화공기지로 삼았던 벌봉을 다녀오고 싶었지만 같이 간 안사장이 시간이 없다고 해 곧바로 북문으로 향했습니다. 성곽과 떨어져 거목의 활엽수가 쓰러져 누워 있는 옥정사지를 지나 다시 성곽으로 가까이가자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들로 성곽의 운치가 더욱 고풍스러웠습니다. 곡선의 성곽이 아름다워 전쟁대비용으로 쌓은 것이 아니고 임금이 휴양 차 묵어가도록 별궁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 성에 하얀 눈이 내려앉았습니다. 성곽 길에는 우리 고유의 소나무가 더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하얀 눈길에도 소나무가 제격이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아 사진 한 장으로 성곽의 안과 밖을 모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북문에 도착해 남한산성의 11경을 담은 사진판을 조감한 후 수어장대로 향했습니다.
시멘트 길을 따라가다 서문으로 질러가다가 국청사를 들렀습니다. 조선조 인조 3년 각성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절도 앞서 들른 장경사와 마찬가지로 승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해두는 등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절에 이르기 조금 전에 길 왼쪽 아래로 보이는 교회가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께서 말년을 보내신 곳이라고 무심거사인 이교수가 알려주었습니다. 산성 안에 천주교의 성지도 자리하고 있는바 이만하면 남한산성이야말로 불교와 개신교 및 천주교가 공존하는 곳이어서 종교박물관 같은 것을 세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로 가다가 소나무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보고 제가 조금 실망한 것은 소나무의 수명이 고작 82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깊은 산 속 바위 끝에 자리해 독야청청한 소나무를 보면 그 고결함에 무릎 꿇고 빌고 싶은 경건한 마음이 절로 생기는데 이런 소나무가 죄 많은 사람들의 수명과 별반 다르지 않다니 말입니다. 성곽에 걸어놓은 색색의 군기들이 바람에 펄럭여 조청전쟁 때 지휘소로 쓰인 수어장대가 가까워졌다 했습니다. 조청전쟁의 악령만 떨어낼 수 있다면 주변의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한껏 평화로워 보이는 수어장대에 올라 동행한 친구들과 함께 장진주사라도 읊고 싶었습니다.
해발480m의 청량산 산마루에 자리한 수어장대에서 조선조 16대 임금인 인조를 만나보았습니다. 이 성안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45일 만에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것은 먹을 것이 부족한데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논쟁이 지긋지긋해 어떤 식이든 끝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남한산성보다 훨씬 넓고 식량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는데 청군이 길목을 먼저 차지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이 성으로 들어온 것이라며 처음부터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왔다 합니다. 임금이 정말 힘들어 했던 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주화파와 척화파들이 벌인 지긋지긋한 논쟁이었습니다. 척화파의 김상헌이나 주화파의 최명길 모두 충신이어서 누구 편을 들어줄 수도 없었고 그래서 논쟁을 끝낼 수 없었다는 것이 임금의 변이었습니다. 제가 이분과의 이야기를 이만 끝낸 것은 더 이상 이분에게서 임금다운 말씀을 기대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백성들의 안위를 책임진 임금이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논하는 자리를 어느 신하가 충신이냐를 가름하는 장으로 이해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어야 했습니다. 척화파 김상헌이 사심이 없고 나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화파 최명길도 잘 알았으며 김상헌도 최명길이 이 나라의 동량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청나라 감옥에서 진정으로 두 사람이 화해를 했던 것입니다.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가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인데 둘 다 충신이어서 판단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입니까? 인조 임금이 당시 상황을 냉철하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면 진작 화친을 청해 백성들이 청군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줄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국력을 키워 후일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인조임금이 강화도로 피신가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원의 침공을 피하고자 강화도로 천도해 고려왕조가 근근히 연명해가는 동안 백성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고려 왕조도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나와 원에 항복한 것 모두 역사적 사실인데 인조임금이 대책 없이 강화도로 옮겨갔다면 항전기간은 길어졌을 것이고 그동안 조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백성들이 엄청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국력이 다해가는 명나라에 사대하고자 광해군의 대청유화책을 폐기한 인조가 그 대신 청나라와 한판 붙어볼 수 있도록 전쟁수행능력을 키워놓지도 않았습니다. 광해군을 내쫒는 반정에 성공한 조정이 이괄의 난에 놀라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 외에는 입방아들만 찧었지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는 거의 한 일이 없기에 조청전쟁에서의 패전은 충분히 예기된 결과였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부분에 나오는 인조임금의 생각과 대화는 순전히 제 생각이기에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남문 출발 3시간 반 만에 다시 남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수어장대에서 무궁화동산을 거쳐 남문에 다다른 시각이 14시3분으로 한 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새로 내린 눈을 녹여 길바닥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산성탐방을 모두 마친 후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 안승렬사장이 낸 점심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자식들이 찾아온다고 안사장은 먼저 떠났고 식후불음이면 우연득병 할 까보아 걱정하는 이교수가 분위기 넘치는 한 곳으로 저를 안내해 한방차를 마시고 뒤풀이를 끝냈습니다.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과 서문에 붙은 연주옹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곽을 모두 돌면서 역사와 자연을 어우르는 탐방 장소로 이만한 데가 흔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마침 내린 눈이 이 성을 신비의 설국으로 만들어 탐방 내내 설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자연을 화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 지우들과 함께 한 이번 나들이가 이 탐방기로 오래오래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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